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順洪 編, 최영제 옮김, 〈現代史〉, 《中國槪況》, (北京 : 北京大學出版社, 1994. 9), PP.24-28. 甘肅老年大學 編, 송영수, 강순옥, 구선심, 손세은, 정지수, 황혜진, 김영남, 김지연, 이선영, 이정순, 제소진, 고정호 옮김, 〈偉大的轉折--中共十一屆三中全會〉, 《中國歷史槪要(現代史)》, (蘭州 : 甘肅人民出版社, 1994), PP.234-243.
현대 중국의 역사
1. 중국현대사(1919―1949년)
王 順 洪
1-1 「5·4 운동」과 중국 공산당의 성립 1840년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인들은 제국주의 침략자와 봉건주의의 압박에 대해, 태평천국 운동, 의화단 운동, 신해 혁명 등 70년간 용감하게 투쟁했지만, 결국은 모두 실패하였다. 역사가 증명하듯, 반식민지 반봉건 상태의 중국에서는, 농민 계급이나 자산 계급의 영도 하에는, 모두 혁명의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없었다. 중국 혁명을 이끌 책임은 신흥 계급인 무산계급에게 맡겨졌다. 근대 공업은 중국의 무산계급을 낳았다. 1870년 전후, 중국의 근대 산업 근로자는 만 명이 채 못되었었는데, 1919년 「5·4 운동」 전까지는 이미 200만 명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중국 공업의 무산계급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들은 새로운 생산력의 대표 격이었고, 가장 진보적인 세력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10월 혁명이 일어나, 무산계급이 정권을 장악한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졌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영향으로, 중국에는 李大釗, 陳獨秀, 毛澤東 등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새로운 혁명 사상을 선전하고 무산계급 혁명을 고취시켰다. 새로운 형세와 새로운 혁명 사상의 영향으로, 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철저히 반대하는 혁명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5·4 운동」이다. 「5·4 운동」은 먼저 北京大學의 학생들로부터 일어났는데, 3000여명의 사람들이 天安門 앞에 모여, 중국 정부 대표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巴黎和約〉에 서명하여 국가의 주권을 팔아먹은 행위에 대해 반대하였다. 항의 시위는 북양군벌 정부의 진압을 받았고, 이는 전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이어서, 上海 등 주요한 도시의 노동자, 학생, 상인들은 모두 일손을 놓고, 대규모의 항의 시위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결국은 북양군벌 정부로 하여금 체포되었던 학생들을 석방하게 했고, 세 명의 매국노를 파면시켰고, 〈파리 화약〉에 서명하는 것을 막아냄으로써, 투쟁은 승리를 거두었다. 「5·4 운동」은 중국 무산계급의 거대한 역량을 처음으로 보여주었고, 도시 각계의 혁명 연합을 실현시켰으며,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혁명 운동의 결합을 촉진시켜, 중국 공산당의 탄생에 준비 작용을 하였다. 1921년 7월, 毛澤東, 董必武 등 몇몇 혁명 운동가들은 전국 각지의 공산주의 소조를 대표해서 상해에서 제 1차 全國代表大會를 개최하고 中國共産黨을 성립시켰다. 이로부터, 중국의 혁명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문에, 「5·4 운동」은 중국의 근대사와 현대사, 구 민주주의 혁명과 신민주주의 혁명을 구분하는 지표가 되었다.
1-2 북벌전쟁 (1926년) 중국 공산당 성립 이후, 1922년에 처음으로 전국에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철저히 반대하는 민주주의 혁명 요강이 발표되었고, 1923년에는 국민당과의 혁명 통일 전선이 결정되었다. 1924년, 孫中山은 공산당의 협력을 받아들이고, 廣州에서 국민당 조직을 개편하여, 국공 양당은 제 1차 합작을 실현시켰고, 공동으로 黃포軍官學校를 세워 국민 혁명군을 조직하여 군벌 세력을 정벌하였다. 국민 혁명군은 廣東에서 군벌 세력을 격퇴한 후, 1926년 정식으로 북쪽으로 진군하여, 북양군벌을 토벌하기 시작했는데, 역사상으로는 「북벌 전쟁」이라 불린다. 북벌 전쟁의 시작 단계는 아주 순조로워서 국민 혁명군은 순식간에 중국의 남부와 중부를 점령했다. 이 때, 중국에는 혁명의 형세가 드높았다. 하지만, 1925년 孫中山이 죽고 나자, 국민당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蔣介石을 대표로 하는 우파가 지도권을 장악했다. 1927년 4월, 북벌 전쟁이 막 승리를 거둘 무렵, 蔣介石은 상해에서 반혁명 정변을 일으켜, 갑자기 습격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공산당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연이어, 국민당은 남경에 國民政府를 세우고, 蔣介石이 군사 위원회 위원장과 중앙 정치 회의 주석을 맡아, 군사와 정치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리하여, 기세 높던 대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중국 현대사에서 이 시기를 일컬어 제 1차 국내 혁명 전쟁 시기라 한다.
