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의 중국 역사- 격동의50년 中華人民共和國 -
중문학과
9501314 박재영
1. 준비
전쟁 이전까지 국공합작에 의해 항일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던 공산당과 국민당은 겉으로는 日本과의 싸움에 온힘을 집중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안으로는 中國에서의 패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항일전쟁 이전부터 전쟁의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日本 패망 이후 서로 다른 새로운 中國에의 설계를 가지고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두 세력의 싸움은 누가 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느냐가 그 관건이었고,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민심을 얻어내어 군사적인 우위에 있던 국민당을 몰아내게 된다. 결국 오랜 기간의 국·공 내전은 국민당을 臺灣으로 철수하게 만들어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가고, 1949년 10월 1일 대륙에는 中華人民共和國이 성립된다. 하지만, 이때 당은 아직 전 대륙을 공산화하지 못한 채 건국을 선포한 것이었고, 中華人民共和國도 역대의 왕조와 마찬가지로 中國을 통일하여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2. 출발
2-1 제1기 中華人民共和國의 성립(1949∼1957) 성립당시 中國은 국공내전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어 생산설비가 악화되고 기계공업에 비해 농·수공업이 많은 상업구조의 기형성을 띠고 있었다. 또한 당원의 구성은 노동자가 3%에 불과했고, 70%이상이 농민이어서 농민중심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구도를 그렸다. 中國은 먼저 1950년 6월에 '토지개혁법'을 공포하여 농촌지역과 농업생산에서 지주계급을 없애기 위한 토지개혁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도시의 당 간부나 지식인으로 구성된 토지개혁공작대를 파견하여 각지에서 빈농, 소작농을 농민협회로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주를 적발했다. 이 토지개혁으로 예전의 빈농, 소작농도 토지소유자가 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중농화가 진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으로 가담한 中國은 큰 부담과 희생을 치렀고, 美國은 그해 12월 대중국경제봉쇄를 실시하였다. 서방측 산업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러운 통상관계를 강요당하였는데 中國은 이 위기를 다양한 정치·경제적 캠페인을 통해 벗어나려 하였다. 이른바 三反運動1)과 五反運動2)이 그것인데 三反運動은 당원·국가간부를 대상으로 한 整黨運動이며, 五反運動은 사영상공업자를 겨냥한 것으로 이것을 통해 中國은 본격적인 사회주의 개조로의 길을 걷게 된다. 1952년 국민경제부흥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하여 '5개년 계획'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의 中國은 향소(向蘇)일변도 정책으로 蘇聯의 사회주의를 모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자립적인 민족경제를 건설'하고, '국가의 안전보장의 기초로서 중공업기반을 확립하여 서방 공업국을 따라잡고', '생산력 발전이라는 물질적 기초에 입각해서 국민경제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성'시키는 세 가지를 목적으로 하는 이 5개년 계획이 바로 蘇聯의 시스템을 모방한 계획경제 제도와 조직이었다. 이 '5개년 계획'의 발전 속도는 예상을 크게 웃돌아 최종 년도인 57년의 목표를 초과했고, 공업생산 중 근대부문, 기계공업의 비중이 증대했고 더욱이 사회주의 공업화 기지로서의 국영부문 점유율이 증가했다. 또한 농업집단화와 사영상공업의 공사합영화가 이루어지는 등 사회주의 개조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고도성장과 노동자의 증가 등으로 식량과 소비재의 부족, 물가상승 등의 문제를 야기 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蘇聯만 쳐다보고 蘇聯의 경험을 배우자고 전개해 왔던 사회주의 개조였는데, 56년 2월 蘇聯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스탈린 숭배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공산당은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아래 蘇聯방식의 계획 경제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中國이 위치한 환경과 조건 아래서 더욱 급속한 발전을 도모하려하였다. 이시기부터 중국은 독자적인 공산주의 사회 건설의 길로 나가게 된다. 