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國學’, ‘西方漢學’ 그리고 ‘世界中國學’- 제2차 세계중국학대회 참관기
김 혜 준
“漢學與跨文化交流”를 주제로 한 第二屆世界漢學大會에 참석했다. 中國國家漢辦과 中國人民大學 공동 주최인 이 대회의 공식 일정은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였고, 논문 발표는 10월 30일과 31일 이틀이었다. 대회 매뉴얼에 따르면 중국 외 세계 각국의 학자 66명, 타이완、홍콩 및 마카오 지역 학자 18명, 중국 국내 학자 114명이 발표를 하는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였다(자세한 것은 이 대회 홈페이지 http://www.sinology2007.com/sinology2009/를 참고하기 바란다). 첫날인 이 날 오후와 둘째 날 오전은 조별 토론이었다. (1) 漢學與文化對話 (2) 漢學與歷史研究 (3) 漢學與中國文學 (4) 漢學與漢籍傳譯 (5) 漢學與中國戲曲 (6) 孔子學院論壇 등 모두 여섯 조였고, 이와는 별도로 出土文獻與漢學硏究 및 中國文學與當代漢學的互動이란 제목의 좌담회가 둘째날과 셋째 날에 있었다. 각각의 조별 발표장에는 대략 4,50명이 앉을 수 있었다. 발언자 1인당 10분이 주어졌고, 대체로 대여섯 명 발표 후 한꺼번에 몇 분 정도 질의 답변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中國現當代文學作品翻譯和研究在韓國 -- 以2000年代爲主”를 발표했는데, 내가 발표한 (3)조는 이틀에 걸쳐 모두 30명이 발언을 했다. 그 중에는 우리 학계에 잘 알려진 北京大學의 溫儒敏, 香港嶺南大學의 梁秉鈞 등이 있었다. 다른 조에는 하와이대학의 成中英, 華東師大의 朱政惠와 같은 역사학자들이나 프린스턴신학대학의 Dennis Olson, 에든버러대학의 Brian Stanley 같은 신학자들이 눈에 뜨였다. 고려대학교 장동천 교수의 발표는 한중 영화 문화 교류에 관한 것이라서 (1)조에 속해 있었다. 둘째 날 오후에는 다시 전체 발표가 있었고, 형식은 첫날 전체 발표와 동일했다. 역시 모두 세 조의 발표가 있었는데, 나와 溫儒敏 교수가 공동 사회를 본 첫 번째 조에서는 슬로바키아과학원의 Jozef Gálik 교수와 北京大學의 嚴紹璗 교수가 발표를 했다. 전체 발표가 끝난 후 개막식과 비슷한 규모의 성대한 폐막식이 있었고, 이 때 러시아사회과학원의 Alexander V. Lomanov가 최근 출간된 중러사전 제4,5권을 증정했다. 만일 중점이 발표와 토론에 있지 않다면 이 대회의 목표 내지 효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세계적으로 중국학을 활성화하고 중국학 학자들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중국학이라는 중심 주제가 있긴 해도 참석자들의 학문 분야가 대단히 방대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무언가를 심도 있게 집중적으로 토론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는 일부 외국학자들의 경우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거나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면에 중국학자들 중에는 영어나 기타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정부 기구와 학술 기구의 주도 하에 세계의 관련 학자와 전문가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것이 역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참석자들 간의 교류는 사실 회의 때보다는 식사 시간이나 문화 참관 시에 더욱 활발했다. 아무래도 심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모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처음 보는 사람이 많다보니 명함 교환은 필수였고, 화제는 전문적인 것보다 어디서 왔느냐 무얼 연구하느냐 따위의 피상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주로 중국어가 시끌시끌했지만 영어도 만만찮았고 간간히 프랑스어나 독일어도 들렸다. 그 와중에 나는 종교학을 연구한다는 재미 한국인 학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해석학 전공이면서 최근 종교학 연구를 병행하고 있는데, 중국어도 못하고 연구 분야 역시 중국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만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특이한 점을 깨닫게 되었다.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계통의 학자와 활동가가 유난히 많은 것이었다. 혹시 대회 주관자의 개인적인 관심이나 친분 때문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대회가 마칠 무렵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며칠 간 내가 직접 들은 발표와 나눈 대화 및 읽은 자료의 내용에 따르면 초점은 두 가지로 여겨졌다. 