1-3 제 1차 국공내전 (1927―1937년) 蔣介石이 반혁명 정변을 일으킨 후, 중국 공산당은 90%의 힘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지 않았고, 혁명을 되살리기 위해, 1927년 8월 1일에 공산당 사람들인 周恩來, 朱德, 賀龍 등이 南昌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켜, 국민당에 대한 무장 투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이 때 이후로, 중국 공산당은 그들 자신만의 무장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8월 7일, 중공 중앙은 긴급 회의를 열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지도자 진독수의 직위를 해제시키고, 토지 혁명과 무장 투쟁으로 국민당에 맞서자는 방침을 확립했다. 같은 해 9월, 毛澤東은 湖南지방에서 「추수 봉기(秋收起義)」를 일으켜, 노동자 농민의 紅軍을 건립했으며, 井岡山에 농민 혁명 근거지를 만들었다. 이듬해 4월, 남창에서 봉기한 부대도 정강산에 도착했다. 이로부터 중국 공산당은 민중을 동원하고 이끌어, 농촌에서부터 도시를 포위하고, 무장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혁명의 길을 가게 되었다. 蔣介石은 혁명의 결실을 찬탈하고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후, 중국 공산당과 그 군사력을 소멸하기로 결심하고, 중국 공산당의 江西 중앙 혁명 근거지에 대해 다섯 차례의 대규모 군사 포위 토벌을 가했다. 1934년 10월, 蔣介石의 군사 포위 토벌을 벗어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동북 지방을 침략한 후 날로 심각해 가는 민족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노동자와 농민의 홍군은 강서 중앙 혁명 근거지를 탈출하기로 결정하고, 북방을 향한 만 리 길의 전략적 대 이동을 시작하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중국 홍군의 2만 5천리 長征이다. 장정의 도중인 1935년 1월, 중국 공산당은 貴州성 遵義에서 중앙 정치국 확대 회의를 열어, 毛澤東의 중국 공산당과 홍군 내에서의 지도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로부터, 중국 공산당은 걸출한 지도자를 얻게 되어 중국 혁명을 승리의 길로 이끌게 되었다. 1935년 10월, 중국 홍군은 1년간의 험난한 여정을 통해, 계속되는 역경을 뚫고, 陝西, 甘肅, 寧夏의 경계 지구에 성공적으로 도착하여, 그곳에 항일 혁명 근거지를 세웠다. 오래지 않아, 陝北, 延安은 전국 항일 혁명의 중심이 되었다.
1-4 항일 전쟁 (1937―1945년) 1937년 7월 7일, 중국 동북을 점령하고 다시 華北을 침공한 일본 침략군은 북경 부근에서 「蘆溝橋 사변」을 일으켜, 전면적으로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중국 군대는 저항을 진행했다. 이리하여 항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호소 하에, 전국의 민중들은 일치 단결하여 전면적인 항전을 벌여야 했다. 그 이전인 1936년 12월, 국내외를 놀라게 했던 「西安 사변」이 발생했고, 형세의 압력에 못이긴 蔣介石은 공산당과 공동 항일의 협의에 이르게 되고, 국공 양당은 제 2차 합작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蔣介石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화 민족이 망국의 위기에 처했을 때, 공산당을 적으로 돌렸다. 그는 「적극적으로 반공하고, 소극적으로 항일한다.(積極反共, 消極抗日)」는 방침을 세우고는, 소규모의 군대로 항일을 하고, 주력군으로는 공산당이 이끄는 군대와 항일 혁명 근거지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 결과, 항일의 주요 책임은 공산당이 이끄는 八路軍과 민중에게 맡겨졌다. 항일 전쟁의 마지막 한 해 동안, 공산당이 이끄는 군대와 민중들은 대부분의 일본 침략군과 거의 모든 국민당 군대를 물리쳤다.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전 중국 민중들은 많이 동원되어, 가장 광범위한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실현했다. 침략자와 그 꼭두각시들과의 전투 과정에서, 항일 무장 역량과 항일 혁명 근거지는 점점 발전되고 확대되었다. 중국 민중들은 8년간의 험난한 항전과 피땀어린 희생 끝에, 1945년 8월, 마침내 항일 전쟁의 승리를 거두었다.
