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속의외침
저자 : 위화 역자 : 최용만 출판사 : 푸른숲(도)
고단한 밑바닥 인생들 능청스런 웃음과 해학 | 한겨레신문 | 2004년01월02일
중국 작가 위화(44)의 장편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푸른숲)이 번역, 출간됐다. 먼저 소개된 〈살아간다는 것〉이나 〈허삼관 매혈기〉 같은 작품들로 국내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은 작가의 첫번째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손광림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가랑비 속의 외침〉은 앞선 소설들처럼 고단한 밑바닥 인생들을 해학적으로 그렸는데, 여기에는 문화대혁명을 비롯해 굴곡 많은 중국 현대사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화자인 손광림의 회상은 먼저 양부 왕립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5년 동안의 입양생활이 끝난 열두 살 무렵에서 갈피를 잡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공교롭게 큰불이 난 까닭에, 가족들에게 구박덩이가 된 ‘나’는 자폐적인 소년으로 자란다. 큰 대(大)와 작을 소(小) 두 글자를 써놓은 ‘나’의 국어공책은 아버지와 형제들의 틈바구니에서 보낸 거친 유년시절의 기억을 대표한다. 하지만 화자는 아버지나 형이 때릴 때마다 빠짐없이 기록한 그 공책을 떠올리면서도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억이란 속세의 은혜와 원한을 뛰어넘어 저 홀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생’, ‘우정’, ‘소멸’, ‘버림받음’ 등 16개의 소주제로 이뤄진 소설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이런 서술방식은 책갈피를 이리저리 들춰보는 동작을 연상시키는데, 실제 파편적 형태 또는 잔상으로만 남게 마련인 기억의 양상과 꼭 들어맞는다. 그 속에 색욕을 주체 못하는 파렴치한 아버지 손광재,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형 광평과 저수지에서 익사한 뒤 ‘영웅’이 될 뻔한 동생 광명, ‘나’와 수줍은 우정을 나누는 소우, 병약한 양모 이수영과 그를 돌보는 왕립강 등에 얽힌 ‘만화경’ 같은 일화들이 펼쳐진다.
위화는 소설이 그린 인물군상들을 통해 야만적인 전근대와 폭력적인 근현대를 모두 비웃고, 비판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며 침상에 누워지내는 할아버지 손원제나 똥물에 빠져 죽는 손광재가 전근대를 대표한다면,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다가 사회적 제재를 받고 파멸에 이르는 왕립강, 소우, 풍옥청 등은 ‘사회 혁명’의 피해자들에 해당한다. 소설은 이렇게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죽음과 파국에 이르는 비극적 과정을 담았지만, 재치있고 능청스런 문장은 장면 곳곳에서 웃음을 이끌어낸다. 동양 전통의 서사물인 민담양식, 중남미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 등을 아우른 듯한 서술방식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임주환 기자
中 민초들의 욕망 우정 사랑 | 동아일보 | 2003년12월26일
위화의 소설을 읽노라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언젠가 ‘월드 뉴스’에서 소개한, 중국에 큰물이 났을 때의 장면이다. 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둑이 터지기 일보 직전, 그 둑이 터진다면 물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경작지들은 모두 물에 잠겨버릴 태세였다. 그때 중국인들의 대처법이 기가 막혔다. 진흙탕 물처럼 누런 인민복을 입은 군인들과 농부들이 얽혀 서로 어깨를 끼고 사슬을 얽어 소위 ‘인간 제방’을 만든 것이다.
등을 미는 무서운 물의 기세에 몇은 견디지 못하고 고꾸라져 떠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면 또다시 몇이 기묘한 동양식 요들송 같은 중국말을 요란스럽게 지껄이면서 몰려들어 끊어진 사슬을 잇고 또 잇고 하는 것이었다. 그 미욱스럽고도 끈덕진 모습이 하도 어이없어, 내 머릿속에 그 장면은 ‘중국’을 표상하는 또 다른 이미지로 자리 잡고 말았다.
‘살아간다는 것’ ‘허삼관 매혈기’에 이어 한국에 소개되는 위화의 장편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이처럼 거대한 땅 위에 잡풀처럼 돋아났다 스러지는 수많은 인민들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생생히 전달된다. 탐욕과 우둔과 비겁과 분노가 젊은 작가 위화의 달빛을 타고 흐르는 듯한 서정적인 문장에 실려 표현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늦게 소개되는 이 작품은 기실 출세작 ‘살아간다는 것’에 앞서 발표된 위화의 첫 장편소설이다. 그의 재능이 아직 거친 돌 속에 갇힌 보석 같았던 때에 쓰인 처녀작인지라 그만큼의 장점과 단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형식에서 일면 거칠지만 그 내용의 보배로움은 숨길 수 없이 빛난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주인공 손광림을 중심으로 한 그의 가족사를 그리고 있다. 내용에서는 ‘살아간다는 것’의 주인공 복귀나 ‘허삼관 매혈기’의 허삼관이 살아간 신산한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소 자폐적이고 섬세한 주인공 손광림의 눈에 비친 세상은 가혹하다. 끔찍하게 저질스럽고 비열한 아버지 손광재와 난폭한 형 손광평, 구차하고 비굴한 구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할아버지 손유원이 마치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끝도 시작도 없는 상상 속의 뱀 우로보로스처럼 엉켜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개성적인 욕망의 인물들 이면에 고통과 굴욕을 삶의 아름다운 징표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섬약한 소년 소우와의 우정과 매혹적인 여성 풍옥청, 죽음에 맞선 할아버지 손유원의 모습은 어리석고 흉포한 악인들까지도 두루두루 감싸 에두르는 대륙풍의 중국식 서정을 일깨운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그리고 위화의 최대 장점, 기가 막힌 상황에서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이 이 짧지 않은 책을 넘겨가는 일을 아쉽고 즐겁게 한다.
2000년 늦봄에서 초여름쯤, 한국을 방문한 위화를 만난 적이 있다. 시인 김정환 선생과 소설가 최인석 선생이 바람을 잡아 새벽의 미사리까지 택시를 달렸다.
위화는 가수 전인권의 음악에 완전히 매혹되었노라고 했다. 그는 통역이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의 눈빛은 끝없이 자기 바깥의 것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는 역시 자기를 알고 자기 안의 것을 끄집어내는 데 천부적인 사람이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사실도. 중국을, 그리고 인생을 알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김별아(소설가)
문화혁명으로 일그러진 민초들의 삶 풍자 | 조선일보 | 2003년12월26일
소설가들은 흔히 인류의 최대 발명품은 지옥이라고 믿는다. 그 성패에 관계없이 혁명처럼 매력적인 테마도 없는 것이라면, 문화혁명은 지난 수십년 동안 중국의 젊은 소설가들에게 일종의 보고(寶庫)였다. 순전히 쓸 거리 때문일텐데, 반듯하게 펴 있는 현대사보다는 문화혁명으로 일그러진 사회주의 중국과 그 인민들의 실상이 소설가 위화(43)에게도 더 매력적인 소설 소재였던 것이다.
위화의 출세작인 장편 ‘허삼관 매혈기’나 ‘살아간다는 것’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 번역된 첫 장편 <가랑비 속의 외침> 또한 문화혁명 이후에 낯설게 마련된 사회제도, 그리고 인간성의 왜곡 같은 것을 신랄한 해학으로 풍자하고 있다. 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영웅’ 칭호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는 나어린 작중 인물 손광림에게 첫번째 피에로였다. 심지어 어린아이의 죽음을 거꾸로 이용해서 어떻게든 권력을 맛보려는 아버지는 당시의 밑바닥 인생들이 가진 세계관의 한계를 희극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성장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장편은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떻게든 작가 자신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당시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농촌과 농민을 기초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형은 끊임없이 도회지의 삶을 부러워하고 좌절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위화의 유년시절에 그 주변을 맴돌던 고단한 삶들이 적실하게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부분적인 인간성의 왜곡과는 별도로 인민의 삶이 가진 완강한 대물림과 경제사회적 조건 같은 것은 혁명 이전과 이후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위화의 관찰기라고 할 수도 있다.
위화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작품은 내 자전적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안에는 내 유년과 소년 시절의 느낌과 이해가 녹아 있다”면서 “물론 이 느낌과 이해는 기억의 방식을 통해 다시 데워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연대기적이거나 단선적인 전개 방식이 아니라 주인공의 부작위적인 기억의 배치에 따라 다양한 시점으로 얽혀 있다.
‘허삼관 매혈기’와 이 작품을 번역한 최용만씨는 “파편적인 기억을 기획적인 의도로 구성하지 않은 것은 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아마도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광일 기자
측천무후
저자 : 샨사 역자 : 이상해 출판사 : 현대문학(주)(단)
女皇 측천무후가 돌아온다 | 신문명 : 조선일보 | 2004년10월08일
이 소설은 당나라 고종(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의 일대기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가장 넓은 땅과 백성을 호령했던 한 여인의 팔십 인생이 격렬한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중국 황실에서 음모와 견제는 일상사였다. 헐뜯어서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임을 당한다. 여황의 지위는 무엇보다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만인지상의 절대군주가 한 발짝만 삐끗해도 황실은 피바람 속에 잠긴다.
젊은 여성 작가인 샨사는 7세기 세계 최대의 봉건국가에서 왕정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꿰뚫고 있다. 제국은 ‘황제’ 그리고 ‘그를 둘러싼 잠재적 역적’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여황은 세상의 정점에 홀로 앉아 있다. 그녀의 앞뒤에는 허공과 무한밖에 없었다. 역모 혐의자들의 충성을 받으면서 여황은 영광과 고독이 하늘 끝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목재상을 하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 밑에서 세 자매 중 가운데로 태어난 조(照)가 열세 살 되던 해, 그녀의 영특함을 눈여겨본 지방 도독 이적 대장군이 황실 조정에 조를 천거한다.
조는 황제의 명에 따라 내명부의 후궁으로 들어가 정5품 재인(才人)의 지위를 얻는다. 이때만 해도 이 어린 소녀가 나중에 스스로 여황의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황제의 총애를 받은 자와 총애를 잃은 자, 총애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혈투는 숙명이다. 궁중에서 상처받은 여자들의 광기는 보이지 않는 번개 칼이 되어 어떤 명장(名將)보다 훌륭하게 정적(情敵)들의 목숨을 벤다.
그곳은 독을 탄 술, 독이 묻은 옷, 치명적인 성분을 뿌린 부채가 발견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곳에서 살아 남은 여인은 살아 남았다는 사실로 이미 비범하다. 황제의 주변은 언제나 관능과 부패가 배회했다. 조는 마흔둘에 딸 태평공주를 낳은 뒤 황제와 일체의 성관계를 끊었다. 오십 고개를 넘긴 조는 열네 살 소 녀를 침실로 끌어들여 육체적 쾌락을 다시 연다. 나중에는 소보(小寶)라는 남자를 정부로 삼는다.
그녀는 과거제도를 창시하고,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진실의 함(函)’을 만들었으며, 모든 법률과 의식을 개혁한 군주였다. 그러나 훗날 그녀는 타락한 여성의 상징으로만 남았다. 정적들로부터 무자비한 방법으로 황권을 빼앗고, 변방에서 반란의 도시들을 피에 잠기게 한 철의 여인이었다.
소설은 문장이다. 앙드레 지드는 ‘나는 나의 문장으로 예민한 하나의 악기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중국계 프랑스 소설가인 샨사는 21세기에 쓰여지는 역사소설 속에 새로운 양식을 구축하고 있다. 문장을 가로지르는 실존의 고통을 현대적으로 체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달들, 불투명한 세계, 으르렁거림, 돌풍, 지진. 휴식의 순간은 드물었다’로 첫 문장이 시작되는 이번 샨사의 소설을 읽으면서 감히 ‘명만고문장’(鳴萬古文章만고에 떨친 문장으로 이름이 남)의 태동을 보는 것 같은 설렘마저 느낄 정도다.
‘산이 숨을 쉬었다. 산이 슬퍼했다. 산이 만족해 했다. 산이 눈 모피를, 화려한 비단옷을, 호화롭고 이상 야릇한 안개 망토를 보란 듯이 과시했다. 황토빛, 노란빛, 검은빛 노을이 지면 하늘이 수직으로 열렸다. 계곡에 어둠이 깔리면 별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풀숲에 누웠다.…’(본문 중)
샨사의 소설은 유장한 호흡과 거침없는 리듬을 타면서도, 주어와 술어 단 두 단어로 섬세하게 저민 문장들을 풀어 놓는다. 우주의 거대한 춤사위에 혼백을 빼앗긴 듯 무한광대로 장엄하다가도 어느새 한낱 여린 여인에 불과한 조의 풋풋한 내면 세계로 깃털 하나를 떨어뜨린다.
특히 황제와 여황의 장례를 묘사하는 대목은 타의 추종을 당분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환상적인 표현과 역사 고증적인 수법이 번갈아 섞인 페이지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영원의 바퀴를 돌아가게 하는 자의 수수께끼 같은 미소’가 궁금한 독자들께 이 소설을 권한다.
김광일 기자
‘파격적 역사풀이’ 문학 새 길을 찾다 | 한겨레신문 | 2004년10월15일
중국계 프랑스 여성 작가 샨사(32)의 소설 두 편이 한꺼번에 번역 출간되었다. 〈측천무후〉(이상해 옮김, 전2권, 현대문학)와 〈천안문〉(성귀수 옮김, 북폴리오)이 그것이다. 샨사는 연전에 국내에 소개된 출세작 〈바둑 두는 여자〉가 소수의 독자 사이에서 열광적인 평판을 얻은 바 있다.
〈천안문〉은 베이징 태생으로 1990년 프랑스로 건너간 샨사가 그로부터 7년 뒤에 프랑스어로 내놓은 첫 소설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봉기를 주도한 여대생 아야메와 그를 쫓는 젊은 인민해방군 장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현대 중국을 뒤흔든 대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그런 큰 이야기는 다만 소설의 배면에 희미한 밑그림으로 깔릴 뿐이다. 대신 부각되는 것은 추적자와 도피자 사이의 기묘한 사랑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장교는 추적 과정에서 아야메의 일기를 읽게 되며 그 결과 일면식도 없는 여대생에게 미묘한 연정을 품기에 이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소설이 끝나도록 사랑은커녕 대면도 하지 못하며,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교의 쌍안경 렌즈를 통해 한번 눈길을 마주칠 뿐이다.
