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3.08.16
수정일
2013.08.16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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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7> 동래별장과 온천』 변광석(한국민족문화硏 HK전임연구원)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7> 동래별장과 온천』 변광석(한국민족문화硏 HK전임연구원) 20130814_국제신문_021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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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7> 동래별장과 온천

왕실·양반의 휴식처 동래온천, 日帝가 별장 짓고 온천장 개발 아이러니

 

■동래별장 가는 길

 

동래 온천장 번화가에서 금강로를 걷다 보면 온천1동 주민센터가 보인다. 그 뒷길로 살짝 접어들면 아주 긴 기왓담을 직각으로 펼치고 안으로 고가와 수목이 들어선 별천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유명한 동래별장(東萊別莊)이다.

 

지금은 야외결혼식 및 궁중 한정식과 각종 코스 요리로 알려진 식당이지만, 원래 일제 강점기 초에 지어진 일본식 정원건축이었다. 해방 이후 방치된 별장이 미군에 의해 군정사무실과 휴양시설로 이용되다가 민간인에게 매각돼 고급 요식업으로 오랫동안 운영됐다. 1990년대 이후 한때 문을 닫았다가 2000년도에 재개장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APEC 공식 레스토랑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역사를 품어온 온천

 

역사의 시계를 돌려 온천장의 유래를 보자. 온천장은 원래 금산리(金山里)로서 100여 년 전에는 30여 호가 살던 자연마을이었다. 수려한 금정산 기슭에 있었으니 금산마을이라 불렸다. 이곳은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온정(溫井)이 알려져 온천욕을 하면 아픈 사람의 몸을 치유해 주는 특효가 있기로 유명했고, 고려·조선 시대에도 많은 왕실 종친과 양반 문인들이 왕래했다.

    

심지어 조선에 사신으로 온 일본인들도 온천의 효능을 알고 동래 온정에 일부러 들렀다가는 해프닝이 더러 있었다. "1438년(세종 20) 내이포(진해 웅천)에 들어왔던 왜인들이 서울에 올라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모두 동래 온정에서 목욕하는 바람에 길을 둘러서 달리게 됨에 따라 사람과 말이 모두 지치게 되어 폐단이 많으니, 이들은 영산 온정에서 목욕하게 하고, 부산포에 정박한 왜인은 동래 온정에 목욕하도록 했다"고 한다('세종실록' 20년 3월 1일). 이와 함께 조선 중기 문신 이윤우(李潤雨)가 1617년(광해군 9) 노구의 스승인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모시고 동래온천에 다녀온 일기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 등 알려진 이야기가 많다.

    

방문객이 많이 이용하고 시설이 점차 노후해지다 보니 욕탕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1766년(영조 42)에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온정을 대대적으로 고쳐 짓고는 그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바로 온정개건비(부산시기념물 제14호)로서 1.4m 높이의 아담한 비석으로 현재 녹천탕 앞 용각 안마당에 세워져 있으며 매년 용왕제를 지내고 있다. 이렇게 역사성이 깊은 온천이 정작 경술국치 이후로 일본인들에 의해 온천이 특화되고 개발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개발과 근대 관광   

 

한말 이후 부산은 서구 근대문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본 자본가들이 부산에 대거 진출하면서 근대의 상징인 전기와 철도를 가설하기 시작했다. 1909년 부산~동래 간 경편철도를 운행하다가 1915년에는 부산 도심에서 온천장까지 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온천장의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개항장 전관거류지에서 많은 일본인이 온천장·금강공원·범어사·통도사 등을 유람하는 붐이 일어난 것도 이때부터였다.

  

동래별장은 일제 강점기 대지주 하자마(迫間房太郞)가 지은 일본식 정원건축이었다. 그는 19세기 말 부산에 들어와 장사하다가 독립한 뒤 토지약탈과 고리대 등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동래·김해·양산·밀양 등에 많은 땅을 가진 대지주였다.   

 

당시 부산에는 그와 같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곳곳에 별장을 짓고 관광과 유흥을 즐겼다. 온천장에서 유명했던 여관 중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봉래관(蓬萊館·농심호텔의 전신), 대지여관(大池旅館) 등이 있었다. 깨끗한 욕탕과 호사스러운 시설을 갖추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봉래관 앞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지금의 허심청 앞 일대다. 연못은 온천천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호수로서 나룻배를 타거나 물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잘 알려졌다. 지금도 농심호텔이나 허심청에 들어가면 복도에 전시되어 있어 옛 모습을 생각게 한다.