1-5 제2차 국공내전 (1946―1949년) 항일 전쟁의 승리 후, 중국 공산당은 전국 민중과 함께, 국공 양당 및 각 당파가 참가하는 민주 연합 정부를 건립하고, 민주 개혁을 실행하고, 중국을 독립되고,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통일된, 부강한 신중국으로 만들자고 적극 주장했다. 하지만 蔣介石은 미국의 지지 하에, 표면적으로는 공산당과 평화적인 담판을 진행하면서,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내전을 준비하여, 항일의 승리의 결실을 독점하고, 국민당 정부의 독재 통치를 유지하려 하였다. 1946년 6월, 蔣介石은 그의 군대에게 공산당이 통치하는 공통구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중국에는 제2차 국공내전이 터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제2차 국공내전은 3년간 진행되었다. 시작 단계에서는 蔣介石의 군대가 미국 무기와 장비의 우세를 안고, 기세가 등등하였다. 하지만, 공산당의 영도 아래, 공통구와 국민당 통치구의 민중들의 지지 하에, 中國人民解放軍은 탁월한 전략 전술로, 오래지 않아 蔣介石 군대의 미친 듯한 공격을 쳐부수었다. 3년간의 전쟁을 거쳐, 중국 인민군은 국민당의 800만 군대를 무찔렀고, 蔣介石은 臺灣으로 도망감으로써, 대만과 몇몇 작은 섬들을 제외하고는 전 중국이 모두 공산당이 통치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中華人民共和國이 성립을 알렸고, 중국의 역사는 사회주의의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2. 중국당대사(1949년 10월―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서, 중국이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암울한 역사를 끝내고, 독립되고, 통일되며, 민주적이고, 번영하고, 부강한 사회주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하였다. 중국인들은 습관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을 「구중국」이라 하며, 그 이후를 「신중국」 이라고 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건립된 지 40년이 훨씬 넘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은 비록 얼마간의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신중국과 구중국을 비교해 보면, 일련의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났는데, 아래의 몇몇 방면에 잘 나타난다. 첫째, 진정한 민족 독립을 실현하여 중국인이 세계 무대에 당당히 발을 딛었다. 100여년 이래로 중국은 외국 열강의 온갖 침략과 치욕을 다 받고, 그들과 많은 불평등 조약을 강요당해, 주권이 독립되지 못하고, 영토는 분할되었으며, 경제는 약탈당했으니, 매우 비참한 운명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그러한 시대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고, 중국은 진정한 독립적이고 완전한 주권을 지닌 국가가 되었으며, 침범할 수 없는 민족의 존엄성을 지니고, 준엄하게 세계의 동방에 우뚝 서게 되었다. 둘째, 중국 근대사상 일찍이 없었던 국가 통일과 각 민족의 대단결을 이루어, 노동자 계급이 이끄는, 노농 연맹이 기초가 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시켰다. 모든 중국인들이 과거의 압박 받고, 노예화되고, 착취당하던 지위를 벗어 던지고,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 되었다. 셋째, 경제적으로 괄목할 만 한 성과를 거두어, 낙후된 농업 국가에서 초보적으로 번창하는 강대국으로 변모하였다. 공업 방면에서는 비교적 완정한 체계와 견실한 기초를 이루었다. 농업 방면에서는 12억에 달하는 인구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교통 운수업, 경공업, 상업, 대외 무역 등 기타 방면에서도 모두 크나큰 성과를 거두었다. 선진국과 비교해 볼 때, 중국의 경제는 비록 많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미 빈궁하고 낙후된 면모는 완전히 벗었으며, 종합 국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되었다. 넷째, 민중들의 생활 수준이 큰 폭으로 향상되었다. 1인당 연간 소비 수준이 건국 초기의 67元에서 1000여 元으로 향상되었다. 특히 최근 10여년 간, 도시 주민의 가정 생활이 점차 현대화되어, 컬러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의 보급률이 웬만한 나라의 수준에 이르렀다. 농촌 생활 수준은 더욱 크게 향상되었다. 중국인의 생활 상황은 이미 기아형에서 개도국형으로의 변화를 마쳤고, 이제 선진국형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다. 다섯째, 교육, 과학 기술, 문화, 위생, 체육 등의 사업이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구중국 시기에는 교육이 매우 낙후되어, 농촌의 문맹률이 80% 이상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15% 이하로 문맹률이 감소되었다. 과학 기술은 몇몇 분야에서 이미 세계 선진 수준에 이르렀다. 체육 방면에서는, 중국이 과거에는 「東亞病夫」로 불렸지만, 지금은 이미 체육 대국으로 변모했다. 체육 운동의 보급은 생활 수준의 향상과 더해져서, 중국인의 평균 수명을 35세에서 70세로 끌어올렸다. 여섯째, 국방의 방면에 있어서, 과거에는 힘이 약해서 줄곧 외국의 침략과 괴롭힘을 당했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로는, 강대한 군대와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국가의 안전과 독립이 보장되었다. 일곱째, 외교 방면에 있어서, 중국은 독립 자주의 평화 외교 정책을 취하여, 「평화 공존 5원칙(和平共處五原則)」의 기초 위에, 150여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200여 개의 국가 및 지구와 경제, 무역 문화 관계를 발전시켰다. 