〈천안문〉은 〈바둑 두는 여자〉와 비슷한 설정과 구도를 지녀 이 출세작을 위한 ‘연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둑 두는 여자〉는 일제 지배 하의 만주국을 배경으로 항일 저항운동에 연루된 중국 여학생과 일본군 장교 사이의 바둑을 매개로 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정치적 사건의 와중에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남녀의 사랑을 다룬다거나, 남녀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되는 짧은 장들로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서 두 작품의 유사성은 특히 두드러진다.
샨사의 가장 최근작인 〈측천무후〉는 당나라 초기 평민 출신으로 중국 유일의 여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무조의 일대기를 다룬다. 측천무후는 그 극적인 생애 때문에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으로 자주 각색되는 인물이지만, 샨사는 이 소설에서 그만의 측천무후를 부조해 내고자 한다. 남자를 홀리는 요부에다 가공할 권력욕에 사로잡힌 폭군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던 측천무후를 주체적 여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그 요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이 일인칭 소설에서 그가 “나, 황궁의 포로 빈은 세상 모든 남자들과 대결을 벌일 의지를 갖고 있었다”(1권 205~6쪽)거나 “그(=아들 단)는 공적인 자리에서 아버지의 성 이씨를 버리고 내 성 무를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2권 144쪽)고 말하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국내에 소개된 샨사의 소설들은 역사적 사건에서 소재를 취하되 그것을 지극히 현대적인 방식으로 소화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과감한 압축과 생략으로 속도감 있는 진행을 보장한다거나, 역사소설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시적 표현으로 문학적 밀도를 높이는 점 등은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는 우리 작가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女帝이기 전에 女子였다” | 경향신문 | 2004년10월15일
시안의 측천무후(624~705년) 유적지에 들어서면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아무런 글귀도 새겨지지 않은 측천무후의 묘비. 무사의 딸로 태어나 궁녀와 비구니, 황후, 황제에 오른 여제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구구할 터인데 묘비엔 글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대엔 그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까지 죽이는 냉혈한으로 알려져 있지만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의 소리를 듣는 ‘진실의 함’을 만드는 등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다. 수많은 정쟁에서 승리자로 살아남은 그녀의 일대기는 수많은 드라마, 영화, 소설은 물론 만화로까지 나왔다.
이 책은 흥미위주의 역사이야기에만 치중하지 않고 한 여인의 내면세계를 꼼꼼하고 섬세하게 짚어냈다. 외양은 역사소설이지만 한 여인의 변화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주어와 술어로 이뤄진 군더더기가 붙지 않은 단문은 명쾌하고 아름답다. 작가(32)는 중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어를 배운지 7년 만에 ‘천안문’을 썼고, 2001년 발표한 ‘바둑 두는 여자’는 프랑스 고교생들이 읽고 싶은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 역시 프랑스어로 쓰여졌다.
최병준 기자
세월은 권력보다 강하다 | 중앙일보 | 2004년10월18일
1972년생 중국 여성 소설가 샨사의 문학 이력은 독특하다. 아홉살 때 시집을 냈을 정도로 문학적 가능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은 샨사는 열여덟살에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건너간다. 그는 이주 7년 만인 97년 프랑스어로 첫 장편소설 『천안문』을 출간한다. 신작 『측천무후』는 그의 네번째 장편소설이다.
『측천무후』와 『천안문』이 나란히 이번에 번역출간됐다. 또 2002년에 출간됐다 절판됐던 장편소설 『바둑두는 여자』(현대문학)도 재출간됐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굴로 직접 뛰어든 격인 샨사의 행보는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듯하다. 프랑스어로 작업하는 예쁘장한 외모의 동양 여작가에게 프랑스 독자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작품마다 화제가 됐고, 특히 『측천무후』는 판권을 두고 출판사 간 법정 분쟁까지 벌어졌다.
물론 그런 호응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샨사가 이국의 독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선택한 소재가 중국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대목들인 까닭에 흡인력이 대단하다. 우선 측천무후. 역사서가 전하는 측천무후는 7세기 당 태종의 후궁으로 출발했지만 태종의 아들 고종의 눈에 들어 황후에 오른 뒤 치열한 권력 암투 끝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된 걸출한 여인이다. 그는 나라 이름까지 당(唐)에서 주(周)로 바꿨고, 요승(妖僧) 회의 등과 추문을 남기기도 했다.
소설로 재구성된 측천무후는 잔혹하고 무자비한데다 도착적 성행위까지 즐긴 비정한 성공주의자만은 아니다. 소설 속에 생생히 재현된 궁녀들의 가학.피학적 동성애는 오매불망 한 남자(황제)의 성은만을 기다리는 1만명 궁녀의 처지를 참작하면 이해될 법하다. 육순.칠순에 젊은 남자를 탐했던 측천무후의 노욕도, 젊은 여체를 탐하는 지긋한 남성의 경우가 비일비재한 현실을 떠올리면 간단히 비난할 것만은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지만 태종과 측천무후의 관계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에서 출발해 권력 투쟁에 공동 대응하며 공고해진, 전략적이고 실리적인 것이었다. 사서가 전하는 대로 간계를 동원해 고종의 손발을 묶고 절대 권력을 휘두른 패덕(悖德)의 여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성적 욕망에 충실했고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철저한 실리 계산과 냉혹함으로 권력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측천무후는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말년 측천무후는 정수리에 쪽을 지어 머리가죽을 힘껏 잡아당겨 이마관자놀이의 주름을 없애고 뺨에 네겹의 분을 발라 젊어보이도록 단장한 것으로 묘사된다. 신(神)과 같은 권세를 휘둘렀지만 그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자 여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절대 권력을 둘러싼 궁정의 권모술수는 소재로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당나라 황궁을 들여다보는 흥미가 반감된다. 사건과 에피소드의 나열로 다소 밋밋한 느낌이다.
한편 89년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천안문 사건은 노벨상 수상작가 가오싱젠와 노벨상 후보로 단골 거론되는 시인 베이다오 등 중국 작가들이 익히 다뤄온, 말하자면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천안문』은 사태 당시 학생 운동의 선봉에 섰던 여학생 아야메와 군 장교 자오의 추격전이 기본 줄거리다. 하지만 소설은 충격적이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당국의 무자비한 탄압을 고발하지 않는다. 샨사는 소녀 시절 아야메가 경험한 남자 친구 민의 죽음을 통해 기성 가치관을 주입하는 가족.학교.사회 등 제도 일반을 문제 삼는다.
신준봉 기자
천안문
저자 : 샨사 역자 : 성귀수 출판사 : 북폴리오(대한교과서)
‘파격적 역사풀이’ 문학 새 길을 찾다 | 신문명 : 한겨레신문 | 2004년10월15일
중국계 프랑스 여성 작가 샨사(32)의 소설 두 편이 한꺼번에 번역 출간되었다. 〈측천무후〉(이상해 옮김, 전2권, 현대문학)와 〈천안문〉(성귀수 옮김, 북폴리오)이 그것이다. 샨사는 연전에 국내에 소개된 출세작 〈바둑 두는 여자〉가 소수의 독자 사이에서 열광적인 평판을 얻은 바 있다.
〈천안문〉은 베이징 태생으로 1990년 프랑스로 건너간 샨사가 그로부터 7년 뒤에 프랑스어로 내놓은 첫 소설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봉기를 주도한 여대생 아야메와 그를 쫓는 젊은 인민해방군 장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현대 중국을 뒤흔든 대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그런 큰 이야기는 다만 소설의 배면에 희미한 밑그림으로 깔릴 뿐이다. 대신 부각되는 것은 추적자와 도피자 사이의 기묘한 사랑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장교는 추적 과정에서 아야메의 일기를 읽게 되며 그 결과 일면식도 없는 여대생에게 미묘한 연정을 품기에 이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소설이 끝나도록 사랑은커녕 대면도 하지 못하며,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교의 쌍안경 렌즈를 통해 한번 눈길을 마주칠 뿐이다.
〈천안문〉은 〈바둑 두는 여자〉와 비슷한 설정과 구도를 지녀 이 출세작을 위한 ‘연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둑 두는 여자〉는 일제 지배 하의 만주국을 배경으로 항일 저항운동에 연루된 중국 여학생과 일본군 장교 사이의 바둑을 매개로 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정치적 사건의 와중에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남녀의 사랑을 다룬다거나, 남녀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되는 짧은 장들로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서 두 작품의 유사성은 특히 두드러진다.
샨사의 가장 최근작인 〈측천무후〉는 당나라 초기 평민 출신으로 중국 유일의 여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무조의 일대기를 다룬다. 측천무후는 그 극적인 생애 때문에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으로 자주 각색되는 인물이지만, 샨사는 이 소설에서 그만의 측천무후를 부조해 내고자 한다. 남자를 홀리는 요부에다 가공할 권력욕에 사로잡힌 폭군으로 그려지기 일쑤였던 측천무후를 주체적 여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그 요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이 일인칭 소설에서 그가 “나, 황궁의 포로 빈은 세상 모든 남자들과 대결을 벌일 의지를 갖고 있었다”(1권 205~6쪽)거나 “그(=아들 단)는 공적인 자리에서 아버지의 성 이씨를 버리고 내 성 무를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2권 144쪽)고 말하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국내에 소개된 샨사의 소설들은 역사적 사건에서 소재를 취하되 그것을 지극히 현대적인 방식으로 소화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과감한 압축과 생략으로 속도감 있는 진행을 보장한다거나, 역사소설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시적 표현으로 문학적 밀도를 높이는 점 등은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는 우리 작가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바둑두는여자
저자 : 샨사 역자 : 출판사 : 현대문학(주)(단)
열애의 對局, 격정의 破局으로 | 신문명 : 동아일보 | 2004년10월15일
프랑스에 사는 중국계 작가 샨 사(34)의 장편 3편이 국내에서 연이어 출간됐다. ‘측천무후’(현대문학), ‘바둑 두는 여자’(〃), ‘천안문’(북 폴리오)이 그것이다.
샨 사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연상시키는 측면 때문이다. 러시아 출신인 나보코프가 영어로 ‘롤리타’를 써 냈다면, 중국인 출신인 샨 사는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고 있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자란 그녀는 1990년 프랑스문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파리로 건너갔다. 7년 후 펴낸 첫 소설 ‘천안문’으로, 공쿠르상 심사위원회에서 그해의 처녀작 가운데 최고 작품에 주는 ‘공쿠르 뒤 프르미에 로망 상’을 받았다.
그녀의 문학적 성공은 오래전부터 예견돼 온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홉살 때 첫 시집 ‘얀니의 시(詩)’를 펴내 예술 신동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1988, 1989년 시집 ‘고추잠자리’와 ‘눈’을 잇달아 펴냈으며, ‘눈’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베이징의 별’에 선정돼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파리로 간 후 그녀는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초현실주의 화가 발타자르 클로소프스키 데 롤라(일명 발튀스1908?2001년) 백작의 딸과 사귀게 돼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던 발튀스의 비서가 된다. 그녀는 발튀스 부부를 따라 스위스로 가서 생활하며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는 꿈을 구체화하게 된다.
2001년 ‘바둑 두는 여자’를 펴낸 그라세출판사는 이 소설이 큰 성공을 거두자 샨 사에게 미리 원고료를 지급하며 “현재 구상 중인 작품을 우리 출판사에서 펴내자”고 제의해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샨 사는 이후 다른 구상을 해 ‘측천무후’를 썼고 이를 알뱅 미셸 출판사에서 펴냈다. 그러자 두 출판사는 ‘측천무후’ 판권을 놓고 법정소송으로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샨 사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바둑 두는 여자’로, 프랑스 고교생들에게서 가장 큰 호응을 받은 작품에 주는 ‘공쿠르 데 리세앙’ 상을 받았다.
청나라 귀족 가문의 후손인 한 중국 소녀와 만주국 주둔군으로 건너온 일본군 장교가 바둑꾼들이 모여드는 ‘첸훵 광장’의 한 귀퉁이에서 우연히 만나 대국을 거듭한다. 일본군 장교는 민간인으로 변장한 모습이었고, 중국 여성은 중학생 교복을 입고 있었다.
‘200수가 넘자, 흑돌과 백돌은 포위한 돌이 다시 포위되는, 함정으로 가득한 복잡한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좁은 통로, 미세한 공간을 두고 다툰다.’
대국의 긴장감은 두 사람이 좁다란 인력거를 타게 되자 곧바로 흥분으로 바뀌고 만다. ‘그녀의 차가운 피부가 내 피부 위에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그녀의 목에서 처녀의 향기가, 녹차와 비누 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전란의 시기, 적국의 국민으로 만난 두 사람은 대국을 통해 사랑의 열기를 높여 가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운명을 어쩌지 못한다.
화가이자 서예가이기도 한 샨 사는 미술전과 서예전을 모두 세 차례 파리에서 열었다. 프랑스 잡지 ‘마담 피가로’는 “파리의 유명 인사들이 그녀의 전시회에 모두 몰려들었다”고 소개했다. ‘바둑 두는 여자’에서도 화가로서 그녀의 시각적인 글쓰기 기량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원제 ‘La joeuse de go’(2002년)
권기태 기자
상성(칼은쥐고꽃을품다)
저자 : 셰스쥔 역자 : 김태성,이은주 출판사 : 중앙M & B
토사구팽' 남긴 장사꾼 범려의 일생 | 신문명 : 중앙일보 | 2003년11월28일
시성(詩聖) 두보는 익숙하지만 상성(商聖) 범려는 어쩐지 낯설다. 상인에게 감히 성인이란 칭호를? 하지만 중국인은 오늘도 범려를 성인으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장사꾼이되 눈앞의 이익만 좇는 얄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이 있었다. 그래서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드문 이력서를 남겼다. 정치와 경제 두 분야에서 정상에 올라섰던 것이다.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정경유착? 물론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삶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았기에, 또 어떤 일을 하든 극단 대신 합리.균형이란 중도(中道)의 묘를 추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신문 정치면에 간간이 인용되는 사자성어 '토사구팽(兎死狗烹)'도 범려에서 유래됐다. 중국사에서 극도의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에 세력이 약했던 월나라의 군주 구천을 위기에서 구하고, 또 그를 패국(覇國)의 자리까지 올려놓았던 범려는 삶의 절정기에 구천을 떠난다.