    

처음 별장 자리에 있던 건물을 헐고 본관과 별관 등 확장 공사를 하면서 박간별장(迫間別莊)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전체 구조와 배치는 일본인 부자의 위세를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 일본의 고위 관리가 부산에 오면 머물기도 하고, 한때는 일본 왕족이 방문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먼저 '동래별장'이라 쓰인 대문에 들어서면 공간을 하나씩 만날 수 있다. 첫눈에 진입로 따라 아담한 숲사이로 별장의 본관이 나타난다. 긴 복도와 유리창으로 장식한 목조 2층의 일본식 건물로서 해묵은 외벽 목재와 석조로 된 실내 목욕탕이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다만 보수하면서 일부 목재의 교체가 있었고, 지금은 한정식 레스토랑으로 변해 실내의 원래 구조를 알 수 없다. 정원에는 각종 수목과 석물이 잘 조경되어 있다. 뒤에 가면 일본인 구미에 맞춘 작은 연못과 돌다리를 감상할 수 있는 정자가 있고,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에 좋다.

    

근대 개발의 붐이 일면서 온천장은 대단한 유명세를 탔다. 그러자 업주들은 손님을 더욱 많이 끌려고 애썼다. 1915년 온천장에 대욕탕을 신축한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는 입욕권과 철도할인권을 묶어 발행하면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이른바 관광과 목욕을 묶어 파는 패키지상품이었다. 1922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온천장에 대형 만철호텔을 세우면서 온천경영권을 주도했다. 당시 온천욕과 금강원 관광을 선전하는 사진엽서나 안내도가 유행하여 사람들의 관광선망을 자극했다.

    

이렇게 동래온천과 금강원을 하나의 위락권으로 만든 관광문화는 제국주의 일본의 자국민과 조선민에 대한 식민지관광 육성책에 의한 것이었다. 유서깊은 동래에서의 온천욕과 여행경험담은 일본인들을 부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입항하게 만든 식민지 관광의 효과적인 홍보수단이었다. 이로써 대규모 숙박시설, 식당과 상점이 들어서고 화려한 벚꽃 가로숫길이 열리면서 일본인을 위한 환락형 온천장으로 변해갔다.

    

# 한 세기 돌고 돌아

 

- '영욕의 세월' 딛고 다시 시민 품 안은 도심 속 휴식 공간

    

동래별장은 제국주의 강점기에 일본인 수탈자본가의 별장이었다가 해방 후 군정 시절엔 미군들의 휴양시설로 내어주던 오욕의 세월을 거쳐 비로소 한국인의 손에 들어온 반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민간에 매각되고 1960~80년대에는 부산에서 매우 잘나가는 고급 요정이었다. 이른바 정·관·재계의 유명인사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가야금과 장구의 장단에 부채춤을 추는 기생들이 즐비했으니 하룻밤 연회가 끝난 이튿날에는 수십 벌의 한복이 별장 앞 세탁소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학부 시절에 농담으로 동래별장 기생 구경하러 가자고 종용하던 별난 친구도 있었다. 물론 당시 시세로 한 상에 100만 원을 호가했으니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거늘. 지금 동래별장에는 전통혼례식장, 민속공연마당, 한식당, 일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아늑한 자연 속에서 음식공간의 영역을 초월하여 한국과 일본의 요리 등 다국적 맛을 볼 수 있고, 다양한 공연을 감상하며 편안히 함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동래구에서는 매년 10월 동래읍성역사축제를 열고 있다. 동래읍성과 문화회관 및 온천장 일원에서 다양한 문화놀이와 역사재현 마당이 펼쳐지는 흥겨운 한마당이다. 용각 앞에서는 동래온천 용왕제 길놀이도 구경할 수 있다. 온천축제가 열리면서 동래스파토피아라는 명물도 등장했다. 지나는 길손들은 아무나 발을 담그고 피로를 풀 수 있는 노천 족탕이다. 지난 영욕의 세월을 걷어내고 이제 온천장은 시민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왔다. 동래별장과 온천은 시민들에게 더욱더 친숙한 휴식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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