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처럼 합리적 이성으로 사회를 개선하려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자 오로지 감각 경험을 통해 검증된 사실만을 지식으로 인정하는 ‘실증주의’가 태동했다. 형이상학적 존재를 미신처럼 배제시킨 이들의 사상은 이후 물리학자 마흐를 통해 더욱 극단적 방식으로 변형됐다. 마흐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를 거부한 채 인식하는 자아와 의식마저도 단지 감각 요소들의 복합체일 뿐이라 주장했다. 어딘가 센서와 인공지능이 결합한 피지컬 AI를 닮은 그의 ‘경험비판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학은 ‘실재’를 설명하기보다 경험에 대한 효율적 정리와 기술이다. 가령, 우주를 품은 그물 같은 ‘절대공간’이나 모두가 공유하는 ‘절대시간’은 경험할 수 없는 믿음에 가깝다. 따라서 우주 밖에서 응시하는 절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우주 속 개인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회복해야 한다. 상대속도에 따라 관찰자의 시간과 공간이 달리 측정될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바로 마흐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이후 마흐 철학은 감각 경험 중심의 심리적 요소를 수학 같은 정교한 논리적 언어로 대체하면서도 ‘실증주의’의 신념을 계승한 ‘논리실증주의’로 진화했다.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도 영향을 받았다.
반면, ‘물질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제한된 경험과 인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현상’과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을 구분했던 칸트 방식의 관념론으로 돌아가려는 ‘신칸트주의’와 세계가 의식으로 나타나는 ‘현상’의 보편성을 파악하려는 ‘현상학’이 등장했다. 칸트는 감각 자료와 타고난 인지의 범주 틀을 종합하면 경험적 ‘현상’ 세계를 알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현상’ 너머의 궁극적 실재에 해당하는 ‘물자체(物自體)’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학철학 측면에서 ‘신칸트주의’가 현상 경험의 한계 극복을 위해 고정된 인지 범주의 틀을 성장하는 과학 이론으로 대체했다면, ‘현상학’은 수, 논리 형식, 물질 같은 객관적 대상과 인간 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파고들었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기반한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양자물리 이론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태동한 경험비판주의-신칸트주의-현상학이라는 철학적 흐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원자는 그 객관적 실체를 알 수 없기에 현상으로 드러나는 관측의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관측의 행위나 조건이 경험의 모습을 바꿀 수 있으므로 상호작용하는 관측 대상과 관측자를 분리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과학이 설명하는 것은 결국 자연 자체가 아니라 수학의 언어로 구조화된 지식이라는 측면은 세상을 사물이 아닌 사실의 총체로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도 닿아 있다. 이를테면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와 변호사는 사건을 목격하지 않았지만 확보된 증언과 증거를 기반으로 법적 사실과 상황을 논리적 언어로 재구성한다. 원자도 그렇다. 인간 신체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미시 세계의 사실은 장치의 도움을 받아 얻는다. 하지만 원자의 단편적 측면을 합친 정보가 원자의 실체적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언어학자 소쉬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행렬이라는 수학적 ‘기표’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에 대응하는 원자 이미지의 ‘기의’가 명확하지 않다. 구조주의 현대철학자 라캉의 방식으로는 수학적 ‘기표’와 원자 이미지나 의미의 후보들 사이의 고정점 연결이 실패해 결핍과 욕망이 생겨난다. 그래서 양자물리는 지적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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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현대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세계-신체-지각의 얽힘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몸/마음 혹은 물질/정신으로 구분하는 데카르트 방식의 이원론을 넘어서려 했다. 즉, 물질 몸 정신을 분리된 대상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해 지각된 통합적 살덩이로 해석했다. 원자를 만지고, 초음파를 듣고, X선을 보고, 분자 단위의 맛과 냄새를 감지할 수 있는 초감각을 지닐 미래 인류에게 양자적 미시 세계의 경험은 어떤 의미로 해석될까? 닥치고 계산만 하는 일은 이제 AI가 더 잘한다. 다가올 시대는 양자 세계의 경험과 지각을 해석할 새로운 몸의 철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