범려는 구천이 '공을 나눌 줄 아닌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 이때 남긴 말이 "날아다니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도 거두어들이며,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도 필요없어져 삶아 먹힌다(飛鳥盡良宮藏, 狡兎死走狗烹)", 즉 토사구팽이다. 범려가 팽(烹)을 면한 것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상성>은 범려의 일생을 소설로 재연했다. 중국인에게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밝힌 범려의 삶을 오롯이 되살렸다. 숱한 영웅과 책사가 자웅을 겨루던 춘추전국시대에 천하 제일의 부를 누리고, 절세가인 서시와 곡절한 사랑도 나누었던 그의 발자취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범려는 월왕 구천이 함께 나라를 다스리자는 제의를 거절하고 초야로 들어갔고, 억만금의 재산을 쌓고도 이를 주변에 흔쾌히 나누어주었다.
장사를 할 때도 1할 이상의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정점에 이르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이치를 실천했던 것이다.
박정호 기자
요재지이
저자 : 포송령 역자 : 김혜경 출판사 : 민음사(주)
팬터지야말로 진짜 리얼리즘 | 신문명 : 세계일보 | 2002년08월16일
팬터지는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하면서도 종종 어떠한 리얼리즘 문학보다 더 적나라하게 현실을 반영한다. 최근 민음사에서 완역-출간된 <요재지이>(포송령 지음.김혜경 옮김)는 그러한 팬터지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의 이 책은 온갖 귀신과 여우, 사물의 정령들이 출현하여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생생하게 비참했던 당대의 현실을 담고 있다. 환상과 신비가 가득한 500여편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포송령은 명말 청초 격변기의 사회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과거시험장의 폐단이 저승에까지 미친다고 풍자한 "석방평"이나 부패하고 혼란한 당대 현실을 그린 "속황량" 등 중국 전역을 떠돌며 민초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들은 지은이의 울분과 고독이 <요재지이>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이러한 지은이의 현실고발적 작가의식과 함께 사회적 통념을 벗어난 파격적인 상상력,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탁월한 통찰력 등이 서정적이면서 힘이 실린 문체를 통해 감동적으로 전달된다. 무엇보다 다른 중국 팔대기서와 다른 <요재지이>의 매력은 환상속 인물의 현란한 모험담에서 갑자기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처연함에 있다.
송민섭 기자
마술적 환상 여전히 현실 | 한겨레신문 | 2002년08월16일
1980년대 이후 중국 대륙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중국문화의 영향은 중국에서 "한류" 못지않게 증대되고 있다. 연구자도 늘어났고 책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열풍 속에서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오늘의 중국문화를 가능케 한 원천, 고전에 대한 착실한 번역이다. 최근 소설쪽에서는 김장환 교수의 <태평광기(太平廣記)> 번역이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는데 이번에 거둔 김혜경 교수의 <요재지이(聊齋志異)> 완역 역시 신선한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재지이>는 청의 문인 포송령(蒲松齡,1630-1715)이 지은 단편소설집으로 중국문학에서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책이다. 중국소설에는 두 가지 계통이 있다. 한가지는 구어체로 쓴 백화소설(白話小說)인데 <삼국연의>, <수호전> 등이 이에 속한다. 또 한 가지는 문어체로 쓴 문언소설(文言小說)인데 <요재지이>는 <태평광기>와 더불어 이 계통의 대표적 소설이다. 중국소설은 강한 환상성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육조 시대의 지괴소설은 귀신,요괴,신선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는데 이 전통이 당의 전기(傳奇) 소설을 거쳐 <태평광기>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가 <요재지이>에 와서야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요재지이>의 내용 역시 신비하고 괴상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요재지이>에는 특히 여우의 변신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그 여우들은 모두 인간의 개성을 지녔다. 여우에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재지이>의 환상은 환상 그 자체의 신기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임과 동시에 심각한 현실이기도 하다. 포송령 생존 당시에도 많은 환상소설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재지이>가 나오자 곧 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요재지이>의 환상성 이면에 감추어진 현실성이 독자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요재지이>가 후세의 문화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그것은 청 시대에 수많은 모방작을 낳게 하였고 환상소설의 붐을 일으켰다. <요재지이>의 영향은 현대에 와서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것은 영화,팬터지,무협소설 등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홍콩 영화의 서극 감독은 작품 창작의 중요한 영감을 <요재지이>에서 얻고 있음을 고백한 적도 있다. 아울러 <요재지이>의 환상과 현실을 교차시키는 절묘한 기법과 간결하면서도 생동적인 문체는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케 한다. 중국의 현대 작가들은 <요재지이>를 통해 새로운 소설 스타일을 실험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요재지이>는 실로 대단한 책이다. 내용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분량도 엄청나다. 번역을 경시하는 우리의 풍토에서 고전 대작의 완역이란 학자로서 큰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다. 필자가 알기로 김혜경 교수는 이 책의 완역을 위해 10년이란 세월을 바쳤다. 역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정재서(이화여대 교수)
중국이 자랑하는 奇談의 보물창고 / 중앙일보 | 2002년08월09일
상상력은 창조력의 기반이며 모든 문화활동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우리 문학에서 상상력은 진작부터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전제로 불구(不具)라 할 만큼 편협하게 정의되고 적용되었다.
고지식한 사실주의가 다시 어정쩡한 근대문학론의 계몽성과 결합하여 환상이나 기상(奇想), 우의(寓意)를 폄하하고 무시한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근년 "해리 포터"가 전 세계를 휩쓸고, 고전의 품위를 획득한 "반지의 제왕"이 뒤늦게 우리 독서계를 압도해오자 이번에는 엉뚱하게 우리 문학 또는 작가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나무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환상소설의 전통이 빈약함을 한탄했다.
하지만 우리 전통에 대한 한탄만은 아무래도 지나친 듯 싶다. "금오신화"나 몽자류(夢字流) 한문소설들뿐만 아니라, 우리 국문소설에서도 오늘날의 환상소설에 해당되는 전통의 축적은 결코 빈약하지 않다.
거기다가 그들의 전범이 되는 중국의 지괴(志怪)나 지이(志異)에 이르면 오히려 우리의 전통 축적은 그 어느 나라보다 풍부한 편이다.
이번에 완역된 "요재지이(聊齋志異)"는 비록 이 땅의 저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풍부한 그 방면의 전통을 증명해주는 책이다.
<요재지이>에는 청나라 초기의 문인인 포송령(蒲松齡)이 20대부터 70대까지 수십 년에 걸쳐 수집한 5백 편 가까운 민간설화가 그의 유려한 문장으로 엮어져 있다.
내용은 흔히 괴기(怪奇), 염정(艶情), 해학(諧謔)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실은 환상과 기상(奇想)으로 저자가 살았던 시대를 특이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편이 옳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대(明代) 4대 기서(奇書)에다 "유림외사(儒林外史)" "금고기관(今古奇觀)" "홍루몽(紅樓夢)", 그리고 이 "요재지이"를 더하여 중국의 8대 기서라고 한다.
그런데 그 8대기서는 끝내 자신의 시절을 만나지 못한 독서인(不遇書生)들에게 힘입은 바 컸다. 그 중에서도 요재지이의 저자인 포송령의 삶은 더듬어보기에도 처연할 정도이다.
포송령은 과거(科擧)에 실패하여 장사꾼이 된 독서인의 아들로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었다.
열 아홉 살 때 치른 동자시(童子試)에서는 세 번이나 수석을 하였으나, 정작 과거의 관문이 되는 향시(鄕試)에서는 번번이 실패하여, 서른을 넘기고 나서는 훈장노릇으로 연명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떤 세도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30년이나 머물렀다가, 나이 일흔에야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수재(秀才)로 추천되었으니 그 불우함을 알 만하다.
하지만 포송령의 그같은 불우함이야말로 <요재지이>를 쉬 없어지지 않을 명저(名著)로 만든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 아침 차 한 동이와 담배 한 포를 마련하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큰길가로 나가 삿자리를 깔고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을 잡고 차와 담배를 권하며 이야기를 들은 뒤 집에 돌아와서는 그것들을 이야기로 꾸며 모았다.
한가한 낙방거사가 아니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재지이>가 받는 호평 중에는 당대의 삶이 정확하고도 진실되게 녹아있다는 것이 있는데, 이 또한 일평생을 남의 서사(書士)로서 고단하게 살았던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요재지이>는 "신기하지만 허황되지는 않은" 온갖 일들과 인간의 삶이 맞닥뜨리는 모든 국면을 절실하면서도 진진한 얘기로 엮어 저장한 방대한 창고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한편 한편 읽어나가면 책을 놓을 수 없는 재미뿐만 아니라, 단순한 교훈성을 넘어서는 문화적 실용까지 느끼게 한다.
홍콩 영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요재지이>를 활용하여 한 장르를 개척하고 있으며, "천녀유혼"처럼 특이한 문화상품을 세계시장에 공급하기도 했다.
이문열(소설가)
환상으로 이끄는 중국식 판타지 / 한국일보 | 2002년08월11일
귀신과의 사랑을 그린 왕주셴(王祖賢) 장궈룽(張國榮) 주연의 "천녀유혼"(天女幽魂)이나 중국 무술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들으며 1975년 칸 영화제 고등기술대상을 수상한 "협녀"(俠女)는 신비로우면서도 환상적인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로 유명하다.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이 두 영화의 줄거리를 제공한 책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의 중국 4대 기서에 더해 유림외사(儒林外事) 홍루몽(紅樓夢) 금고기관(今古奇觀)과 더불어 8대 기서로 꼽히는 요재지이가 우리 글로 완역돼 나왔다. 중국 청대의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이 쓰고 한밭대 어문학부 김혜경(40) 교수가 옮긴 이 책에는 중국 명, 청대의 설화 민담 일화 등을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 497편이 수록돼 있다. 구어인 백화(白話)가 아니라 전통 문어인 고문으로 씌어졌다. 요재는 포송령의 서재 이름으로 제목을 풀이하면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 쯤 된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소재는 당대의 사회상 및 가정생활, 남녀간의 애정, 천상의 세계, 자연 재해 등 매우 다양하다. 이야기마다 10쪽 내외의 짧은 분량인데 귀신도 나오고 여우도 나온다.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중국 색채가 짙은 동양적 판타지라 할까.
한 선비가 여인을 희롱하다 여인의 시녀가 던진 흙이 눈에 들어가 실명하지만, 눈동자 속에 살고 있는 난쟁이 때문에 한쪽 눈이라도 뜨게 된다는 동인어(瞳人語)나, 어여쁜 소녀로 둔갑한 귀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으나 도사의 도움으로 귀신을 죽이고 다시 살아나는 화피(畵皮), 사람의 내장과 얼굴을 바꿔치기하는 육판(陸判), 여우의 딸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영녕(?寧) 등등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씨(顔氏) 황영(黃英) 교나(嬌娜) 청봉(靑鳳) 등의 이야기에서는 여성을 멸시하던 당대의 통념과 달리 고귀한 품성을 지닌 재능있는 여성이 등장하며 애정 표현도 과감하다. 부자 고부 부부 형제 등의 갈등을 통해 봉건 윤리관념이 동요하고 있는 사실은 이상(二商) 증우우(曾友于) 호사낭(胡四娘) 등에서 읽을 수 있다.
소추(素秋) 편에 나오는 한 서생이 “예절이란 것은 사람의 감정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정이 이토록 두터울진대 서로 다른 종족이라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예절로써 감정을 절제한다는 전통 관념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포송령은 명이 망하기 직전에 태어나 청 초기 병란과 재난이 잇따르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기에는 봉건체제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사회사상이 출현했었다. 포송령도 당대의 사대부처럼 현실을 변화시키리라는 욕망이 있었지만 부패가 만연하던 청대의 과거제도 하에서 꿈을 펼칠 수 없었다. 권세가에 아부하는 짓 따위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요재지이의 창작에 몰두한다. 그는 스스로 요재지이를 "고독한 울분의 책"이라는 뜻의 "고분지서"(孤憤之書)라 불렀는데 그의 고독과 울분은 현실에서 생겨나 그 현실을 다시 겨냥하고 있었다. 물론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만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젊어서부터 기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였다.
어쨌든 현실에 대한 그의 불만과 울분은 책의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 산둥 사람 장옹지(張翁之)의 처가 북병(北兵)에 납치돼 행방불명된다는 내용의 장성(張誠)이 대표적. 귀예(鬼隸) 한방(韓方) 난리(亂離) 등의 이야기도 비슷한 내용이다. 명과 청이 교체되던 시기에 산둥 지방에서 살았던 포송령은 청의 군사가 노략질로 주민들에게 막대한 재난을 입혔던 사실을 이들 이야기를 통해 암시한다. 궁중에서 귀뚜라미 놀이나 즐기는 바람에 향리의 서민들은 고통을 받는다는 촉직(促織), 과거시험장의 폐단이 저승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신랄하게 파헤친 석방평(席方平), 고급 관료의 악덕을 그린 속황량(續黃梁) 등을 통해서는 부패하고 혼란스런 현실을 고발한다.
요재지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등의 언어로 번역됐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몇 차례 번역된 적이 있지만, 일부만 발췌하거나 원본을 판본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고 출판사측은 밝혔다. 마오쩌둥(毛澤東)과 헤르만 헤세도 이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박광희 기자
중국어판 아라비안 나이트 <요재지이> / 문화일보 | 2002년08월09일
“새로운 소식을 들으면 언제나 여우, 귀신을 기록하는 책에 포함시켰고, 말술로도 가슴속을 돌덩이처럼 누르는 우수를 없애긴 어려웠다.”
어린시절부터 촉망받는 수재였던 포송령(蒲松齡)은 향시(鄕試)에 거듭 실패했고 일평생 관직을 갖지 못했다. 서른 한살이 되어서도 살길이 막막했던 그는 고향을 떠나 장강과 회수 유역을 떠돌았다고 한다. 위 귀절은 그 암울한 시절을 기록한 문장이다.
명나라 말 산둥지방에서 태어나 청나라 초기의 전쟁과 혼란을 경험한 포송령은 막객 생활을 하면서 관리들의 부패상과 백성들의 곤궁함을 목격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는지,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인지, 혹은 불만스러운 현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시도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그는 70평생을 기이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각색해 <요재지이(?齋志異)>를 완성하는 데 바쳤다.
