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23.11.29
수정일
2023.11.29
작성자
유인권
조회수
96

부산일보 '유인권의 핵인싸' 2023년 10월 18일자 "진실의 정체와 힘"


[유인권의 핵인싸] 진실의 정체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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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는가. 이것은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간단치 않은 질문이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진실의 파편들이다. 모든 진실은 관찰로부터 시작하는데, 관찰은 세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것을, 어디에 비추어,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다. 관찰의 대상, 그 대상과 반응하는 빛, 결과적으로 반응한 빛을 보는 관찰자의 눈이 그것이다. 어떤 빛이 관찰 대상과 어떻게 반응하는지, 반응한 결과가 관찰자의 눈과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관찰 결과는 달라진다. 무지개색이 모두 섞여서 투명하게 보이는 햇빛이 사물에 비치면, 사물 표면의 특성에 따라 특정 색만 반사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만, 만약 색맹이라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엑스선을 비추면 관찰 대상의 밀도에 따라 투과 정도가 다르며, 이 반응 결과는 특별한 인화지로만 볼 수 있다.

논쟁에 자유로이 열려 있어야 진실

단편적인 아집에 고립돼선 안 돼

부마항쟁처럼 시대의 공감 얻어야

심지어 이 세상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찰 대상과 반응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빛처럼 이용될 수 있으며, 반응 결과를 알 수 있는 모든 검출기가 눈이 된다. 오히려 눈은 가시광선에만 반응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제한적이며,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작거나 큰 것들은 볼 수가 없다. 파장이 긴 전파를 보기(!) 위한 것이 안테나이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분자와 원자의 미시세계를 보기(!) 위해 가속된 전자를 이용하는 것이 바로 전자현미경이다. 가속기를 이용해 여러 가지 입자를 빠르게 만드는 것도 더 작은 세계를 보기(!) 위해서다. 결국 반응에 따라 우리가 보는 진실은 언제나 다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똑같은 빛에 똑같은 대상을 똑같은 눈으로 보는 것조차도 완전히 똑같지 않다. 모든 반응이라는 것은 항상 확률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관찰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 어떤 범위 내에서 일정한 통계적 분포를 갖는다. 결과적으로 ‘사실’은 일정한 편차 내에서 통계적인 확률로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이것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은 일정한 오차 내에서 확률적인 진술을 한다. 확률이라 함은 결코 단편적으로 재단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렇듯 진실은 자체 발광하여 스스로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자체 발광하는 별조차도 어떤 눈으로 보는지에 따라 그 이미지는 천차만별이다. 이 모든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진실은 결코 편협하지 않으며 모든 논쟁과 공격에도 자유롭게 열려 있다. 긴 시간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진실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고 있으며, 또한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 진실의 일부분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결코 하나의 진실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는 것이 유일한 진실이며, 오직 하나의 단면만이 진실이라고 우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명백한 비진실, 곧 거짓이다.



문제는 스스로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지동설을 깨닫는 것만큼 어마어마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필요한 일이다. 전 세계가 거의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이 글로벌 시대에 개인·사회·국가적으로 극단적인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현상을 한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한 기술의 총화라는 인공지능이 결코 ‘모른다’는 대답을 할 수 없으며, 전혀 사실무근인 거짓말을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잘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즉, 네트워크가 늘어날수록 소통의 기술적 한계가 확장되면서, 진실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한 공유가 넓어져서 보다 더 진실의 실체에 가까워지기를 기대했던 것은 너무 순진한 바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네트워크가 좋아질수록 인간은 더 편협하게 고립되고 있으며, 단편적인 진실 곧 거짓이 진실인양 전파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기의 입맛에 맞는 사실만 선택돼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중심의 천동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4년 전 1979년 10월 16일과 18일, 부산과 마산에서 있었던 일은 수십 년 동안 길들여져 왔던 굴종과 침묵을 깨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인터넷은커녕 전화조차도 원활치 않았던 그 시대에 이 사건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열흘도 지나지 않아 독재자의 종말을 가져왔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의 찬란한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이 사건은 군사독재에 얼룩진 한반도의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진실이었다.

진실의 힘은 사실 이런 것이다. 비록 여러 가지 모습일 것이나, 한 시대의 커다란 공감대로 아직까지도 우리 모두를 움직이는 힘이다. 마음에 드는 단편적인 진실에 고립된 채 양극화와 대결만 부추기는 일은 결국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진실의 적이다. 진실은 객관적으로 동떨어져 존재할 수는 없되 거의 항상 모든 곳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것을 잘 알아보고 귀를 잘 열어 두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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