작성일
2013.08.16
수정일
2013.08.16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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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6> 수영비행장』 양흥숙(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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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6> 수영비행장

센텀으로 익숙한 그곳, '수비'(수영비행장)라는 지명만 남은 軍用비행장이 있었지

 

수영비행장을 의미하는 '수비'는 우리의 시야에서 이미 사라졌고, 지명으로 남아 있다가 이 일대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바뀌는 탓에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점차 멀어지고 있다.

해운대 수비지점이라는 간판을 내건 몇몇 음식점 등에서 수비라는 명칭을 겨우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수비삼거리는 수비사거리였다가 이제는 오거리가 되고 그 이름도 거창한 올림픽교차로가 되었다. 옛 수영비행장이 있던 터는 지금 센텀시티로 더 잘 알려졌다. 오랜 역사를 가진 부산에서 50년 정도 존치한 수영비행장이 부산의 '잊힌 공간'으로 선택된 이유는 뭘까? 이 지역에 수비라는 이름이 빠르게 지워지는 것은 골프장, 비행장, 군부대, 컨테이너 야적장이라는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민과 호흡하지 못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수비삼거리라는 명칭을 기억할 뿐 수영비행장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너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나 빠르게 지금의 모습이 되면서, 도심 한복판에 공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성으로 다가온다.

■일제 병참기지 필요성에 탄생

부산에 비행장을 만들자는 논의는 이미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조선총독부 고시(告示)에 따라 공용 비행장으로 설치된 것은 1929년 경성비행장과 울산비행장이었다. 비행장들이 속속 생겨나자 부산과 오사카, 시모노세키 사이의 우편, 화물과 여객 운송을 위한 비행장이라든지, 일본과 만주를 연결하기 위한 경유지로서의 비행장이라든지, 부산 비행학교 건립 등의 논의 속에서 부산비행장 설치 문제는 정책 현안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애초에는 평야지대인 부산의 대저, 명지 일대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때도 현재의 김해공항이 있는 일대가 비행장이 들어서기 좋은 땅으로 여겨졌나 보다.

그러는 사이에 항공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체신 당국에서 대구에 비행장을 새로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운영되고 있던 울산비행장을 폐쇄하고 대구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공항 유치 문제는 부산시와 경상남도 일대를 들썩거리게 하고,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만큼 지역의 첨예한 현안이 되고 있지만, 당시에도 울산 사람들은 울산군민대회를 열고 총독부에 항의방문을 하는 등 비행장 이전반대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울산의 반대에도 1937년 대구비행장이 개설됐다.

부산에 비행장이 정식으로 들어선 것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비행장이 들어선 곳은 일본인 자본가가 조성한 해운대골프장이 있던 곳이었다. 일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군사비행장을 계획하고, 이곳에 있던 소나무 등을 베어내고 활주로를 만들었다. 한 원로교수의 기억에는 자신이 중학교 1학년 때 근로봉사라는 이름으로 수영비행장의 활주로를 닦았고, 수영비행장으로 가기 위해서 대연동에서 수영까지 걸어 다녔다고 한다. 건강한 청년은 모두 징병, 징용이다 해서 남아 있지 않으니까, 일제는 노약자와 어린 학생들까지 비행장 공사에 동원했다.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김해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면 비행기에서 어김없이 '김해공항은 군사공항이오니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해공항은 여객수송을 위한 민간 비행기뿐 아니라 군용비행기가 이착륙한다는 의미이다.