489편의 이야기를 수록한 <요재지이>는 전통적인 문어체인 고문으로 쓰인 문언단편 소설 중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만큼 <요재지이>의 이야기들은 중국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응용되고 재생된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중국영화 "천녀유혼" "협녀" 등이 대표적인 예다.
<요재지이?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석이 많다. 이는 그간 어린이용 동화, 요약본, 만화로 조금씩 소개돼왔기 때문.
1960년대 을유문화사에서 일본어 중역을 거친 완역본이 나왔었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 중국어 완역본이 출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간과 아름다운 여우, 절세의 가인인 귀신과의 삼각관계, 산속에서 술을 마시며 공부한 시험문제들이 과거 시험에 모두 출제된 연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구도 등이 이채롭다.
과거시험, 여우, 귀신, 둔갑, 두꺼비 등 산속의 신성한 동물들, 호젓한 곳에서 벌어지는 술잔치등이 단골 소재. 권선징악에 대한 강박 없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지만 뜻밖의 행운으로 부자가 된 이야기(왕성), 재채기를 하자 이상한 동물이 나와 몸에 붙어 쥐 모양의 혹이 된 이야기(양언) 등 황당(?)한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귀신이나 여우의 둔갑은 쉽게 믿지만 점쟁이의 말은 믿을 수 없다(요술)는 "분열된" 세계관도 흥미롭다. "노공녀", "안기도" 등에서는 조선과 관련된 기이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봉건적 사상에 도전하는 작품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고귀한 품성과 재능을 지닌 여성상을 그리는가 하면, 등장인물의 과감한 애정 표현도 거리낌이 없다. 관료의 부정함이나 과거 제도에 대한 불만도 엿볼 수 있다.
포송령은 곳곳에 귀신이나 요괴보다 “인간들이 특히 더 무섭다”는 점을 강조한다. 삶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전영선 기자
300년전 중국의 기괴한 이야기 500편 / 경향신문 | 2002년08월09일
중국에는 8대기서(八大奇書)가 전해진다. 명대에 출간된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와, 청대의 "요재지의" "유림외사" "홍루몽" "금고기관" 등이 그런 책들이다. 이 중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약 500편에 달하는 이야기가 실린 유일한 단편소설집으로 동양고전문학의 보배로 평가된다.
요재는 저자인 포송령(1640-1715)의 서재 이름으로 책 제목은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책 속에는 귀신이 사람과 사랑에 빠져 자식을 낳고, 꼬리 달린 여우가 여염집 부인네를 넘보다가 지혜로운 아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등 이상하고 신비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중국판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할까.
"황생이 하청궁에 도착했더니 백모란 한 송이가 꽃봉오리를 머금은 채 아직 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왔다갔다하는 사이 꽃이 흔들리며 벌어지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쟁반만한 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런데 꽃술 안에는 손가락 서넛만 한 크기의 꼬마 미인이 앉아 있었다".(1권 "향옥" 중에서)
"홍옥"의 삽화
"그날은 밤이 깊어서야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소매 안을 더듬어 가지고 온 금귤을 꺼내는 한편 침상맡으로 다가가 종상약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항아리 입구에서 별안간 "쐐애액" 바람 소리가 일더니 순식간에 여자를 안으로 빨아들였다.하인은 벌떡 일어나 항아리에 뚜껑을 덮고 부적은 붙이는 한편 곧바로 가마솥에 삶을 채비를 차렸다".(3권 "하화 삼낭자" 중에서)
"사랑 찾아 날아간 혼" "여우 부인, 귀신 부인" "호랑이가 된 사내" 등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각 이야기에서는 귀신과 여우, 사물의 정령들이 등장해 동양적인 판타지의 세계를 화려하게 펼친다. 그래서 현대의 중국과 홍콩의 영화나 소설, 회화 등 여러 예술 장르는 끊임없이 이 책의 소재를 차용하고 있다. 장국영 주연의 영화 "천녀유혼"은 1권의 "섭소천"을 원본으로 삼았고,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킹 후 감독의 "협녀"도 이 책에 실려있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쓴 이 책은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내용도 다양하다. 격변기의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해학적으로 묘사한 글이 있는가 하면, 지고지순한 사랑과 환상적인 에로티시즘도 담겨 있는 것. 궁중에서 귀뚜라미 놀이를 즐겨 시골의 서민들이 받는 고통을 그린 "촉직", 과거 시험장의 폐단이 저승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신랄하게 파헤친 "석방평" 등의 작품은 전자의 경우에 속한다. 150편에 이르는 애정소설의 경우 여성을 멸시하던 당대의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고귀한 품성과 재능을 지닌 여성상을 그렸다는 점이 특징.
포송룡은 당시의 사대부들처럼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해 현실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부패가 만연하던 당시의 과거 제도아래선 꿈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아부 대신 신기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즉시 기록해두곤 <요재지이>의 창작에 몰두했다. 1679년 처음으로 책의 면모를 갖추고 자서를 미리 써놓기도 했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보충했다.
책은 작가 사후 50여년 지나서야 완성돼 나왔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국내에서 약 40년 만에 다시 출간되는 완역본. 중문학자 김혜경씨는 약 10년에 걸친 번역과 퇴고 과정을 거쳐 독자들이 작품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두툼한 분량이 별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 미덕. 중국의 역사를 풍속사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어 단순히 읽을 거리를 넘어서는 책이다.
고미석 기자
탄샹싱
저자 : 모옌 역자 : 박명애 출판사 : 중앙M & B
외세 침략 淸朝末…애달픈 한 가족 이야기 | 신문명 : 조선일보 | 2003년10월31일
모옌(莫言, 48)은 중편소설 ‘붉은 수수밭’(1986)으로 유명하다. 이를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이번 장편소설은 100년 전 중국 산둥(山東)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당시 서방 연합군의 침략으로 서서히 기울어가던 청조, 중국인 특유의 사랑 방식과 가족관계, 역사의 소용돌이에 꺾이고 마는 혁명의 열정과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형벌들, 그리고 한국 독자를 충분히 사로잡을 여러 가지 중국 사회상에 대한 묘사들이 소설 전체를 압도하듯 짜여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랑극단 단장 겸 배우인 쑨빙(孫丙), 쑨빙의 딸 쑨메이냥(孫眉娘), 과거에 급제한 현령 첸딩(錢丁), 그리고 쑨빙과는 사돈이자 쑨메이냥의 시아버지인 자오자(趙甲) 등이다. 산둥성에 철로를 놓던 독일인들이 시장통에서 자신의 아내를 희롱하는 장면에 격분한 쑨빙은 이들을 몽둥이로 패죽인다. 이후 마을 전체에 대한 독일인의 보복이 시작되고 쑨빙은 의화단에 들어가 의병을 일으킨다.
아버지를 따라 연극배우를 하던 쑨메이냥은 절세의 미모인데, 개고기집을 하는 백정의 아내가 돼 있다. 쑨메이냥은 첸딩을 수양아버지로 삼고 있었으나 그의 기개에 반한 나머지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는 불륜의 사랑을 하게 된다. 첸딩은 물산이 풍부한 고장을 잘 다스리는 한편 독일인의 침탈에 어떻게 하면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지 고심하는 양심적 관리다. 첸딩은 쑨빙의 민족정신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그를 체포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자오자다. 그는 수십년 동안 베이징에서 수백명의 목을 친 망나니였다. 그의 처형 실력을 높이 산 산둥성 성주와 독일 총독은 그에게 쑨빙을 처형하도록 지시한다. 자오자는 쑨메이냥의 친정아버지인 쑨빙에게 사돈으로서 최대한 예우를 갖춰 형을 집행하려 한다.
바로 소설 제목인 ‘탄샹싱’이 그것이다. ‘참기름에 잘 삶은 매끄러운 박달나무 꼬챙이를 항문으로부터 박아넣어 내장을 상하지 않게 관통시켜 목뒤로 빼낸 다음, 다시 십자가에 매달아 놓아 적어도 5일 동안 숨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형벌이다. 역사상 가장 엽기적이며 참혹한 이 형벌은 당시 중국 사회의 복합적인 균열과 갈등 그리고 외환과 비참을 상징하고 있다. 결국 쑨메이냥은 친정아버지를 처형한 시아버지 자오자를 찔러 죽이게 되는데….
김광일 기자
참혹한 형벌 묘사엔 狂氣 마저 / 중앙일보 | 2003년10월31일
중국 작가 모옌(莫言.48)은 1986년 발표한 중편소설 '붉은 수수밭'이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며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졌다. 올해 초에는 장편 '술의 나라'(책세상)가 번역 소개됐다.
중국 문단에서 모옌의 작가적 입지는 상당하다. 중국 최대 작가로 떠오르고 있고, 이번에 출간된 장편소설 '탄샹싱'은 인민일보가 '21세기 으뜸가는 위대한 중국 소설'로 극찬했다.
소설의 재미와 무게, 진지함은 그런 평가에 충분히 값할 만하다.
<탄샹싱(檀香刑)>이라는 발음하기 힘든 제목부터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탄샹싱은 참기름을 넉넉하게 채운 가마솥에 넣고 푹 삶은 박달나무를 쐐기모양으로 깎아 사형수의 항문에 박아넣어 목덜미로 튀어나오게 한 뒤 절명할 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놓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사형방법이다.
죄인에 따라 나무에 매달린 후 사나흘까지 숨지지 않기 때문에 사형 집행자 입장에서는 생사를 넘나드는 사형수의 고통을 잔인하게 연장하며 악마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는 엽기적인 장점(?)이 있다.
박달나무 쐐기에 참기름을 먹이는 이유는 사형수의 몸통을 유연하게 통과하게 하고 혹 쐐기가 내장을 관통해도 피를 빨아들이지 않도록 해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서다. 쐐기가 꽂힌 채 나무에 매달린 사형수의 원기 보충을 위해 인삼탕도 먹인다.
소설에서 탄샹싱은 유랑극단의 단장겸 배우 쑨빙에게 행해진다. 시.공간적 배경은 1900년을 전후한 산둥성 가오미 현. 쑨빙의 딸 쑨메이냥은 색정적인 외모와 산둥성 최고의 개고기 삶는 솜씨로 운영하는 주점이 인기다.
하지만 지능이 떨어져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할 수 없는 백정 남편 자오샤오자에게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한다. 마침 새 현령으로 부임한 헌헌장부 첸딩에게 '필'이 꽂히고, 두 사람은 쉽게 관능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비극은 쑨메이냥에게 계모가 되는 쑨빙의 젊은 부인과 늦둥이 쌍둥이가 한창 제국주의적 야욕을 불태우던 독일군에게 무참히 살해되면서 시작된다. 눈이 뒤집힌 쑨빙은 주민들을 조직해 독일군에 대항하지만 끝내 붙잡힌다.
위안스카이와 첸딩 등 청나라의 관리들은 독일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쑨빙을 처형할 방법을 찾던 끝에 40년간 베이징에서 최고의 망나니로 악명을 떨치다 은퇴하고 귀향한 자오자를 불러들인다.
자오샤오자의 아버지인 자오자는 처형 경험이 없던 자오샤오자를 조수 삼아 탄샹싱을 집행한다. 쑨빙은 사돈과 사위에게 처형당한 것이다.
소설의 압권은 역시 곳곳에 등장하는 잔인한 처형방법이다. 자오자의 회상 형식을 통해 소개되는 잔혹한 형벌 중에는 핏방울만 맺힐 정도로 얇게 사형수의 살을 저며 서서히 숨지게 하는 능지처참이 있다. 저미는 횟수는 5백번은 돼야 한다. 하루 종일 걸려 5백번을 채우는 순간 사형수가 숨을 거둬 '처형의 미학'은 완성된다.
능지처참의 과정을 묘사한 대목은 충격을 넘어 역겹기까지 하다. 번역자는 작품해설에서 "치떨리는 잔혹한 장면을 읽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고까지 밝혔다.
하지만 소설은 읽어나갈수록 쑨빙 개인이 아닌 근.현세사를 살았던 중국 인민 전체가 탄샹싱의 희생자로 다가선다. 생존의 조건이 피폐할수록 삶의 방식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외세가 삶의 터전을 뒤흔들고 자국 정부로부터도 구원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중국의 인민들은 봉기를 택하게 된다. '탄샹싱'은 그런 점에서 '엽기소설'이 아닌 '역사소설'이다.
신준봉 기자
창랑지수
저자 : 옌쩐 역자 : 박혜원,공빛내리 출판사 : 비봉출판사
‘창랑지수’를 읽으면 중국이 보인다 | 신문명 : 조선일보 | 2003년08월29일
“창랑(滄浪)의 물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
저 유명한 중국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중에 나오는 ‘어부’라는 노래입니다. 시성(詩聖) 두보가 평생 필적할 수 있기를 바랐다는 굴원이지요.
그러나 그의 현실적 삶은 불행했습니다. 동료들의 참소로 조정에서 ?겨난 굴원이 강호를 떠돌다 한 어부를 만나 이렇게 울분을 토로합니다. “온 세상이 더러운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술 취해 있는데 나 혼자 정신이 맑아 쫓겨났다.” 그러자 어부가 돌아서며 읊은 노래가 바로 이 ‘어부’입니다.
“세상사람이 모두 더러우면 함께 흙탕물을 튀기며, 모든 사람이 술에 취해 있으면 당신도 술지게미라도 먹으며 같이 취하지 않고 뭣 때문에 혼자 고고한 척하다가 쫓겨나는 신세가 됐느냐”는 내용이지요. 매사에 현실적이고 이재에 밝은 중국인들의 삶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사’입니다. 이후 ‘창랑의 물’, 즉 ‘창랑지수’는 중국인들의 현실주의 철학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고 합니다.
최근 비봉출판사에서 나온 <창랑지수>(전3권)라는 소설이 바로 그런 중국, 중국인들의 속내를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북경중의학원을 졸업한 주인공 지대위(池大爲)는 문화혁명 때 모함으로 ‘유배’된 아버지의 좌절된 꿈을 좇아 굴원처럼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첫 직장인 위생청에 들어가자마자 그 꿈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되지요.
주인공을 통해 작가 염진(閻眞)은 “권력 앞에서 인격을 들볶이고 영혼을 고문당하던 한 지식인이 마침내 돈과 권력에 굴복당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시대상황이 바뀜에 따라 드러나는 인간본성의 갖가지 양태, 인정의 변화, 조직 내부의 음모, 넘어서는 안될 최후의 선을 아슬아슬 피해가는 부정부패의 실상 등은 그 어떤 입문서보다 중국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나오자 중국 정부가 마지못해 출판은 허용했으나 보도나 광고는 일체 금지해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하네요.
