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3.08.19
수정일
2013.08.19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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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4> 피란민의 흔적, 판잣집』 차철욱(한국민족문화硏 조교수)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4> 피란민의 흔적, 판잣집』 차철욱(한국민족문화硏 조교수) 20130815_국제신문_014면.jpg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4> 피란민의 흔적, 판잣집

한 세대, 1·2평가량 공간서 불안한 삶

 

"낙엽진 포푸라가 눈바람 속에서 추워떨면 판잣집 문틈으로 밀려들고 겨울바람이 한결 차거웁다." 1952년 12월 어느 날 국제신문에 실린 피란민의 판잣집 생활풍경이다. 피란민들의 부산 정착은 갑작스러웠다. 특히 1·4 후퇴와 이북피란민들의 부산행은 더욱 그랬다. 북진한 국군과 유엔군의 생각지 못한 철수 때문이었다. 잠시 이 순간만 피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부모형제와 평생 못 보고 살아갈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전쟁 직전 약 40만 명 정도였던 부산 인구는 1·4 후퇴 이후 84만 명을 넘었으니, 사회시설이 풍족할 리가 없었다. 정부와 부산시가 부랴부랴 수용소를 마련하였다. 적기수용소, 영도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등 공장이나 극장 같은 대규모 시설을 지정하였으나, 모두 7만 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었다. 수용소라고 해서 특별한 시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기수용소는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수출하는 소를 검사하던 막사였다. 당감동수용소도 인근 가야역에서 사용하던 말 마구간이었다. 이런 수용소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피란민들은 스스로 주거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친척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셋방을 비싸게 장만해야 했다. 이것도 저것도 마련할 수 없는 피란민들은 빈 땅만 있으면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판잣집은 국제시장과 부두를 배경으로 한 곳이면 어디든 등장했다.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 영도 바닷가, 충무동 해안가 등에는 순식간에 판잣집들로 가득했다. 판잣집이라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리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보수천가나 해안가의 판잣집은 수상가옥 같았다.

판잣집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한 세대가 1, 2평 남짓 된 공간이었다. 넓을 필요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곧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료 구하기도 어려웠다. 바닥을 조금 파고 모퉁이에 나뭇가지로 기둥을 세우고, 가마니로 벽과 바닥을 만들었다. 나무판자나 운 좋게 함석을 구하면 지붕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도 안 되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박스에 콜타르를 발라 사용하였다. 혹은 돌을 주워다가 돌벽을 만들기도 했다. 돌아다니다 집 짓는 재료는 무조건 주워다 사용했다. 이웃에 누군가 또 피란 오면 집터를 양보하면서 같이 어울려 살았다. 판잣집에 몸만 눕혀 잘 수 있으면 좋았다. 피란민 마을의 흔적이 남아있는 당감동이나 아미동, 우암동에는 이런 집터의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다.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피란민들을 괴롭힌 것은 화재였다. 하루에도 몇 건씩 발생하는 화재는 판잣집을 원흉으로 몰아갔다. 국제시장 화재, 부산역전 대화재로 판잣집 철거가 본격화되었다. 화재는 또 다른 이재민을 생산했다. 그동안 얼기설기로 만들었던 판잣집도 사라졌다. 미국 원조기관에서는 천막을 제공하여 이재민의 임시거처로 사용하였다. 천막 임시거처는 괴정, 영도 청학동, 동상동 등에 설치되었다. 난방시설이 없어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토박이들의 텃새도 만만찮았다. 아미동 천막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에 설치되었다. 천막 하나에 12~16가구가 함께 살았다.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무덤 하나가 한 가족의 집이 되었다. 이런 시설이지만, 시내가 가깝고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던 피란민들에게는 그나마 좋은 위치였다.

피란민 마을 가운데 그때부터 여태까지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판잣집은 현대식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비좁은 골목길이나 집들의 모양새에서 당시의 흔적은 여전하다. 피란민의 생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오늘의 부산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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