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3.08.27
수정일
2013.08.27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422

『명저 새로 읽기 -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곽차섭(사학과)

『명저 새로 읽기 -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곽차섭(사학과)  20130824_경향신문_021면.jpg

[명저 새로 읽기]앨런 재닉·스티븐 툴민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ㆍ분석철학을 낳은 ‘세기말 빈’의 문화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1918) 머리말에 나오는 유명한 언명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의 절대적 구분, 즉 사실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을 칼로 자르듯이 단절한 것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과 종래의 모든 철학자들을 갈라놓은, 결코 넘을 수 없어 보이는 경계선으로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 수리논리학이나 분석철학의 발전에 공헌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온 것도 사실과 가치에 대한 바로 이러한 구분 때문이었다. 그가 러셀과 프레게, 그리고 조지 무어 등 영국의 논리철학자들과 맺은 친교도, 철학이란 언표 가능한 세계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체라는 주류 해석에 일조하였다. 요컨대 <논리-철학 논고>는 한 천재 철학자에 의한 매우 새로운, 순수 논리적 성격의 저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한 중요한 측면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제 어떻게 그러한 발상을 하게 되었을까. 그가 케임브리지에 온 뒤라고 말하면 문제는 쉬워지겠지만, 과연 그럴까? 앨런 재닉과 스티븐 툴민이 함께 쓴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필로소픽)은 바로 이 의문에서 출발한다. 풍요롭게 보이지만 쇠락의 징후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던 세기말 빈-19세기말에서 1차대전 이전까지의 합스부르크 제국 말기-의 문화지형과 시대정신을 비트겐슈타인과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그의 저작 의도를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재미는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작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를 다룬 부분보다는, 저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발상을 예비한 인물들로 지목한 사회비평가 카를 크라우스, 건축가 아돌프 로스, 평론가 프리츠 마우트너 등을 중심으로 기술된 지성사적 기술을 음미하는 데 있다(칼 쇼르스케의 역작 <세기말 비엔나>와는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 당시 빈의 문화계는 오늘날 상상키 어려울 정도로 매우 촘촘히 밀착되어 있었다. 소집단을 형성한 문화 엘리트들은 일상에서 서로 빈번히 조우하고 있었다.

예컨대 안톤 브루크너가 루트비히 볼츠만에게 피아노 교습을 해주고, 구스타프 말러가 정신적 문제로 프로이트를 찾아가고, 요제프 브로이어가 프란츠 브렌타노의 주치의일 뿐 아니라, 프로이트와 결투를 벌였던 빅토어 아들러가 그와 함께 저명한 신경학자 마이네르트의 임상진료소 조수였다는 식으로, 세기말 빈의 문화 엘리트들은 친분으로든 적의로든 서로 가까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이다.

철학계를 놀라게 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발상은 그 자체로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바로 그가 얽혀있던 빈의 문화적 산물이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빈으로부터 무엇을 얻었던가? 결론은 이렇다. <논리-철학 논고>는 본질적으로 논리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글 첫머리에 인용한 그의 언명을 이런 관점에서 연결하자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말해질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명료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기말 빈의 이른바 ‘카카니아’ 문화는 휘황하고 번드레한 말의 성찬을 쏟아냈지만, 도덕과 가치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들은 바로 그러한 성찬의 허망함을 직시하려는 하나의 놀라운 철학적 시도였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을 포용치 못한 카카니아 문화는 1차대전에서의 패배 이후 마치 신기루처럼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