“사나이는 자기를 굽힘으로써 자신을 펴는 걸세. 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기를 굽히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는가? 중국 사람이라면 이 굽힐 굴(屈)과 펼 신(伸) 두 글자를 마음속에 새기고 반복해서 그 뜻을 헤아려야 하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에게 직장 선배가 던지는 이 한마디 충고 속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너무나 빼닮은 중국과 한국의 ‘내면풍경’이 자꾸만 눈앞에 오버랩됩니다.
승인배기자(Books팀장)
<창랑지수> / 한겨레신문 | 2003년08월29일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중국인들의 현실적이며 실리추구적인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회소설. 1957년 태어난 지대위는 정치적 우파로 낙인 찍혀 시골 중의원으로 쫓겨난 아버지 탓에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산골에서 약초를 캐며 자란다. 소설은 돈도 배경도 없는 영민한 청년 지대위의 순수한 포부가 권력과 금력의 횡포, 그리고 격랑과도 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겪는 부침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나간다. 주변사람들의 도전과 경쟁, 음모와 술수에 의해 좌절과 극복을 반복하며 그는 마침내 장년에 위생청장이라는 권좌에 오른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펼쳐보려던 젊은 날의 이상주의는 결국 기득권자들의 저항에 부딪쳐 무너지고 만다.
<창랑지수>는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끈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 씻으면 되지’라는 초나라 시인 굴원의 <초사> ‘어부’에서 따온 구절. 혼자 세상과 동떨어져 꼿꼿이 사는 것보다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흙탕물 튀기면서 사는 게 낫다는 중국인들의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김은형 기자
난세
저자 : 이보가 역자 : 강성위,김중걸 출판사 : 일송북_
관리들은 뇌물, 아부밖엔 모른다 / 조선일보 | 2003년08월15일
무일푼으로 부임했다가 1년만에 떼돈을 모아 으스대는 말단 공무원, 주인의 총애를 등에 업고 벼슬자리를 파는 젊은 첩, 기생과 술을 먹다가 경쟁자의 고자질로 탄핵받는 고관의 아들, 은밀하게 뒷돈을 챙기면서 겉으론 청렴결백한 척 하는 상관이 두려워 일부러 헌옷을 사입고 근무하는 관리들….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인간 군상들의 ‘부정부패 대행진’은 중국 청말(淸末)의 소설가 이보가(李寶嘉1867~1906)의 이 미완성 소설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이 소설의 원제는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즉 ‘관계(官界)의 실체를 나타내는 이야기’란 뜻이다. 청말에 사회의 병폐를 폭로한 일련의 소설들인 ‘견책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여러 단편들이 연결된 듯한 슬라이드식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관리들은 “전송하고 맞이하는 외에는 치적이 없고, 뇌물을 바치고 아부하는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모습으로 표현된다. 청나라 말의 통치집단은 이미 내정을 관리할 능력도, 국가를 보호할 능력도 완전히 상실했다는 얘기다.
독자에 따라서 100여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에 분노하고 섬뜩해할 수도 있고, 웬지 모를 동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마지막 3권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유석재 기자
상상의 초가교실
저자 : 차오원쉬엔 역자 : 전수정 출판사 : 새움(도)
상처딛고 일어서는 ‘어린날의 초상’ | 신문명 : 한겨레신문 | 2004년02월06일
〈빨간 기와〉 〈까만 기와〉로 국내에 소개된 중국 소설가 차오원쉬엔(50)의 또 다른 연작소설 〈상상의 초가교실〉(전수정 옮김, 새움)이 출간됐다.
중국의 작은 시골마을인 유마지를 배경으로 중학생과 고등학생 소년의 성장담을 차례로 그린 앞의 소설들에서 〈상상의 초가교실〉은 좀 더 앞선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는 자신의 어릴 적 초상인 60년대 초 유마지 초등학교의 학생인 상상을 중심으로 친구와 이웃들의 이야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간다.
각 장에는 한명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첫장에서 상상의 동급생 육학은 자라지 않는 머리카락 탓에 이름 대신 ‘대머리 학’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꼬마 적에는 친구들의 놀림에도 헤벌쭉 즐거워하며 지내던 대머리 학은 자신의 머리모양이 남과 다름을 알게 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머리에 눌러쓴 모자는 새로운 놀림거리가 된다. 사람들에게 난 심통으로 학교대항 체조대회를 망쳐버리면서 대머리 학은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에게 원망을 듣는 ‘왕따’가 된다.
작가는 따돌림을 당하는 대머리 학의 심정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이 대머리인 이유로 마지못해 자신에게 낙착된 교내 연극의 주인공을 훌륭하게 연기한 대머리 학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려가 흐느껴 우는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함으로써 아이의 가슴속에 새겨진 유년의 상처와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성장의 모습을 한장의 흑백사진처럼 간결하게 보여준다.
〈…초가교실〉은 국내에 소개된 전작들처럼 당대(문화대혁명)의 첨예한 사회분위기가 녹아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궁핍한 시절에도 아이들은 자라난다는 교훈을 새삼스러운 울림으로 전한다. 맑은 수채화로 그린 중국화가 야오훙의 삽화도 인상적이다.
김은형 기자
까만기와
저자 : 차오원쉬엔 역자 : 전수정 출판사 : 새움(도)
중국 시골마을 고교생들의 성장기 | 신문명 : 한겨레신문 | 2002년08월25일
중국 베이징대 교수이기도 한 차오원쉬엔(48)의 소설 <까만 기와>(전수정 옮김, 새움)가 번역 출간되었다. 지난해 소개되어 전국국어교사모임의 대안 교과서 <우리말 우리글>에 실리기도 한 <빨간 기와>의 후속편이다.
<빨간 기와>와 마찬가지로 <까만 기와> 역시 중국 시골마을의 중등학교를 배경으로 삼는다. `임빙’을 비롯해 <빨간 기와>의 주인공들이 중학교 과정에서 고등학교 과정으로 진학했다는 사실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편의 중반부 이후를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서서히 정상을 찾아가는 학교생활과 학교 안팎의 일들이 다채롭게 그려진다. 학교나 지역사회에서 정치적 패권을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어른들, 이성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분투하는 소년소녀들, 그리고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면서 어른의 세계에 편입되는 친구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 시기의 주인공 임빙에게 생긴 가장 큰 사건은 `아이원’이라는 국어 교사를 만난 일이 될 것이다. 이 `못생긴 선생님’은 거짓으로 꾸며 쓰는 것으로 작문 실력을 뽐내려 하는 임빙의 자만을 깨뜨리고는, 책을 빌려주고 글쓰기에 관한 토론을 벌이면서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끈다.
최재봉 기자
중국 시골 청소년들의 사랑 / 신문명:중앙일보 | 2002년08월12일
가색을 위해 목숨까지 버렸던 동생 석의 사연도 그렇고 또 가색과 사랑을 맺지 못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남상과 이락의 운명을 보면서 독자들은 예리한 면도날로 가슴을 '쓰∼윽' 베어낸 아픔을 느낄 것 같다.
저자는 팬터지 소설의 요소들과 추리형식을 절묘하게 섞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장면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서글픈 사연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젖게 만든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설화처럼 신비하고 서글픈 이야기가 이 책 속에 펼쳐져 있다.
중국의 권위있는 신개념 작문 경연대회 수상작인 <환상 속의 성>은 발간 직후 중국 신세대들로부터 '중국의 코난도일'이라는 평가받고 있는 신예 곽경명의 작품. 중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밥을 먹을 때조차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침체돼 있는 중국 문학계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을 감동시킨 책으로 소문나 있다.
이제 막 성년에 접어든 젊은 청년이 쓴 소설이라고 믿기 힘들다. 그러나 평자들은 성년에 접어든 나이의 젊은이만이 쓸 수 있는 '힘찬 소설'이라는 평을 하고 있다.
왼쪽으로가는여자오른쪽으로가는남자
저자 : 지미 역자 : 이민아 출판사 : 청미래(도)
서정적 그림 곁들인 담백한 사랑이야기 | 신문명 : 한국일보 | 2000년12월01일
외출할 때면 습관적으로 왼쪽 방향으로만 걸어가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만 가는 남자가 있었다. 여자는 소설번역가, 남자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둘은 같은 아파트 옆집에 살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공허하게 느낀다. 그러다 공원에서 아주 우연히 만난다. 오래된 연인처럼 가까워진 두 사람. 서로 전화번호만 교환하고 헤어진다. 하지만 운명은 이날 내린 비로 전화번호 메모가 지워지게끔 했다.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간다.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청미래 발행)는 독특한 그림책이다. 아주 짧은 소설이기도 하다. 대만 문화대 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작가 지미 리아오(35)는 두 남녀의 만날 듯 만날 듯 스쳐가는 인연을 서정적인 그림과 함께 아름답게 풀어갔다. 해피 엔딩이 그렇게 통속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민아 옮김
도시의 "남자와 여자" 무슨 생각을 할까 | 조선일보 | 2000년12월01일
"여자는 교외의 한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외출할 때면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이 언제나 습관적으로 왼쪽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교외의 한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외출할 때면 목적지가 어디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습관적으로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대만의 장 자크 상페"로 불리는 지미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서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면서도 늘 어긋나는 남녀-. 습관적, 기계적으로 사는 도시의 삶. 외롭고, 삶이 재미없어 누군가를 갈구하고, 변화를 꾀하지만 평행선 처럼 늘 마주치지 못하고, 어긋나곤 하는 그들의 가슴 아린 만남과 헤어짐, 재회를 지미는 은근한 미소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그림에 담아낸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는 두 집 사이의 벽이 뚫린 그림을 그리고 밑에 "드디어 봄, 봄이다"고 깔끔하게 생략함으로써 둘이 재회하는 구체적 모습은 독자들 상상의 공간으로 남겨놓았다.
지미의 그림은 실제로 프랑스 작가 상페 그림의 특징적 부분을 빼닮았다. 그러나 상페의 그림이 도회적 삶의 유머와 위트를 보여준다면 지미의 글과 그림은 도시 생활의 적막함, 현대인의 고독을 은은하게 명상적으로 풀어낸다.
또다른 그림책 "미소짓는 물고기"는 물고기 한 마리를 지독히 사랑한 한 남자를 통해 도시인의 소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늘 마음에 그리던 물고기를 한 마리 사서 어항에 넣어두고 "개처럼 충직하고 고양이처럼 포근하고 연인처럼 헌신적인 물고기"라며 애지중지한다. 물고기와 함께 지내며 그는 어린 시절 뛰놀던 숲속, 시냇가로 돌아간 듯한 상상과 향수에 빠지며 행복해 한다. 그러나 결국 물고기에게 어항이란 또다른 감옥이란 걸 깨달은 그는 자신의 이기심과 애착을 접고 고민 끝에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준다. 물고기에게 자유를 주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모습은 또다른 행복으로 초록 광채가 난다는 내용.
"어떤 노래"는 "가면의 고백" "그날, 퇴근길" 등 한 가지 주제에 한 컷 그림을 붙인 수상록 같은 그림책.
지미는 대만에서도 정확한 나이조차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사생활은 베일에 싸인 인기 작가라고 한다. 다만 잘나가는 광고디자이너로 활약하며 아이도 갖지 않는 등 전형적인 중산층 생활을 즐기던 중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면서 새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고 뒤늦게 딸을 얻었으며, 그 후 이같은 작품집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한 권에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단숨에 읽히지만, 투병 생활의 고통과 삶에 대한 경외가 녹아있는 그림 한 장, 문장 한 줄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여운은 어떤 철학적, 명상적 책 보다도 길고 오래간다.
김한수 기자
평행선같은 만남에도 깊어가는 사랑 / 문화일보 | 2000년12월06일
대만 작가 지미(幾米)의 삽화와 짧은 글이 돋보인다. 사랑은 본래 어긋나면서 완성되는 것이란 사실을 한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산뜻한 필치로 그려보인다. 다분히 10대 취향의 그림과 글쓰기지만, 다루는 내용은 그리 녹록지 않다. 한 아파트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남녀는 서로 다른 취향 한가지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걷는 버릇이 있는 것. 영원히 어긋나는 시공을 헤매던 그들은 어느날 공원 분수대에서 딱 마주친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도 잠시, 서로 나눠 가진 전화번호는 비에 젖어 읽을 수 없고 연인들은 다시 다른 길로 찾아 헤맨다. 너는 왼쪽, 나는 오른쪽. 버스를 타도 좌우로 나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도 오르내림이 갈린다. 지하철도 상하행선으로 엇갈리고, 길을 건너도 서로 마주치지 못한다.
사랑은 애닯고 안타깝지만, 그래서 깊어질대로 깊어지는 것. 바로 붙어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이들은 이만큼 서로 가까이 있는데, 그렇게 아득히 멀기만 해야 할까라고 읊조린다.
기다림에 지친 남녀는 드디어 도시를 떠나려고 한다. 서로 다른 문을 열고 서로 다른 길로 떠나는 연인들. 눈내리는 호수가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다분히 감상적인 해피엔딩으로 매듭지어진다.
배문성 기자
숲속의비밀
저자 : 지미 역자 : 이민아 출판사 : 청미래(도)
동심 가득한 "아름다운 꿈" 을 꿔보자 | 신문명 : 조선일보 | 2001년05월04일
지난해말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 등 세 권의 저작으로 국내 독자에게 첫 선을 보인 대만 작가 지미. 그의 어른을 위한 명상적 그림책들은 언제 봐도 청량한 느낌을 주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현대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꿈을 노래한 신작 <숲 속의 비밀>도 그렇다. 고층건물 숲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잠든 여자 아이의 그림과 함께 "수요일 오후,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잠들어 있었다. 하얀 커튼이 하늘하늘 나부끼기 시작했다"는 짧은 글로 이야기는 시작한다.아이 곁에는 토끼와 강아지 봉제인형이 함께 누워있다. 갑자기 창문 밖에서 누군가 휘파람으로 아이를 부른다. 휘파람 소리를 따라 떠난 꿈 속에서 아이는 엄청나게 큰 털북숭이 토끼를 만나 환상 여행을 한다. 문을 열고 나서면 고층건물들이 갑자기 실제 숲이 되고,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 생기고, 수십마리 토끼가 뛰노는 풀밭으로 변하는 등 아이가 꿈꾸는 대로 세상은 변한다. 개미집 같은 지하동굴도 둘러보고, 하늘을 덮을 듯 커다란 해바라기밭을 지나, 구름을 뚫고 하늘을 날면서 아이는 깊숙히 꿈 속으로 빠져든다. "수요일 오후, 바람이 불어왔다. 나와 나의 꿈들은 모두 스르르 잠들었다." 그 다음 페이지는 잠든 아이 주변의 나뭇가지에 토끼 수십마리가 함께 잠들어있는 아늑한 장면. 그러나 토끼가 떠나고 꿈에서 깨어난 후, 숲은 사라지고 다시 현실의 메마른 빌딩숲만 남는다. "꿈이 없는 도시, 너무 적막하다". 긴 울림을 주는 장면이다.