종합해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의 40여년간의 미증유의 진보는, 반식민지 반봉건 상태의 구중국의 비참한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실로 커다란 변화를 이룬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40여년의 역사는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 1단계는 1949년에서 1956년까지로, 정권을 공고히 하고, 사회주의 개조를 진행하고, 새로운 정치와 경제 제도를 세우는 단계이다. 정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제도를 만들고, 국가의 주권을 확립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많은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얻게 하고, 합작화를 이루었으며, 낙후되고 혼란하고 기형적으로 발전했던 자본주의 공상업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의 길을 걷게 하였다. 이 단계는 이후의 경제와 사회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 제 2단계는 1957년에서 1966년까지로, 사회주의 건설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던 10년간이다. 이 단계에는 전국 공업 고정 자산(불변 가격으로 계산)이 1956년에 비해 세 배로 성장했으며, 면사, 석탄, 발전량, 원유, 철강 및 기계 설비 등 주요 공업 생산품의 생산량이 모두 큰 성장을 보였다. 농업의 기초 건설과 기술 개량은 대규모 전개를 시작했다. 교육, 과학 기술, 문화 등도 비교적 큰 발전을 보여 국력이 눈에 띄게 증강되었다. 하지만, 경제 사업에서 얼마간 너무 서두른 탓으로, 「大躍進」과 「人民公社」화를 벌여, 현실성과 객관성을 잃어, 불필요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 이밖에도, 정치적으로 당내의 갈등과 사회의 갈등이 확대되어, 몇몇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견해가 손상을 입었다. 제 3단계는 1966년에서 1976년까지로, 文化大革命의 시기이다. 이 10년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래 가장 좌절과 손실이 컸던 시기이며, 그 원인은 「문화대혁명」이 잘못 시행된 데다가, 일단의 야심가, 음모가들의 농간이 더해져, 중국을 혼란에 빠지게 했고, 각 방면에서 막대한 파괴를 불러왔으며,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 4단계는 1976년이래, 특히 1978년 말 이래를 말하는데, 개혁 개방의 신시기이다. 1976년 10월, 중앙의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四人幇」이 타도되었다.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은 11기 3중전회(十一屆三中全會)를 열어, 문화대혁명의 착오를 바로잡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기본 노선을 제정했는데,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하고, 4개 기본 원칙을 견지하며, 개혁 개방을 견지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부터 중국은 고속 발전기로 접어들어, 10년간의 국민생산 총액이 지난 30년간의 그것을 초과했으며, 공농업 생산, 도시 건설, 교통 운수, 상업 유통, 대외 무역, 경제 특구, 과학 문화 등 각 방면에서 놀랄 만 한 변화를 이루었다. 지금, 중국은 금세기 말까지 경제를 네 배로 성장시킨다는 전략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고 있다. 구체적인 단계는 둘로 나뉘는데, 그 첫 단계는 1981년부터 1990년까지의 첫 10년으로, 국민 총생산액을 두 배로 늘리고, 두 번째 단계는 1991년부터 2000년까지의 10년으로, 이 때 다시 두 배로 늘리는 것이다. 첫 단계의 목표는 이미 앞당겨 완성되었고 지금은 두 번째 단계에서 노력하고 있다. 1993년 3월 개최된 중화인민공화국 제 8기 全國人民代表大會에서는 최근 중국 경제 발전의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원래 정했던 경제 발전 속도를 조정하여, 경제적으로 네 배 성장의 목표를 앞당겨 실현하기로 결정했다. 금세기 말에는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그다지 높지 않다 하더라도, 국가가 크기 때문에, 종합 국력은 지금보다 훨씬 강대해질 것이다.
3. 위대한 전환 (1976- 현재)
甘 肅 老 年 大 學
3-1 방황 중의 전진 4인방이 분쇄된 이후, 중국은 내버려두었던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다. 4인방의 악행을 철저히 폭로, 비판해야 했으며, 그들의 악영향을 제거해야 했고, 또한 무너진 경제와 문화교육사업을 정상 질서로 회복해야만 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른 것을 바로 잡고, 마르크스주의의 정확한 노선을 다시 확정하는 것이었다. 1976년 10월 18일 중공 중앙은 발표하여 통지하기를 王洪文, 張春橋, 江靑, 姚文元등 반당집단사건을 각급 당조직에 알렸다. 12월부터 계속해서 3건의 "4인방" 범죄자료를 제출하여 전국에서 "4인방"의 죄행을 폭로하였고 4인방 추종분자를 조사하는 운동을 계속하였다. 1977년 상반기 전국에 안정적인 정치국면이 조성되었다. 1978년 조사작업은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 1977년 7월 중공10기 3중전회는 북경에서 개최되었고, 전체회의는 "4인방"을 영원히 당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전체회의는 鄧小平의 모든 직무를 회복시켰다. 