한 가지는, 중국학자의 주도하에 중국학자에 의한 중국학인 ‘國學’와 외국 학자에 의한 중국학인 ‘漢學’를 ‘(世界)中國學’라는 이름으로 통합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서 구미중심주의적인 중국학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처럼 중국학을 시발로 하여 여타 분야에서도 중국 학술계의 지위를 구미 학술계와 대등한 정도로 제고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중국 대내외적으로 공자 및 유가에 대한 관심을 더욱 확산시키고, 유가의 종교적 성향을 검토해보면서 근대 시기에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듯이 앞으로 구미를 포함해서 전 세계에 유가의 전파 가능성을 탐색해보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미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중국의 국력에 상응하여, 경제、정치、군사 분야 외에 문화、사상 영역에서도 그 마땅한 역할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말이 좀 추상적이고 모호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약간의 추가적 설명과 사례가 유용할지 모르겠다. 사실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은 약간의 우연이었다. 8월 초순경 참석 요청을 받았는데 보통의 경우였다면 아마도 거절했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한데다가 대회의 배경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오랫동안 매년 지속해오던 조사 작업을 이번을 마지막으로 막 끝낸 참이었고, 나의 작업이 공교롭게도 요청 내용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참석 통보 후 여러 차례 행정적 이메일이 오갔지만 대회 직전까지도 상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출장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대회 규모를 비롯해 약간의 사항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내게는 과거에 참석했던 중국의 통상적인 학술대회와는 달리 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참석하고 또 구미 학자들이 상당히 많은 데 반해 동아시아의 학자(특히 한국과 일본의 참석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 다소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 때 문득 나는 2004년 9월 한 국제학술대회 참석 후 역시 각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공자 탄신을 기념하는 山東省 曲阜의 “國際孔子文化節”에 초청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중 중국 국영 티비로 중계된 개막 전야제 프로그램의 대체적인 내용은 대충 이랬다. 1부는 공자 탄생을 맞아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 각지의 소수민족이 찾아와서 춤과 노래로 축하를 한다. 2부는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사람이 찾아와서 역시 춤과 노래로 축하를 한다. 3부는 문인들이 아니라 무사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도열한 상태에서 드디어 공자가 등장한다. 아기 예수와 동방박사 이야기와는 달리, 가마인지 수레인지를 탄 공자는 갓난아이가 아니라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고, 비록 용 문양은 없지만 황금색 옷과 황금색 관을 쓰고 있으며, 마지막 순간 온 하늘에는 황금색 반짝이가 휘날린다. 귀국하는 날, 그 이틀 전 대량의 첫눈이 내린 때문인지 아니면 올림픽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때문인지, 베이징은 모든 것이 쾌청하고 깔끔했다. 하늘도, 공기도, 거리도. 베이징공항 역시 그랬다. 공항 대합실에서 밖을 내다보니 청사 밖 활주로 근처에 관제탑을 새로 세우고 있었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그런지 엄청나게 크고 간결하면서도 힘 있어 보이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마치 한 일자 ‘一’을 붓으로 멋들어지게 써서 세로로 세워놓은 듯했다. 세계의 중심 나라라는 뜻의 중국과 숫자 ‘1’ 또는 한자 ‘一’의 모습을 가진 베이징공항의 관제탑을 겹쳐 보는 것은 아마도 순전히 나 혼자만의 우연한 상상이었을 것이다.
김혜준, 〈‘中國國學’, ‘西方漢學’ 그리고 ‘世界中國學’- 제2차 세계중국학대회 참관기〉, 《중국현대문학》 제51집, 서울 : 중국현대문학학회, 2009년 12월, pp.309-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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