책을 "읽는" 데는 채 5분이 안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흑백 그림들이고, 글도 짧지만 책장을 넘기다보면 적절한 배경음악이 깔린 컬러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생길 정도로 오감을 자극하는 글과 그림이다.
김한수 기자
달과소년
저자 : 지미 역자 : 이민아 출판사 : 청미래(도)
꿈을 잃어버린 어른을 위한 동화 | 신문명 : 동아일보 | 2001년05월04일
밤하늘에 달이 없으면 어떨까? 한 소년이 어둠 속에서 달을 만났다. 달은 꿈이다, 어두운 세상의 "밝음"이다. 꿈 많은 소년이 달과 친해질수록 꿈을 잃은 사람들은 달을 미워한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했다. “달님과 친구가 됐어요.” 아빠가 대답한다. “엄마 말씀 잘 듣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더 이상 학교에 달을 데리고 오지 말아라.”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세상에는 원래 달빛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세상 사람들을 피해 밤에만 만나던 달이 어느 날 문득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달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떨어진 아이는 어른이 됐다. 목발을 짚고 천진난만하게 달을 바라보는 어른이….
지미가 그리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은 잊혀졌던 삶의 한켠을 돌아보게 한다.
김수경 기자
미소짓는물고기
저자 : 지미 역자 : 이민아 출판사 : 청미래(도)
그림동화속에 희망이 가득한 "미소짓는 물고기" | 신문명 : 경향신문 | 2000년12월01일
프랑스 작가 장 자크 상페의 어른용 그림책들이 소리소문 없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잊었던 동심의 순수를 맑은 삽화에서 발견하는 젊은 도시인들이 열혈팬이다. 대만의 일러스트레이터 지미의 작품이 그 바통을 이을 듯 싶다.
상페와 지미의 작품은 생활의 유머를 공유한다하면서도 소재나 분위기에서 상페의 그림과는 다르다. 그러나 상페의 펜화가 전원적이며 재기발랄한 풍이라면, 지미의 수채화는 도회적이면서 시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번에 발간된 3편의 시리즈 중 <미소짓는 물고기>는 물고기와 벗 삼은 독신남을 통해 일상의 자유에 대해 속삭인다.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투명한 경계선을 뚫고 나갈 수 없는’ 어항 속 같은 생활에 대한 자각이 도시를 환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는 왼쪽으로만 걸어가는 여자와 오른쪽으로만 가는 남자에 대한 우화다. 바로 옆방에 살면서도 무의식적인 습관이 두 사람의 만남을 유예시키면서 도시를 미궁으로 만든다.
만화 같은 지미의 작품은 외양은 가벼워도 울림은 적지 않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시적인 감수성과 도시인의 고독을 치유하는 낙관적 세계관이 녹아 있다. 동양적 달관의 정서에 뿌리를 두면서도 피안이 아닌 차안의 세계를 지향한다. 해맑은 그림의 산파가 백혈병 환자라는 사실이 책을 대하는 자세를 곧추 세운다.
윤정훈 기자
빡빡한 글보다 점 하나가 더 감동줄수도 / 한겨레신문 | 2001년12월07일
볼록 나온 배, 통통한 엉덩이,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어항 속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뭘까? 대만의 일러스트 작가 지미가 그린 <미소짓는 물고기>는 한 남자가 넓은 수족관에서 미소로 유혹하는 물고기를 만나며 시작된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그 미소 때문에 남자는 물고기를 집으로 데려와 어항에 두고 함께 지낸다. 물고기와 함께 지내는 동안 남자는 밤하늘의 달을 찾고 유년 시절의 꿈을 떠올린다. 물고기와의 시간이 마냥 행복했지만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남자는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다. 백혈병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했던 지미는 이 책을 통해 일상에 갇혀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허우적대며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으리라. 이 책은 빡빡한 문장으로 가득한 텍스트보다 의미있는 하나의 점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사랑스런 책이다.
임영아/출판사 뜨인돌 기획팀장
백지에 펼쳐진 상상의 바다 / 한겨레신문 | 2000년12월03일
대만작가 지미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나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보았다./ 나에게 미소짓는 물고기를.”
대만의 일러스트레이션 작가 지미는 백지 위에 간결한 한 문장으로 독자와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편다.
“나는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미소짓는 물고기>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한쪽에 한 문장도 많다. 이미 두쪽을 가득채운 일러스트레이션이 그가 하나의 사물에 집착했고, 그 순간 소유욕이 그를 사로잡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잘 나가는 광고인으로 아이도 갖지않고 아내와 둘만의 자유를 즐기다가 어느날 갑자기 백혈병 진단을 받아 채식주의 기공훈련으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귀한 딸까지 얻고 생명에 눈을 뜨게 된 지미는 자신의 얘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밤하늘의 달을 잊고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되새기는 순간이다.
“이제야 알았다./나 역시 커다른 어항에 갇힌 보잘것없는/한 마리의 물고기였을 뿐임을.”
자신이 소유욕과 집착의 감옥에 갇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물고기를 집으로 돌려 보내줄 것이다./자, 너의 유년의 집으로 돌아가거라./끝간 데 없이 펼쳐진 저 바다로.”
그가 방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에야말로 나는 정말로 깊이 잠들었다.”
잠 못들며 고민하던 "나", 소유욕에 불타던 "나", 집착하던 "나"를 버리고, 자유로워진 것이다.
지미의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 <어떤 노래>가 함께 나왔다. 이민아 옮김. 청미래
조연현 기자
족보
저자 : 림원춘 역자 : 출판사 : 하이비전.
"민족정신 되살리는데 筆力 바칠 것" | 신문명 : 조선일보 | 2004년07월02일
“소수 민족의 설움을 이기고 중국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은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은 민족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더 중요합니다.”
중국 내 조선족들의 애환을 다룬 장편소설 <족보>(하이비전)의 한국 출간에 맞춰 방한한 동포작가 림원춘(67, 연변조선족문화발전촉진회 부회장)씨는 “조선족의 땀으로 일군 연변에마저 우리말과 풍습이 잊혀져가고 있으며, 한국은 더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조선족의 고유어나 풍속 등 생활문화를 생생하게 되살린 작품을 주로 써왔다. 물론 한글 소설이다. 88년 중국정부로부터 ‘국가 1급 작가’ 칭호를 받았다. 중국 내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그 칭호를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이번에 출간된 소설은 한국전쟁부터 문화혁명, 그리고 개방에 이르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다루고 있다.
“우리 선조들과 선배들이 살벌한 만주 땅에서 흘린 땀과 피처럼 저도 배달민족의 생존경쟁에서 한 치도 양보 없이 붓대를 꺾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족 문학의 최대 과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연변 출신인 작가는 58년 희곡 ‘생명’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84년에는 단편소설 ‘몽당치마’로 중국우수단편소설상을 수상하는 등 조선족 문단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다. 그의 작품 ‘조국땅은 그 어디나 내 고향’ ‘꽃노을’ ‘몽당치마’ 등은 중국의 각급 학교 교과서에 실렸으며, 특히 ‘몽당치마’는 영어 일어러시아어불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국내에는 단편소설집 ‘몽당치마’(91년)와 역사교양서 ‘황실의 비밀이야기’(96년)등이 소개됐다.
“조선족 문학과 한국 문학은 핫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선족들에게 박완서이문열 등은 인기작가로 자리를 잡았고, 조정래의 ‘태백산맥’, 최명희의 ‘혼불’도 널리 읽히고 있죠. 젊은 조선족 작가들은 한국에서의 새로운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김하인의 ‘국화꽃 향기’는 중국어로 번역돼 수십만 부가 팔리기도 했죠.”
그는 “중국과 한국을 아우르는 민족문학 발전을 위해 양국의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전통을 재해석하고 되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홍렬 기자
공자연의
저자 : 정인생 역자 : 장순용 출판사 : 들녘(도)
孔子 "고뇌하는 지식인" | 신문명 : 동아일보 | 2000년12월08일
최근 TV의 공자강의 등 공자에 관한 붐이 일고 있는 가운데 나온 공자의 전기소설. 공자를 다룬 중국 최초의 소설로 중국에서는 공자 연구서로도 각광받고 있는 책이다. 비록 연의(演義?소설)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여러 고서들의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공자에 대해 확실하면서도 생생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저자(1875?1940)는 청나라 말 화북(華北)의 한 서원에서 공부하고 산동(山東)성 임기(臨沂)의 지방지를 편찬하는 일에 종사했던 선비라는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공자의 출생과 성장, 노나라에서의 정치참여와 좌절, 여러 나라를 다니며 겪은 역경과 고난 등을 사실과 사실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상상력이 결합돼 보여준다. 공자가 자로 자공 안회 등 문하의 제자들이나 각국 장수들과 나눈 얘기, 주요 사건에서 취한 말과 행동 등을 통해 공자의 일관된 사상을 드러낸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시대의 천하질서가 무너지고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시작되던 때. 혼란하고 위태로운 시기에 공자는 예악(禮樂)과 인의(仁義)를 중시했던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했으며 옛 성인들의 도덕정치를 당대에 재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이상은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제후들은 하나같이 국력을 키워 패자(覇者)가 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만년의 공자는 제자를 키우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다.
온갖 수난과 유혹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꿋꿋하게 도(道)를 지키려는 모습을 통해 공자가 성인이기 보다는 고뇌하고 갈등하는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윤정국 기자
소설로 읽는 공자 "아! 이렇게 살았구나" / 한겨레신문 | 2000년12월10일
각 나라의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 힘과 무력으로 패권을 쫓던 군주들에게 "인의"의 도덕정치를 권유했지만, 이를 군주들이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을 보고 뒤돌아서야 했던 공자의 심중은 어떠했을까.
중국 최초의 공자 소설 <공자연의>가 1400년의 세월을 넘어 공자의 일생을 생생히 보여준다. 청나라 말기 산동성의 지방지 기자였던 정인생(1875~1940)이 지은 이 책은 비록 "연의"(소설)라는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꾸며내지 않고, 여러 고서들의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써 공자연구서로도 널리 읽히고 있다.
한때 거사 선풍을 드날렸던 보림선원 백봉거사로부터 참선을 배워 <도솔천에서 만납시다><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펴낸 장순용씨가 우리말로 옳겼다.
최창규 성균관장도 “춘추시대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라 할지라도 <논어>의 말씀 하나하나의 배경을 절로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공자사상의 입문서로 활용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추천하고 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영되는 김용옥씨의 <논어 이야기>로 불붙은 공자 열기에 부응할 것으로 보인다.
공자의 학문이 경지가 높아감에 따라 문중엔 안회, 자로, 자공 등 천하의 인재들이 모여든다. 공자와 제자들은 노나라로 향하지만 공자를 탐탁찮게 여기는 무리들 때문에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다. 이후 공자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벼슬길로 나아가고 공자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지는 과정이 상권을 이룬다.
하권에선 공자가 자신이 꿈꾸던 도덕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자들과 열국을 유람하게 된다. 공자 일행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7일 동안 식량이 끊겨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는 등 도중에 온갖 곤경을 겪는다.(들녘/상하)
조연현 기자
살아있는동안꼭해야할49가지
저자 : 탄줘잉 역자 : 김명은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주)
행복을 찾고 있나요 | 신문명 : 중앙일보 | 2004년12월24일
살면서 꼭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면 어떤 답들이 나올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부.명예.권력을 얻는 것을 꼽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들이다. 이를테면 은사님 찾아뵙기, 부모님 발 씻어드리기, 일기와 자서전 쓰기,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 악기 하나 배워보기 등이다. 공통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다른 공통점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일 테다.
책은 49가지 주제에 관련된 동화같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예컨대 ‘고향 찾아가기’편에서는 40년만에 고향을 찾아 잔치를 벌이는 사업가가 주인공이다. 여전히 가난한 그의 고향 친구들은 초대 받은 잔치에 맨손으로 갈 수 없어 꾀를 낸다. 싸구려 술병에 맹물을 담아 간 것이다. ‘설마 부유한 친구가 이런 싸구려 술을 마시자고 하지는 않겠지’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사업가는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이 가져온 맹물 술을 가장 먼저 따 들이켠다. 친구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 사업가는 눈물을 흘리며 “지금까지 온갖 술을 마셔봤지만 이처럼 맛있는 술은 처음”이라고 친구들을 치켜세운다. 이들은 술이 아닌 진한 우정에 취했고 잔치는 더욱 흥겨워졌다. 중국어판의 제목은 ‘일생의 중요한 일 99가지’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줄여 줬으니 출판사에 고맙다고 해야할까.
조민근 기자
훈훈한 '마음의 양식' 한아름 안겨주세요 [한국경제신문 | 2004년12월28일]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일류대 졸업생이 입사 면접 자리에서 사장의 질문을 받았다.
"부모님을 목욕시켜드리거나 닦아드린 적 있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꼭 한 번 닦아드리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세요."
그날 저녁 날품팔이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발을 씻겨드리겠다고 하자 의아해했다.
그는 면접 얘기를 하고 어머니의 발을 난생 처음으로 만져봤다. 발바닥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밤낮없이 험한 일을 하며 학비를 댄 어머니의 발. 앙상한 발등과 굳은살 때문에 아무 감각도 없는 발바닥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한 쪽 어깨에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지자 그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에는 몇 십 년간의 유한한 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랑스럽게 커가는 제자들의 사진과 근황을 벽에 가득 붙여놓고 옛날 학교 사택에 홀로 사시는 여선생님,저마다 사는 일에 바빠서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지만 유명한 과학자가 된 제자의 책을 사서 읽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돌아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선생님,저희를 용서하세요'라고 전보를 치는 중년의 제자.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보로 내려온 파이프를 판 아버지,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파이프를 다시 찾아드리는 아들.