일제의 육군비행장으로 출발한 수영비행장은 그 이후에도 군대가 주둔하고 국방부가 담당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일반 시민과는 격리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35만 평이 넘는 비행장 부지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 275만 평이 군사보호구역 등으로 지정되어 개발이 제한되면서 일반 시민과의 갈등이 늘 내재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민간항공기가 취항한 이후에도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라서 당시 '비행기 타봤나?'라는 말은 지극히 특별한 경험을 뜻하는 것이었다. 비행장 주변 학교에서는 하루 40여 회의 비행기 이착륙 소음으로 수업에 지장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기 일쑤였다. 여객 수송이나 화물 운송을 위한 민간공항이 김해로 옮겨진 이후에도 수영은 오랫동안 군용비행장으로 사용됐다. 수영비행장 부지를 부산시로 완전히 넘겨준 이후에는 수영비행장에 있던 군사시설을 김해공항으로 옮겼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차례 민간항공기가 이착륙하지만, 여전히 김해공항은 '제한된' 공간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해방 후 수영비행장이 정식 직제화한 것은 1958년 1월 대통령령에 따른 것이었다. 국제비행장으로 김포공항을 지정하면서 우리나라의 비행기 직제를 새로 만들었다. 이때 서울비행장, 부산비행장(수영비행장), 광주비행장, 강릉비행장, 제주비행장이 민간항공기가 이착륙하는 비행장으로 지정되었다. 부산비행장은 1963년에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다. 앞서 전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수영비행장 대합실이 완공되어 건물 낙성식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행기 탑승인구가 증가하고, 대형 기종의 비행기가 등장하고, 그에 따른 긴 활주로와 기반 시설이 필요함에 따라 1976년 부산수영비행장은 김해로 옮겨갔다.

수영비행장은 이후 국방부가 담당하는 곳이 되었지만, 때로는 군중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부산을 방문하였을 때 수영비행장에 내렸고 이곳에서 노동자, 농어민 등 30여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교황의 강론이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1987년 가을 이 일대에는 군정(軍政)을 종식해 보려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열기로 넘쳤던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옛 수영비행장 부지는 점차 시민의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부산시민과 부산시는 시민에게 부지를 돌려달라는 청원을 계속하였다. 국방부는 번번이 거부하고, 주유소, 야적장 등 민간업자에게 부지를 임대해 버렸으나 결국 1994년 수영군비행장을 김해로 옮긴다는 발표가 있으면서 이 지역은 시민의 공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정치인도 대표선수들도 출입국한 임시국제공항

■ 6·25전쟁기 수영비행장

- 전쟁통에 항공료 배 이상 올라
- 항공용 기름 제때 조달 못한 탓

6·25전쟁기 부산을 떠올리면 피란민이 밀집해 있는 산동네, 그들의 삶터인 국제시장, 애환의 영도다리, 서울 문인들이 찾던 다방 등이다. 게다가 1000일간의 임시수도였기 때문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가와 국회의원 등 유명인이란 유명인 대부분이 부산에서 피란살이했다.

제2대 장면 총리가 1951년 1월 수영비행장으로 환국했다,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연합군총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1952년 1월 신익희 당시 국회의장이 새해를 맞아 유엔군을 격려하기 위해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등의 신문 기사가 6·25전쟁기의 수영비행장 위상을 짐작케 한다. 게다가 1952년 제15회 핀란드 헬싱키올림픽에 참가했던 대표선수들이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비행장은 환영인파로 가득찼다는 기사는 어려운 여건에도 메달을 따고 돌아온 선수도 선수지만, 전쟁이라는 혼란을 견디고 있는 국민 스스로의 위로를 표출하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소개하자면 혼란스러운 전쟁통에 비행기값이 인상된 점이다. 서울-부산 간 항공 운임을 3만 원(圓)에서 7만5000원으로 올리자는 것인데, 이미 철도 가격이 1등급 좌석 기준으로 2만2133원에서 6만4134원으로 인상되었기 때문에 같이 인상한다는 것이고, 일본 같은 경우는 기차 가격보다 항공료가 2배 정도 비싸서 인상 값이 비싸지 않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항공료 인상액을 달러로 환산하면 30달러(엄격히 말하자면 외국인 운임가이다)로, 지금과 비교하면 항공료가 굉장히 높다. 전쟁통에 항공용 기름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비행기에 사용되는 휘발유, 윤활유를 일본에서 공수하고 있어 항공료를 인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항공료를 비교하면 서울~부산과 부산~제주는 30달러, 부산~대구는 10달러, 대구~제주 구간은 35달러였다. 서울~제주 간 요금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이 구간 직항노선이 없었던 모양이다. 비행기는 정기적으로 이들 도시를 운항하고 비정기적으로는 일본에 기름을 채우러 다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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