鄧小平은 10기 3중전회상에서 발표하기를 毛澤東 사상의 체계에 완전하고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하며, 또한 개별적인 단어에서 毛澤東 사상을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이렇게 해야만 毛澤東 사상을 분열시키거나, 왜곡하지 않으며 毛澤東 사상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鄧小平의 말은 華國鋒의 "兩個凡是"의 그릇된 관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華國鋒은 "4인방"을 축출하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올바른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화대혁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문화대혁명과 毛澤東 만년의 잘못된 관계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의 비준을 거쳐 1977년 2월 7일 《人民日報》, 《紅旗》,《解放軍報》 연합사설은 “무릇 毛주석이 내린 결책이면 우리는 굳게 지키며 모주석이 내린 지시를 우리는 끝까지 어김없이 따라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1977년 3월 당중앙공작회의에서 華國鋒은 “兩個凡是”를 거듭 천명하여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한다”는 등의 잘못된 방식을 견지하여 “鄧小平을 비판하고 右傾飜案風을 반격하는 것”은 바른 것이며, 1976년의 天安門 사건은 반혁명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1977영 8월, 중국공산당 제1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華國鋒은 정치보고에서 문화대혁명을 잘못된 이론, 정책과 구호를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긍정하였다. 대회는 華國鋒을 중공중앙주석으로 선출하고 섭劍英, 鄧小平, 李先念, 汪東興을 부주석으로 선출하였다. 1978년 2, 3월 기간동안 제 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華國鋒은 국무원을 대표하여 정부 업무를 보고하고, 1976년부터 1985년까지의 국민경제 발전 10년 계획을 제기하였다. 이 계획은 실사구시의 원칙을 위반하고, 편면적으로 고속화를 추구한 것이다. 華國鋒을 제기한 높은 지표는 근거가 결핍된 것으로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지질 탐색자료가 없는 상황아래 "10여개의 大慶이 있어야 한다." 고 제시한 것이다. 대회는 葉劍英을 인대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華國鋒을 국무원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鄧小平은 복권 이후 과학 교육 업무를 분담하였다. 1977년 8월의 과학교육 업무 좌담회에서 鄧小平은 "문예 흑선 독재론", "교육 흑선 독재론"을 뒤엎고, 건국이래 문학 교육 과학 연구 전선의 주도 방면은 홍선이었고, 절대 다수의 지식인은 자각적으로 스스로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하였다고 지적하며, 정신노동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하자고 호소하였다. 1978년 3월 전국 과학 대회가 북경에서 열렸다. 鄧小平은 연설을 통하여 과학 기술은 생산력이며, 4개 현대화의 관건은 과학기술의 현대화임을 강조하고, 중국 지식인의 절대 다수가 이미 무산계급의 일부분으로, 당의 의존력량이라고 지적하였다. 1977년 말에서 1978년 초 전국 대학은 또 다시 통일 시험을 채용하여 우수생을 선발하여 입학시키는 방법으로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중국공산당 제 11차 전국대표대회와 제 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는 華國鋒의 오류의 영향으로 수년간의 좌경적 오류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했다. 이것은 당 내외에 많은 불만을 자아냈고 그래서 진리 기준 문제에 관한 대토론이 한바탕 벌어졌다. 1978년 5월 1일 《光明日報》에 특약초청 평론원이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이 문장은 어떠한 이론이라도 끊임없이 실천의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4인방"과 그 조직은 이미 타도되었지만 "4인방"이 사람들에게 더한 정신적 속박은 완전히 벗겨지지 못하였다. "4인방"이 사람들의 사상을 속박한 "금지구역"에 대해 용감하게 언급하고자 했고 옳고 그름을 명확히 밝히고자 했다. 이것은 "兩個凡是"에 대해 이론상에서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신화사는 그 날 이 문장을 배포하고 전국 신문에서는 뒤이어 옮겨 실어 강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한바탕 대토론이 열렬하게 전개되었다. 鄧小平은 이 토론회를 지도하고 지지하면서 林彪와 "4인방"의 남은 악영향을 제거하고 정도를 회복하여야 하며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 우리들의 사상을 대해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8년 12월 당의 중앙 공작회의에서 鄧小平은 "사상해방, 실사구시, 단결일치로 앞을 내다보자"라는 방침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실제로 제 11기 3중전회를 위한 기본 지도 사상을 제시한 것이었다.