가난한 고향 친구가 준 맹물이 든 술병을 받아들고 어떤 고급술보다 달게 마시는 중년 신사의 우정….
저자의 부탁처럼 천천히 읽어야 할 책이다.
'사랑에 송두리째 걸어보기'추억이 담긴 물건 간직하기'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기'자신에게 상주기' 등 마흔아홉 가지의 소중한 삶이 책갈피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눈을 맞춘다.
닭털 같은 나날
지은이 : 류진운 역자 : 김영철 출판사 : 소나무
헛바퀴 돌고 도는 고단한 일상 | 신문명 : 한겨레신문 | 2004년03월06일 |
중국 작가 류진운(46)의 소설집 〈닭털 같은 나날〉(소나무·김영철 옮김)이 번역·출간됐다. 책으로 묶인 세 중편은 모두 1990년대 초반에 발표된 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생활이 예술보다 더 힘 있다”라는 명제에 따른 중국 신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들이다. 사회적 격변이 피워 올린 부연 먼지가 조금씩 가셔지는 시대여서인지, 그의 작품들에는 근·현대 중국인들의 얼룩진 초상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임의 집에 두부 한 근이 상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표제작은 베이징에 사는 한 맞벌이 부부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포착했다. 주인공인 임씨 성의 사내는 매일 아침 두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또 직장에 출근한다. 그는 철없는 가정부 아이 때문에 속상해하고, 수도꼭지를 가늘게 틀어 물을 훔쳤다가 검침원에게 망신당하고, 아내의 직장을 옮기려고 뇌물을 쓰다 망신을 당하는 인물이다. 제목의 닭털은 한편으론 닭을 잡아내느라 피와 털이 난무한 공간을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한 무더기 닭털을 덮고 그 밑에는 껍질을 깔아 외려 아늑해진 허섭스레기 일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설 속에는 아내의 직장을 옮기기 위해 뇌물을 쓰고, 무성의한 가정부 소녀를 쫓아내기 위해 유아원의 빈자리를 알아보고, 검침원 노인에게 민원청탁을 받는 대가로 전자레인지를 챙기는 등의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연쇄반응처럼 맞물려 있다. 고단하게 헛돌아가는 일상의 수레바퀴는 세상을 떠난 초등학교 은사의 아들에게서 부음을 전하는 편지를 받는 것으로 일단 멈춘다. 임은 일전에 자신이 암 진료를 받기 위해 베이징에 올라온 은사를 홀대했음을 뒤늦게 자책하지만, 집에 쌓아둔 배추더미를 말려야겠다는 데 생각이 닿자 그마저 잊어버린다. “배추를 다 정리하면, 아내가 전자레인지로 닭을 구워줄 것이고, 맥주를 내 줄 것이다. 그러면 그로서는 전혀 불만스럽지 않은 것이다.”
소설집 안에는 이밖에도 조직 개편의 소식을 듣고 살아남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인물들을 그린 〈관리들 만세〉, 기록문과 소설의 형식을 넘나들며 300만 인민들이 굶어죽은 1942년의 참사를 소재로 한 〈1942년을 돌아보다〉 등이 함께 묶였다.
왜소해진 현대 중국인의 초상 | 신문명 : 한국일보 | 2004년03월06일
류쩐윈(劉震雲ㆍ46)은 현대 중국 작가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한 사람으로평가받는다. 중국내 각종 문학상을 휩쓸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온 류쩐윈의 소설을 읽은 작가 황석영씨는 “문학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일깨우는 대단한 작가”라고 평했다.
소설집 ‘닭털 같은 나날’의 출간으로 국내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됐다. 류쩐윈은 “생활이 예술보다 중요하고, 생활의 부분부분이 생활 전체보다 크다. 땅콩 한 알을 마주하고도 그것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으로한 민족과 다른 민족이 구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런 문학관이 잘 반영된 작품이 표제작 ‘닭털 같은 나날’이다. 류쩐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중편은 개방화 이후를 배경으로 베이징(北京)에거주하는 평범한 가장 임(林)씨의 일상이다.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해 새벽에 줄을 서고, 몰래 수도를 틀어 물을 훔치고, 신세를 지려는 고향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괴롭다.이렇게 분통을 터뜨리다가도 민원을 해결해달라며 받은 전자레인지에 즐거워하고, 동창생의 오리고기 가게를 임시로 봐주고 얻은 부수입에 기뻐한다. 임(林)을 찾아왔던 고향 은사가 작고했다는 소식에 그를 홀대했었다며상심했다가, 쌓아둔 배추더미를 널어 말려야 하는 일을 떠올리곤 “살아있는 사람은 역시 배추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며 귀가한다.하찮고 보잘것없는 일상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우스우면서도 찡하다. 가슴치며 탄식하다가도 금세 희희낙락하는 임(林)의 하루하루는 개방화로 왜소하고 자그마한 인간이 돼버린 현대 중국인의 초상이다. 그 지리멸렬한 삶을 견뎌내는 자조적 유머를 통해 비감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류쩐윈의 소설은 형식미도 갖췄다.‘닭털 같은 나날’과 함께 조직 개편을 앞두고 국장과 부국장의 이전투구를 그린 ‘관리들 만세’, 굶어죽은 시체를 개들이 뜯어먹었던 1942년의참혹한 기아사태를 쓴 ‘1942년을 돌아보다’가 묶였다.
격변기 중국 소시민의 일상 | 신문명 : 국민일보 | 2004년03월08일
중국의 소설가 류젠윈(46)의 소설집 ‘닭털 같은 나날’(소나무)이 국내 처음으로 번역출간됐다.
류젠윈은 격변기 중국의 모순을 날카로운 필치와 특유의 블랙 유머로 담아냄으로서 신사회주의적 계열의 정점에 서 있는 작가.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각각 개인과 조직과 역사를 주제로 한 3편의 중편이다. 표제작의 원제목인 ‘一地鷄毛’는 닭을 잡은 뒤에 닭피와 닭털이 난무하는 비참한 현실을 가리키는 동시에 허섭쓰레기 같은 일상을 지칭하기도 한다.
“임(林)의 집에 두부 한 근이 상했다”로 시작하는 표제작은 철없는 가정부 아이 때문에 속을 썩고,물 값을 절약하려고 밤중에 계량기가 돌지 않을 만큼 수도꼭지를 살짝 열어놓았다가 검침원에게 망신을 당하고,아내의 직장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고 뇌물을 쓰려다 좌절하고 끊임없이 시골에서 찾아와 신세를 지는 고향 사람들 때문에 아내와 갈등을 빚는 한 사내의 지리멸렬한 삶은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에서도 너무나 익숙한 서민들의 풍경이다.
“인사 담당자가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그는 그제야 자기가 아직 코카콜라 상자를 그대로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건물 밖을 향해 급히 외쳤다. 왕 선생님,제가 음료수 한 상자를 갖고 왔는데요? 인사 담당자는 건물 밖에서 웃으며 대답했다.‘내 집에 음료수 몇 통이 없을까 봐? 집에 가져가서 마시도록 해요.”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제대로 된 줄타기 한 번 못하고,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하는 소시민의 고단한 일상. 하지만 왠지 허탈할 것만 같은 결말 어디 즈음에서,마음 한켠으로 애틋함이 밀려든다. “퇴근버스를 타고서,집에 쌓아둔 배추더미를 널어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하루종일 그를 상심하게 만들었던 일은 기억 저편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역시 배추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3년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초청으로 방한한 류젠윈과 친교하고 있는 소설가 황석영씨는 “고골리의 단편 ‘외투’에 나오는 아카예비치가 생활에서 겪는 마음 고생의 과정이,감출 수 없는 갖가지 이기적 치부와 함께,행위와 내면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것을 연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환상 속의 성
저자 : 곽경명 역자 : 김진철 출판사 : 드림박스
중국 대륙 울린 '동화같은 사랑' | 신문명 : 스포츠신문 | 2004년03월19일
<환상 속의 성>은 제목에서 의미하듯 환상적이고 신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독자의 눈앞에 끊임없이 내리는 눈꽃 속의 우아한 성이 펼쳐진다. 그 성에서 황제의 아들 가색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자유를 갈망한다. 독자들은 지금부터 애처로운 가색과 만나 소설의 끝자락까지 동행할 수밖에 없다.
기차는 새벽에 도착한다
지은이 : 취신후아 외 역자 : 차경섭 외
중국대륙 12억 울린 부녀사랑 | 신문명 : 국민일보 | 2000년02월02일
자신을 빼닮은 딸아이를 낳자 마자 아내는 세상을 떠버렸다.남 모르는 고생으로 눈물을 훔쳐가며 키우기를 6년.‘이제는 재롱 좀 보며 살려나’한숨 돌리는데 그 딸이 실명(失明)아니면 실명(失命)하게 되는 중병에 걸렸다.망막세포종양.억장이 무너지는 아버지.만약 당신에게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지난 87년 중국 상해인민라디오에서 방송돼 12억 중국 인민을 울음바다에 빠뜨린‘기차는 새벽에 도착한다’(대인)가 출간됐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이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지 않겠는가마는, 소설 속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의지와 인내는‘내리 사랑’의 위대함을 실감나게 보여준다.아버지는 세간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맹인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맞게될 고명딸을 데리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여행한다.
딸에게 제 나라의 경승과 유적을 하나라도 더 보여줘 조금 있으면 기능을 상실하게 될 망막 속에 영원히 각인시켜주고 싶은 것이다.만리장성으로,계림으로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지친 딸은‘집에 갔다가 다음에 와서 보자’고 보채고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흐느낌을 삼킨다.
소설은 맹인학교 교사가 된 스무살 딸을 임지로 데려다 주려 같이 기차여행을 하는 하룻밤 동안의 부녀의 소회를 담고 있다.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기차 바퀴소리를 따라 부녀는 한숨도 잠을 못이루며 그간의 일을 떠올린다.아버지는 더 잘 해주지 못했던게 한스럽고, 딸은 철부지 적 괜한 투정을 부려 속상하게 해드린 게 죄스럽다.
열몇살적 어느 날,집에 돌아와보니 딸아이의 흰 치마에 붉은 꽃물이 번져있고 딸은 두려움에 얼굴이 질려있다.초경을 맞이한 딸에게 왠지 쑥스러워 찬찬히 설명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아버지.아버지가‘방송국 아줌마’와 가깝게 지내자 생떼를 써 끝내 아버지를 독차지해 버린 게 못내 후회스러운 딸.
‘헬렌 켈러’류의 인간 승리 드라마에 익숙해져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던 누선이 이들의 잔잔한 사랑 앞에는 맥을 못춘다.독자를 울리는 건 장애를 이겨낸 불굴의 의지 보다는 동양적 정서가 바탕이 된 부녀간의 사랑과 서로의 마음 씀씀이다.
밤을 도와 달린 기차가 임지에 도착한 새벽녘,여지껏 하루도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는 부녀는 각자의 새 생활을 격려하며 몇 개월 뒤 방학이면 맞을 재회를 셀렘으로 기약한다.뭉클한 눈물 뒤에 찾아오는 뿌듯한 감동.이 소설의 독후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은이 : 여명휘 역자 : 김옥희
신문명 : 파이낸셜뉴스 | 2001년07월26일
빠르게 변화하는 대륙 性풍속 "지금 세상에서 유행처럼 떠도는 말이 뭔지 아세요. 남자들의 가장 큼 소원이 바로 현숙한 아내와 아름다운 애인을 동시에 소유하는 거래요." 우리나라 연속극 쯤에서 들음직한 이대사를 중국의 베스트셀러에서 읽었다. 무려 5000만부가 팔렸다는 여명휘의 [사랑하기때문에](원제:메이냥.북앤피플)는 아찔한 가속도로 자본주의를 향해 질주하는 대륙을 읽게 해준다. 부동산 투자, 에어컨, 수입품 바닥재, 최신 가전제품에 대한 욕구가 분출된다. 이 물질들에 대한 욕방이 13억 인구를 개방으로 몰고가는 거대한 힘이며, 나아가서는 사회주의적 부부윤리 대신에 혼외정사를 꿈꾸도록 만드는 힘이다. 한 중년 철학교수가 사랑에 눈뜨고, 가정과 애인 사이에서 방황한다. 애인의 얼굴을 떠올려야만 아내와의 잠자리에 성공하는가하면,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겠다고 협박해오는 애인을 완전범죄로 살해하려하지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는다.
닷새 후면 살해할 애인과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장면은 생생한 리얼리티를 회득하면서 그의 도덕적 파단상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에게 애정을 보낸다. 가족에게 버림받지만 간구나 경찰관으로 부터는 동정을 받으며, 결말에 준비된 반전을 통해 주인공은 풀려나고 막대한 부를 얻으며 '성형미인'의 구애를 받는 것이다. 윤리보다는 인가에 대해 훨신 더 많은 애정을 지난 작가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어째서 이 소설에 성원을 보내는가. 혼외정사의 달콤한 순간들, 그 격정이 지나간 뒤에 닥쳐오는 지극한 위험, 그러나 오히려 더 큰 출세를 이루는 일. 어떤가, 당신은 이런 은밀한 욕망이 없는가. 중국독자들 역시 당신과 비극한 욕망을 개방 20년 만에 갖게 된 것일 뿐이다. 이 소설은 범죄행위가 등장하지만 악당소설이 아니라 애정 추리소설이다. 악당소설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주목한다면 추리소설은 지적 흥미에 집중한다.
007이 아무 갈등 없이 살인하듯이 주인공의 살인에도 고민은 거의 없다. 중국인의 내밀한 욕망을 스피디한 사건전개와, 마치 퍼즐게임 같은 약간의 지적 자극을 무기로 그려낸 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리라. 베스트셀러는 세상을 읽는 중요한 지Ⅰ?된다. 대중들이 무엇에 목말라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때문에]는 최 신판 중국 풍속도다. 세계 최대의 시장, 머지않아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 되리라는 대륙을, 한국땅에 앉아서 읽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리의 1년은 세계의 10년'으로 살아온 우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중국을 읽는 일은 바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
신산을 찾아 동쪽으로 향하네
지은이 : 옌안성 역자 : 한영혜
중국 지식인들의 희망찾기 | 신문명 : 한겨례신문
서구 문화를 제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은 스스로 동아시아의 제국이 되려는 야심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 서구 문화를 전파하는 가장 가깝고 친숙한 창이었다. 한국이 유교적 전통을 내세워 서양문물과 일본을 배척하다가 무력에 의해 일본에 종속돼 가던 19세기 말에, 유교의 본산인 중국은 어떠했을까. ‘근대 중국 지식인의 일본 유학’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청나라 봉건 왕조를 개혁하거나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말~20세기 초 중국 지식인들의 희망과 수치심, 자기번민과 결의를 다룬다.
