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3.08.22
수정일
2013.08.22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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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5> 한국정치와 무덕전』 차철욱(한국민족문화硏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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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5> 한국정치와 무덕전

폭압 정권과 저항세력이 충돌한 공간

 

"국회의원은 버스 속에서 수난, 피란민들은 장마를 만나서 수난"이라고 적힌 신문기사의 한 토막이 1952년 피란 시절 우리나라의 정치와 피란민들의 생활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매일 날품을 팔아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고, 얼기설기로 엮어 만든 판잣집에서 고단한 육체의 피로를 풀어야 했던 피란민들에게 긴 장마는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변수였다. 1952년 5월 26일 통근버스에 탄 국회의원들은 5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감금되었다가 공병대 크레인에 끌려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이 사건만큼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무시당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6·25전쟁 당시 한국 정치의 소용돌이는 오늘날 서구 부민동에 자리 잡았던 경남도청과 도지사관사였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일어났다. 도청은 정부청사로, 도지사관사는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었다. 국회의사당은 1.4후퇴 이후에는 부산극장에서 개원했다가 1951년 6월 경남도청 내 무덕전으로 옮겼다. 야당 국회의원이 다수를 구성했던 당시 국회와 이승만정권 사이의 갈등은 커다란 정치적 사건으로 드러났다. 거창양민학살, 국민방위군사건, 중석불사건 등을 파헤친 것은 6·25전쟁 당시 이승만정권에 도전한 살아있는 국회의 참모습이었다.

국회의원들의 버스 속 수난은 국회와 이승만정권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양측의 갈등은 이승만 저격 사건으로도 연결되었다. 무덕전은 국회의원들의 공론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친이승만계열 정치깡패들의 국회의원 성토장이기도 하였다.

무덕전은 1938년 2월 경상남도 경찰부가 유도, 검술 등 무술연마를 위한 체육관으로 건설했다. 건설 자금은 부산의 일본인 기업이었던 조선가스회사가 남선전기로 병합될 때 경상남도에 제공한 기부금 11만 원을 이용했다. 규모는 건평 187평으로 기와 건축물이었다. 무덕전은 건물의 본래 목적인 무술연마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지만, 정치적인 행사의 공간으로도 자주 이용됐다. 일제 강점기 말 군인으로 참전하는 젊은이들이 징병검사를 받는 공간이기도 하였고, 군인으로 참전한 가족을 위문하는 행사장으로도 활용되었다. 또 방공사상 보급과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조선방공협회 경남도연합회지부가 결성되던 곳이기도 하였다. 즉 그 시대 무덕전은 일제의 정치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됐다.

6·25전쟁 당시 무덕전은 일제 강점기와 비슷한 정치적인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 전 군법회의장으로도 이용됐다. 그 시절 군법회의로 다루어진 대표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조방낙면사건'이었다. 

조선방직은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돌아간 귀속재산이었다. 6·25전쟁 당시 종업원 6000명 이상의 대규모 방직공장이면서 전쟁의 피해가 없어 군복지를 생산하는 군납공장으로 지정되었다. 조선방직은 일제 강점기부터 근무해온 기술자 정호종과 부산의 대표적인 경제인 김지태 등이 참여하여 불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권이 큰 기업체였기 때문에 불하를 위한 정치적인 입김도 적지 않았다. 

이승만의 양아들로 알려진 강일매에게 불하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 내용은 낙면을 이용한 군복제조로 군인들의 전투력을 떨어뜨려 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사법부 재판이 아닌 군법재판이 가혹하다는 여론에도 이 재판은 1951년 5월 18일 무덕전에서 공개리에 진행되었다. 관심이 많았던 사건인 만큼 방청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기소 내용은 피고인들이 남로당원이었다는 점, 군복의 품질을 고의로 낮춰 적을 이롭게 하여 국군의 작전을 방해했다는 점 등으로 이적행위로 규정되었다. 단순한 기업체 불하와 관련한 경제사건이 아니라 정치와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무덕전은 한국현대사에서 단순한 심신수련장이 아닌 폭력적인 수단으로 국민을 지배하려는 국가권력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충돌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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