3-2 역사적인 위대한 전환 중국 공산당 제11차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이하 3중전회)는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北京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장기간의 좌경 오류를 근본적으로 바로잡고 정확한 사상노선을 다시 확립한 건국이래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의를 지닌 위대한 전환이다. 3중전회는 진리 기준 문제에 대한 논쟁을 높이 평가하였고, "두 가지 무릇"이라는 잘못된 방침을 철저히 비판하였으며, 역사적·과학적으로 毛澤東의 위대한 공적을 인식해야 하며 완벽하고 정확히 毛澤東 사상의 과학체계를 파악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毛澤東 사상이라는 일반적 이론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구체적 실천을 결합하며 동시에 새로운 역사 조건하에서 더욱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3중전회에서는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하는"이 사회주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좌경적인 잘못된 방침을 단호히 포기하고 당과 국가의 업무 중심을 경제건설로 옮기었다. 이것은 정치 노선에서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3중전회에서는 현재 반드시 농업을 먼저 향상시켜야 한다고 인식했고, 일부 사람부터 먼저 부유하게 하는 것을 허락하는 정책을 제출하였고, 또한 대외개방의 방침과 과학과 교육을 중시하는 방침을 내 놓았다. 3중전회는 鄧小平을 핵심으로 하는 중앙 집단 지도 체제를 형성했다. 3중전회는 陳雲을 중앙부주석으로 추가 선발하였고 선거를 통해 陳雲을 제1서기로 하는 中央紀律檢査委員會를 만들었다. 全會에서는 "文化大革命"중 발생한 몇 가지 중대 정치사건 및 "文化大革命" 이전에 남겨진 몇몇 역사적 문제를 토론하였으며, '反擊右傾번案風"과 1976년 天安門 사건 처리에 관련된 문건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고, 과거 彭德懷, 陶鑄, 薄一波, 楊尙昆 등에 대해 내린 잘못된 결론들을 바로잡았다. 11차 3중전회 이후 사업 중심의 전이과정 중에서 당 중앙은 개혁개방을 실행하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으며, 혼란을 바로 잡는 과정 중에 생긴 잘못된 사조에 대해 반드시 네 가지 기본 원칙을 지킬 것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1979년 3월, 등소평은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하고, 인민민주독재를 견지하고,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견지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毛澤東 사상은 네 가지 현대화를 실현하는 근본적 전제임을 견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 중앙은 중대한 역사의 잘잘못에 대하여 진지한 청산을 하였고, 아울러 각 방면의 사회관계를 전면적으로 조정하였다. 실사구시, 잘못은 반드시 고친다는 방침에 따라 일련의 조치를 취하고, 잘못처리된 사건도 바로잡았다. 1980년 2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5중전회에서는 劉少奇의 억울함을 벗고 명예를 회복시키자는 결의를 통과시켜 건국이래 가장 큰 오심사건을 바로잡았다. 문화대혁명 이전의 중요한 안건인 "胡風반혁명집단"을 포함하여 잘못 분류한 우파분자 ,"우경기회주의분자"모두 평반되었다. 단결과 진보적 요소를 모두 동원하기 위해서 1979년 1월부터는 소위 지주, 부농이라는 딱지를 뗐고, 그들의 자녀의 개인 신분도 일률적으로 사회구성원으로 정하였다. 국민당의 봉기와 복귀한 구성원들에 대한 적절한 정책을 위하여 구금 중이던 원래 국민당 정권의 군특별인원을 석방시켰다. 1979년 11월부터는 소행상, 수공업자들의 노동자 신분이 회복되었고, 원래 공상업자의 신분도 일률적으로 간부, 노동자로 바뀌었다. "문화대혁명"동안에 박해받았던 각 민주당파가 모두 그 활동을 재기하고 조직을 발전시켜, 국가정치생활에서 다시 경제건설과 문화교육과학기술 전선에 있어 역할을 하게 되었다. 鄧小平은 지적하길 새로운 역사의 시기에 있어 통일전선은 여전히 하나의 중요한 도구이고 이는 감해져야하는 게 아니라 강화되어야하고, 축소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학대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당과 정부는 지식인 정책확정에 신경을 기울이고 그들의 업무조건과 생활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민족 정책, 종교 정책을 충실히 세워야 할 것이다. 해외교민에 대한 사무정책을 표명하고 교포들의 애국, 애향의 열정을 치하하며 그들의 조국과 고향의 건설 공헌을 격려하였다. 1981년 6월 중국 공산당은 제 11기 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전면적으로 채택하여 '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독재하의 혁명지속'의 이론을 부정하고, 동시에 毛澤東과 毛澤東사상을 부정하는 잘못된 사조 또한 근본적으로 부정하였으며, 毛澤東의 역사적인 지위를 보호하고, 毛澤東 사상의 지도적인 작용을 긍정했다. 모든 당과 전 인민의 사상을 통일하는데 대한 결의는 거대한 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전국대회는 華國鋒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직을 사직하고자하는 요청에 동의하고, 胡耀邦을 주석으로 선출했다. 華國鋒의 국무원총리직도 이미 1980년 5기 전국 인민 대표대회 3차 회의 때에 취소되었고, 趙紫陽이 총리를 맡도록 결정되었다. 1979년 4월에 열린 당의 중앙공작회의에서는 국민경제의 큰 비율관계가 심각하게 균형을 잃은 당시의 형편에 초점을 맞추어 3년의 기간동안 '조정, 개혁, 정돈, 제고'로 일컬어지는 "8字 방침"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조정'을 중심으로 한 8자 방침의 철저한 집행은 장기적으로 존재하던 자본 축적률이 과도하게 높고, 농업과 경공업이 심각하게 낙후된 현상에 근본적인 개혁을 가져왔다. 개혁은 농촌에서 큰 진전을 얻었는데, 가정 생산 청부 책임제가 일반적으로 시행되어 농민의 노동열정을 고취시켜 농업생산 발전이 특히 빨라지고, 농민의 수입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1982년 전국농민의 개인당 순수입은 270원으로 1978년과 비교해 배로 증가했다.