아편전쟁을 치르며 서양 함대의 위력에 놀란 청조는 187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에 청년들을 유학보내 병선 조종과 조선에 관련된 연수만을 받게 했다. 근대식 정치제도를 배우는 건 청조가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 유학생들은 귀국해 청일전쟁에 동원돼 바다에 수장돼 갔다. 청조를 다시 유혹한 건 일본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을 회유할 겸, 일본은 1898년 ‘지나보전’을 모토로 내세운 동아동문회를 만들어 중국인의 일본 유학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렇게 시작된 중국인들의 일본 유학 현장에선 역설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주일 중국 공사는 중국인 유학생들의 동태를 보고하면서 “민주라는 바람에 물들어 결국은 혁명을 주장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담은 문서를 베이징 외무부에 보냈다. 일본인 교수는 “공맹사상을 받들고 혁명은 자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중국인 학생들은 거기 맞서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가노 지고로와 양두 사이에 벌어진 이 ‘지나교육 대논쟁’은 중국 본토로 흘러들어가 훗날 마오쩌둥의 스승이 되는 양창지를 흥분시켰다. 일본을 의심하면서도 1903년 일본으로 유학간 양창지처럼, 중국 지식인들은 경계와 각오가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일본을 찾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본은 쑨원의 혁명파, 캉유웨이의 유신파, 량치차오의 입헌군주파 등 중국 근대의 혁신세력들의 집결지가 되면서 ‘양산박’으로 불렸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리다자오, 리류루, 저우언라이 등도 일본에서 〈자본론〉과 가와카미 하지메의 책을 읽으며 공산주의를 익혔다.
책 제목은 중국 공산당의 원로 혁명가 우위장이 1903년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서 쓴 시에서 따왔다. 봉건구습과 외침으로 망해가는 중국을 구할 신산의 선약을 찾아 동쪽으로 간 이 청년들은 ‘전족’과 ‘변발’의 풍습으로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전족은 ‘서양 여성은 몸을 희생하여(허리를 졸라서) 아름답게 보이려 한다’, ‘중국 여성은 발을 희생하여 추하게 보이게 한다’는 미추논쟁까지 낳으며 전족 폐지령을 낳게 했다.
베이징일본학연구센터 주임교수를 지낸 옌안성(68)이 쓴 이 책은 쉽고 간결한 문체로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념 지형도를 그려준다. 100년이 지나 다시 중국과 일본이 대립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지금 시점에서 흥미로운 시사점이 많다.
쇠똥화로에서향내나다
저자 : 치바이스 역자 : 김남희 출판사 : 학고재
중국미술계 거목 齊白石 일생 | 신문명 : 조선일보 | 2003년06월13일
빗물에 쓸릴라, 흙을 움켜쥐던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 미술계의 거목(巨木)이 된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치바이스는 병치레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고 그나마 손에 익힐 수 있는 거라곤 조각 뿐이었다. 그렇게 어두운 비탈길에서 절망을 견뎌냈기에 그 작은 희망의 불씨에 죽기살기로 매달렸을 수도 있다.
조각공으로 일하던 그가 나이 스물이 돼서야 모사(模寫)로 그림을 시작한다. 솔불로 밤을 밝히며 시(詩) 공부를 해 그림에 자작시를 넣을 정도가 되자 살림이 조금씩 폈다. 손자의 밥벌이를 걱정하던 할머니는 그제서야 “네가 그림을 솥에 넣고 끓이는구나”라며 안도했다고 한다.
치바이스는 초상화는 물론 반찬거리에서부터 나팔꽃처럼 하찮은 들꽃에 이르기까지 흔해빠진 사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더 귀한 것도 더 천한 것도 없다. 행태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이 주는 느낌을 화폭에 담았다.
이 책은 치바이스가 71세 되던 해에 자신의 인생을 문하생에게 받아적게 한 작업에서 움텄다. 작업은 17년이 걸렸고 그의 작품 180여점도 책 위로 옮겨졌다.
박돈규 기자
중국의 피카소' 소설같은 삶 / 중앙일보 | 2003년06월13일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는 중국 근.현대 미술계에서 첫 손에 꼽는 거장이다. 중국 근대미술의 서막을 연 화가로 1953년에 중국미술가협회 주석이 되었다. 지난해 가을,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중국 근.현대 오대가전'에 선보인 치바이스의 작품은 말로만 듣던 명성을 확인하게 해줬다.
후배인 리커란(李可染)이 "가슴에 삼라만상을 품고, 손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오른"이라고 기릴만한 격조와 기량이 그림에서 뿜어져 나왔다. 과연 그는 구십 평생을 자연을 보고 마음에 담은 뜻을 종이 위에 자유자재로 편 '중국의 피카소'였다.
이 책은 치바이스가 일흔 한 살 되던 해부터 문하생 장치시(張次溪)에게 구술한 자서전이다. 17년에 걸쳐 받아 적게 한 회고담은 한 편의 소설같다. 가난한 집에서 병약하게 태어나 목수일로 밥벌이를 시작한 그는 "입에 풀칠부터" 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도 스스로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일깨웠다.
얼마나 먹을 것이 궁했는지 "밭에 토란이라도 있으면, 어머니는 나더러 그것을 캐어 집에 가서 쇠똥에 구워 먹으라고 하셨다"고 기억하는 화가는 뒤에 토란을 그릴 때마다 그 광경을 떠올리고 시를 한 수 지어 붙였다. "쇠똥 화로 불 지피면 향이 절로 풍겨난다네." 치바이스는 그림을 팔아 부모 봉양하고 처자를 거두게 된 뒤에도 궁핍했던 과거를 잊지 않았다. 그가 그린 소재들은 서민들 생활 속에 익숙한 것들이었다.
치바이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호미며 삼태기는 일하는 백성들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생계 도구요, 그가 즐겨 그린 배추와 죽순은 가난한 이들의 밥상에 자주 오르는 반찬이었다. 제자 하나가 배추를 잘 그리는 비법을 묻자 치바이스는 "네 몸에는 소순기(蔬筍氣:푸성귀나 잡풀의 성분)가 없는데 어찌 나와 똑같은 그림의 효과를 낼 수 있겠느냐"고 했다. " 말을 하려면 남들이 알아듣는 말을 해야 하고, 그림을 그리려거든 사람들이 보았던 것을 그려야 한다"는 독학으로 화법을 깨우친 그의 화론 아닌 화론이었다.
"선통 2년(1910)에 48세. 집으로 돌아온 뒤 학문이 너무 형편없음을 통감하고 날마다 고문과 시사(詩詞)를 읽었다"는 구절이 보여주듯, 치바이스는 평생을 쉬지 않고 공부하고 그렸다. "새나 벌레는 늙어서도 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며 "하루도 헛되이 지내서는 안된다"고 다짐한 시 구절은 노동자와 인민의 곁에 선 화가상을 보여준다.
그는 팔순에 접어든 뒤 대문에 "관료들에게는 그림을 팔지 않음"이라고 써붙였다. 1937년 베이징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였다. "적군의 통역을 맡은 작자들" "인민의 피를 팔아먹는 벼슬아치들"을 쥐로 묘사한 노화가는 "쥐들아, 쥐들아, 어째 그리 많으냐! 어째 그리 시끄러우냐!"고 통탄했다.
정재숙 기자
동양화 최고봉 치바이스 자서전 / 한겨레신문 | 2003년06월13일
지난 세기 서양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가 피카소라면, 동양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아마도 중국 근현대 최고의 화가이자 전각예술가로 일컬어지는 치바이스(齊白石, 1863-1957)가 가장 먼저 꼽힐 것이다. 이들은 모두 100살 가까이 장수하면서 수만점의 작품을 남겼고, 그림은 물론 조각과 공예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 것 등등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두 거장의 삶은 사뭇 달랐다. 피카소가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 온갖 영예와 호사를 누린 반면 치바이스는 후난성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논일을 하기에는 너무 몸이 약해 목수가 됐고, 27살에야 처음으로 스승을 만나 미술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비천한 목수 출신이란 이유로 북경 화단에서 배척 받던 그가 비로소 이름을 얻은 것은 쉰여섯살이던 1929년, 북평예술전문학교의 교장이던 당시 최고의 화가 쉬베이홍(徐悲鴻)이 우연히 치바이스의 그림을 보고 감탄해 파격적으로 그를 교수로 발탁하면서부터다.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대가가 된 뒤에도 그는 결코 노동자 인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장작이나 호미 같은 농민들의 생필품들과 어린 시절 고향 개울에서 잡던 새우와 게, 그리고 배추 같은 반찬거리까지 그는 고매한 이상 속의 소재가 아니라 생활 속의 소소한 물건들을 즐겨 그렸다.
책은 바로 이 치바이스가 여든여덟살까지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 자서전이다. 자신의 그림처럼 솔직하고 담백하게 지나온 길을 회상하는 치바이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규 교육기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그가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배움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치바이스는 그림에 시제를 쓰기 위해 시를 배웠고, 전각을 배우고 싶어 옛 글자를 배웠다. 출신 신분이 낮은 그가 하나하나 자신의 예술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에는 언제나 기존 예술가들의 무시와 주위 사람들의 질시가 존재했지만 그는 이런 시선과 고정관념을 인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도전했다.
자서전이다 보니 자신을 스스로 높이기를 꺼려해 쉬베이홍과의 만남 등 드라마틱한 부분들이 많이 빠진 점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지인들과 스승의 덕분으로 돌리는 치바이스의 겸손한 모습은 세상 모든 것을 스승으로 삼았던 그의 성품을 보여주기도 한다. 쑨원 휘하에서 혁명당 활동을 벌이던 친구를 위해 그림을 판다는 구실로 문서를 그림 사이에 숨겨 전달한 일, 최고의 경극 예술가였던 메이란팡과의 교유 등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판형이 작아 그림 맛을 온전히 즐기기는 어려워도 다양한 전각과 중기의 산수화, 후기의 사의화 등 그의 주요작들이 대부분 수록돼 눈을 즐겁게 해준다.
구본준 기자
한국인중국인일본인
저자 : 찐원쉐 역자 : 출판사 : 우석출판사
한중일 문화 꼼꼼히 비교해보니 | 신문명 : 한국일보 | 2000년11월11일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의 국민성을 비교한 유머가 있다. "일본인처럼 개성이 두드러지고, 중국인처럼 단합하고, 한국인처럼 약속을 잘 지킨다."자조적이기는 하지만 "중국인은 뛰기 전에 생각하고, 일본인은 뛰면서 생각하고, 한국인은 뛰고 난 다음 생각한다"라는 말도 있다. 모두가 동북아 3국의 유별난 기질과 문화를 빗댄 것이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과 <코리언 드림>은 이 세 나라 사람들에다 중국 조선족을 포함시켜 4개 민족의 성격과 언어습관, 생활양식 등을 꼼꼼하게 비교한 책이다. 저자 찐원쉐(金文學ㆍ38) 박사는 중국 센양(沈陽)에서 태어난 조선족 3세로 랴오닝(遼寧)교육대 강사를 거쳐 일본 히로시마(廣島)대 비교문화연구원으로 재직중인 전문가이다.
책은 다른 점잖은 비교문화론과는 달리 매우 직선적이고 구체적이다.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여러 잣대를 갖고 4개 민족을 분류하고 합쳐버린다. 특히 조선족을 비판한 <코리언 드림>에서는 저자의 자학적인 태도가 두드러진다. 그만큼 조선족에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저자는 우선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에서 3국 여성들의 미의식을 비교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여성은 예쁜 얼굴을, 일본 여성은 커다란 가슴을, 중국 여성은 긴 다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그래서 한복은 여성의 몸을 모두 가린 채 얼굴만 내놓고, 기모노는 허리춤의 띠(오비ㆍ帶)로 가슴을 도드라지게 하고, 차이나 드레스는 허리선부터 다리까지 남김없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자를 가까이 했던 3국의 문인들을 소개한 대목도 재미있다. 일본 근대문학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생을 풍류와 벗삼은 나가이 가후(永井荷風ㆍ1879~1959), 중국 토박이 전족 부인과 살며 10년 연하의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던 중국의 대문호 호적(胡適ㆍ1891~1962), 그리고 한국의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이다. 저자는 이들의 여성편력에 대해 “나가이 가후의 사랑은 소탈하지만 고독하고, 김동인의 사랑은 방종하지만 고독하지는 않고, 호적의 연애는 로맥틴하지만 비극적이었다”고 평했다.
저자의 비교욕구는 다양하게 계속된다. 한국과 중국의 씨름이 상대방을 넘어뜨려야 하는 데 비해 일본의 스모는 상대방을 밀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일본인의 독특한 그리고 배타적인 공동체 의식을 발견한다. 시험장에 들어가는 아이에게 일본인은 "간바레(がんばれㆍ노력해라)"라고 격려하지만, 중국인은 "긴장하지마(不要緊張)", 한국인은 "마음을 놓아라"라고 하는 데서 한국과 중국을 "푸는 문화"로 진단한다.
<코리언 드림>에서는 조선족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자학을 넘어 독설에 가까울 지경이다. 중국의 조선족 여성 매춘에 대해서는 "20세기의 위안부"라고 욕하고, 남한 사람에 대해 사기치는 행위는 "조선족의 한국놈 때리기"라고 자조한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그들의 정신연령은 불과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깎아 내린다.
“한국인은 뛰고 나서라도 생각하지만 조선족 동포는 뛰는 도중에 뛰는 이유를 잊어버린다. 조선족의 약점을 들춰내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조선족 기질의 병폐를 해부하고 비판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요즘의 조선족에게 경적을 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조선족의 정체성을 누구보다도 찾고 싶다"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고백이다.
2000년 11월 10일 / 김관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