3-3 개혁개방의 전면전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국민경제조정의 기본이 완성된 기초 위에, 1982년 9월 1일부터 11일까지 당의 제 12차 전국 대표회의가 열려서,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진리와 중국의 구체적 현실을 결합해서 독자적인 노선을 밟아 중국의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의 사상을 건설하고, 두 단계로 나누어서 금세기 말에는 국민생산총생산액을 4배로 늘리는 목표를 실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덧붙여, 3번째 단계로 다음세기 중엽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전략을 기본적으로 실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2기 1차 중국전국인민대회에서 胡耀邦을 총서기로 선출하고, 鄧小平을 중국 공산당 중앙 자문위원회 주임으로 선출했다. 1982년 11월 26일부터 12월 10일까지 제 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 5차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전면적인 전개를 위한 기초를 다지기 위해, 중국의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사상의 새 헌법을 개정 통과시켰고, 제 6차 5개년 계획(1981-1985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이 비준되었다. 1983년 6월 6일부터 21일까지 제 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 1차 회의가 북경에서 거행되었다. 회의는 새 헌법에 따라 국가주석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李先念을 국가주석으로 선출했으며 彭眞을 인민대표대회상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趙紫陽은 총리로 선출되었다. 또한 새로운 헌법에 따라 국가 중앙군사위원회의 규정을 정하고, 鄧小平을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이후, 개혁개방이 전면적으로 시작되고, 농촌에서 도시까지, 경제분야에서 타 분야로, 대내적으로 생활의 향상에서 대외적 개방까지, 커다란 물결의 역사조류를 형성했다. 향진기업이 새롭게 등장하고, 농촌의 부와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다. 도시를 중점적으로 경제체제개혁을 진행하고, 상품경제를 발전시키는 계획의 요구에 신체제에 맞게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지시적 계획을 감수하고, 기업의 자주권을 확대하고, 집체와 개체의 사영의 경제와 "3가지 기업"(중외합자, 중외합작, 외국독자기업)이 대량으로 나타나고, 도시 경제 생활에서는 전에 없던 활기를 띤 국면이 나타났다. 과학기술체제개혁과 교육체제개혁이 의사일정에 올랐다. 당중앙도 더 나아가 정치체제개혁의 목표와 임무를 제출했다. 대외적 개방방면에서는 80년대에 일의 진행순서를 채택했다. 1980년에 深수, 珠海, 汕頭, 厦門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했다. 1984년에 잇달아 天津, 上海, 福州, 廣州등 14개의 연안도시를 개방했다. 1985년에는 長江삼각주, 珠江삼각주, 민東南지구, 渤海灣지구를 경제개방구로 열었다. 이러한 발걸음들로 2억 인구가 있는 연해지역 경제를 빠른 속도로 발전시켜 중국의 폐쇄반폐쇄경제로부터 국제교환을 이용하는개방형경제로 전환시켰다. 1985년 말, "六五" 계획의 임무와 목표는 이미 앞당겨져 완성에 도달한 듯 했다. 국민총생산액은 매년 평균 10%씩 성장했고, "一五"계획 이외의 기타 5개년 계획 때보다 더 높았다. 1985년 9월, 중국전국대표대회는 "七五"계획(1986-1990)의 건의에 관해 통과시켰다. 국무원은 그 건의에 근거해서 계획초안을 편성했다. 1986년 4월, 6기 전국인대 4차 회의에서 집행을 비준했다. 그 계획은 국민총생산액이 매년 평균 7.5% 성장할 것과 5년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 이내에 중국 특색을 가진 신형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기초를 다지는데 힘쓸 것을 규정했다. 개혁과 건설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서는 유력한 사상과 정치보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중앙은 일련의 "두 손으로 움켜잡는" 전략방침을 내놓았는데, 한 손으로는 개혁개방을 움켜잡으면서 한 손으로는 범죄를 예방하고, 한 손으로는 경제건설을 움켜잡으면서 한 손으로는 민주법제를 실현하고, 한 손으로는 물질문명을 이룩하면서 한 손으로는 정신문명을 이룩할 것 을 강조했다. 1986년 9월, 중국 공산당 12기 6중전회에서는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 지도방침에 관한 결의》를 내놓았다. 鄧小平은 전체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진행 과정 중에는 자산계급 자유화의 교육과 투쟁에 관한 반대를 진행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자산계급 자유화에 반대하는 이 원칙적인 문제는, 당서기인 胡耀邦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86년 말 많은 도시로 파급된 학생 운동이 일어났고, 다양한 사상을 지닌 자산계급 자유화가 범람하였다. 1987년 1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회의가 擴大에서 열렸다. 胡耀邦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회의는 그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趙紫陽을 총서기 서리로 선출하였다. (이후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2기 7중전회에서 확정되었다.) 1987년 10월 25일에서 11월 1일까지, 중국공산당 제13차 전국 대표 대회가 北京에서 개최되었다. 대회는 비교적 체계적으로 중국사회주의 초기단계의 이론을 논의하고,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 초기단계에 있다고 단언하였다. 향후 100년 이상은 이러한 사회주의 초기단계에 있을 것이며, 모든 정책은 반드시 이러한 기본국정에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현실과 동떨어져서는 안되며, 이 단계를 초월해서도 안 된다. 대회는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네 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하고, 개혁개방의 기본원칙을 견지하는 바, 이를 "하나의 중심, 두개의 기본원칙(一 個中心, 兩個基本點)"로 명시하고, 진행에 있어 모든 면을 설명하였다. 13기 1중전회에서 趙紫陽이 당서기로 선출되었다. 鄧小平은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위원회를 퇴임하였다. 그러나 정치국 상임위는 전회에, 중대사항은 변함없이 鄧小平의 지도를 받을 것을 건의하였다. 1988년 3월부터 4월까지, 7기 전국인민대표회의 제1차 회의가 열렸다. 대표회의에서 楊尙昆을 국가주석으로, 萬里를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했으며, 李鵬을 국무원 총리로 결정했으며, 鄧小平을 중앙군사 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중국의 경제는 1984년부터 1988년까지의 급속한 발전기간을 거치면서, 동시에 여러 문제들이 나타났다. 주요 문제는 경제 과열이다. 사회 총 수요가 사회 총 공급을 크게 초과하였고, 중복건설이 비교적 심각했으며, 인플레이션이 격화되고, 물가 파동이 지나치게 커졌다. 1988년 소매 물가지수가 지난해 보다 18.5%올랐고, 하반기에는 전국적으로 사재기 풍조가 발생했다. 같은 해 9월, 중국 공산당 13기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일정기간 동안은 경제 환경을 통치관리하며, 경제질서를 정돈하여, 이로써 개혁과 건설이 더 잘 추진함에 이롭게 하였다. 1989年 봄과 여름 사이에서 한차례 정치 분쟁이 발생했다. 北京에서 中南海의 新華門에 충격을 가하고, 天安門 광장을 점령하며, 또한 때리고 부수고 탈취하고 불사르는 등의 불법행위가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당과 정부는 국민에게 의지하여, 정치적 태도를 분명하게 동란을 반대했고, 北京에서 발생한 이런 정치 분쟁을 수습했다. 이와 동시에 '당의 기본 노선과 13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결정된 책략은 올바른 것이며, 결코 이런 분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밝혔다. 1989년 6월 하순에 중국 제 13기 4중전회가 개최되었다. 趙紫陽은 天安門 사건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킨 잘못을 저질러, 4중 전회에서는 그의 총서기 등의 직무를 박탈할 것을 결정하였다. 江澤民이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江澤民, 李鵬, 喬石, 姚依林, 宋平, 李瑞還 여섯 명으로 조직되었다. 새로운 중국중앙지도자단체는 전면적으로 당의 기본 방침을 고수하고, 계속해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잡으며 "一手比較硬 , 一手比較軟 "의 현상을 바로잡으려 노력했고, 정치사업과 당의 건설사업 사상을 강화하였다.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변하는 상황아래, 이성적인 관찰과 침착하게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계속해서 우리들 자신의 업무를 잘 처리하는데 주의력을 집중하고, 연이어 청렴한(깨끗한)정치 건설을 강화에 관한 결정, 한 걸음 더 나아가 통치질서를 바로잡고 심화하는 개혁에 관한 결정, 당내 동료와 인민군중의 밀접한 연계 강화에 관한 결정, 上海 浦東의 개발·개방 정책에 관한 결정, '八五' 계획의 건의에 관한 건의, 국영 대·중형 기업을 잘 운영하기 위한 결정에 관한 결정, 한 걸음 나아가 농업과 농촌사업을 강화하데 관한 결정 등등을 만들어 내었다. 이런 중대한 정책결정은 모두 완전히 정확한 것이다. "八五"계획은 대대적으로 경제효율과 경제구조를 우수화 시키려고 하는 기초상에서 국민총생산은 매년 평균 6%정도 성장하였다. (7·5계획은 매년 7.8%) 동시에 제출된 십년계획은 고정가격으로 계산되어 금세기 말에는 1980년에 비해 4배 성장할 것을 계획하니, 의식이 풍족한 생활에서부터 중산층 정도의 안정된 생활을 계획하게 되었다. 1991년 3월부터 4월까지 개최된 7기 전국인민대표회의 4차 회의는 국무원이 제정한 십년계획과 "八五" 계획을 비준하고 실시하게 하였다. 90년대 중국역사상 중대한 사건은 홍콩과 마카오 반환문제이다. 1984년 12월 19일 중·영 쌍방은 중국 정부가 1997년 7월 1일 홍콩에 대하여 주권을 회복하여 행사하기로 합의하였다. 1987년 4월 13일 중국 포르투갈 쌍방은 중국이 1999년 12월 20일 마카오의 주권이 중국이 접수하기로 합의하였다. 중국통일 문제에서 중국공산당과 鄧小平은 80년대에 "1개국가, 2개체제의 창조적인 원칙을 발표하였다. 1개의 중국 전제하에서, 국가의 주체는 사회주의 제도를 견지하고, 홍콩, 마카오, 臺灣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자본주의 체제를 장기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시키니, 이 원칙에 따라 조국 평화통일의 큰 대업을 추진시켜 나갔다. 1992년 초, 鄧小平은 남방을 시찰하면서 중요내용을 발표하였는데, 기본노선은 1백년간 유지되어야 하며, 동요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추구가 한층 더 자유로워지니, 개혁개방의 부담은 한층 더 커지게 되었고, 경제건설속도의 폭도 점차 더 커지니 그 기회를 상실할 수 없는 것이다. 3월 중공 중앙정치국은 회의를 개회하여 鄧小平동지의 중요강화를 완전히 찬성하였다. 곧이어, 중앙과 국무원은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의 일련의 결정을 더욱 빨리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992년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江澤民은 보고에서 제11기 3중전회 이후의 14년간 위대한 업적을 회고하였는데, 중국특색사회주의이론의 주요내용을 총결하였고 또한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 보폭을 더욱 빨리 진행시킬 것을 제출하였다. 대회는 유리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역량을 경제건설에 집중하여 국민경제가 효율을 강구하는 전제하에서 비교적 높은 성장속도를 달성키 위해 힘을 썼으니, 8∼9%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것은 완전히 정확하고 가능한 것이었다. 江澤民은 보고에서 중국 경제체제 개혁의 목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하는 것이라 확정하니 이것은 중국특색 사회주의 이론의 풍부함과 발전이라고 하였다. 10월 19일 제14기 1차 중앙 위원회 전체회의는 江澤民을 총서기로 선출하고, 정치국 위원으로 江澤民, 李鵬, 喬石,李環, 朱華基, 劉鎔淸, 胡錦濤를 선출하였다. 1992년 중국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