이제 毛澤東은 중국의 독자적인 건설노선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는 먼저 시기적인 면을 고려하여 공산당의 지배권이 유지되는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 점들을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여, 인민 내부에서는 비판을 통한 새로운 단결을, 과학과 문화에서는 百花齊放·百家爭鳴을,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가이익·집단이익·개인이익을 아울러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정국은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이 기회를 이용한 지식인들의 거센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되고 당은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결국 사태는 급전하여 1957년 6월부터 '反右派鬪爭'이 전국에서 잇따라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건국 이래의 중국 정치는 전환기를 맞게 되고, 지식인을 배제한 공산당 일당지배의 강화가 시도된다. 일당지배의 강화는 毛澤東 개인숭배의 강화로 이어져, 그의 카리스마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2-2 제2기 大躍進運動의 전개(1957∼1966) 소련의 영향을 벗어난 제2차 '5개년 계획'은 1차의 성공에 힘입어 다소 급진적인 경향으로 흐른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란 기치아래 시작된 '大躍進運動3)'이다. 농업집단화의 강화가 사회주의화를 가속화시킨다는 인식 하에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1958년 8월부터 人民公司를 확산시켜 나갔다. 人民公司는 鄕이나 2000여 세대를 기반으로 한 합작사가 결합하여 형성되었다. 토지, 설비, 주거, 가축 등은 공사 구성원의 공동 재산이었으며 이전의 어떠한 사유재산도 다른 이권이나 보상 없이 포기되었다. 그것은 또한, 농업, 공업, 상업, 교육, 군사의 기능을 겸하고 있어 다용성을 갖춘 사회조직의 기본단위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8월경부터는 그 속도가 빨라져 '공산주의 실현이 임박해 왔다' 는 분위기 속에 생산 목표의 배증 내지 조기 달성이 각 부문에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공업제품에서 식량에 이르는 기본건설 투자는 잇따른 대증산운동에 의하여 급속히 팽창하고 경제는 과열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노동력 뿐 아니라 석탄 생산과 그 수송, 그리고 전력의 공급마저 달리는 등 국민경제 각 방면에서 병목현상이 나타났다. 파탄은 제일 먼저 농업 면에서 드러났는데, 노동력의 혹사, 과도한 식량 증산 운동에 따른 자연자원의 황폐, 농민의 생산의욕 저하라는 악조건과 맞물려 계속된 자연재해는 각지에 식량부족에 따른 기아상태를 발생시켰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앞에 두고 1959년 7월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彭德懷는 大躍進運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毛澤東의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다시 경제의 실태를 고려하지 않은 고도 성장의 추구에 가속이 가해졌으며 이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소련의 대중원조마저 중단되었고, 중국 공산당은 60년6월부터 8월에 걸쳐 大躍進 정책을 포기, 경제조정 정책으로의 이행을 결정하였다. 1961년 경제조정기로 이행해서는 국민경제의 균형회복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당면과제는 식량위기 대책이었으며. 이 때문에 도시인구의 강제 분산이라는 과감한 정책이 단행되었다. 식량 증산 대책으로 농업 투자가 대폭 증가되었고, 人民公司에 축소 조치가 내려졌다. 1962년 9월 경제 조정기의 정치, 경제 기본노선을 내세운 회의가 열려 '농업을 기초로 해서 공업을 조정해 나간다' 는 경제 정책을 세웠다. 그러나. 毛澤東은 경제 정책면에서는 人民公司의 정돈과 온건노선을 용인하면서도 정치면에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농업의 大寨, 공업의 大慶油田4)을 공산주의의 바람직한 모델로 삼아 거기에서 배우는 정치캠페인을 실시했으며, 농촌에서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집단재산의 횡령 등이 횡행하여 농촌의 당과 행정기구의 지도권이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에 의거하여 四淸運動5)을 돌파구로 해서 농촌지도체제의 재건을 겨냥한 것이었다. 1965년 이 운동은 농촌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인 사상교육 운동, 整風 운동으로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구체적인 경제정책에까지 비판이 미치게 되었다.
2-3 제3기 文化大革命의 대혼란(1966∼1976) 1966년∼76년까지의 10년간 중화 인민공화국은 건국이래 미증유의 대혼란을 겪었다. 오늘에 와서는 '동란의 10년'이라고 부르는 '프롤레타리아 文化大革命(이후 文革)'이 그것이다. 文革은 중국공산당에 의한 건국 15년의 정치·경제·문화·사상 등 모든 경영의 총결산으로 발발한 것이며 毛澤東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큰 사건이다. 毛澤東은 '大躍進' 실패의 책임을 물어 제1선에서 물러선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실권이나 권위마저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上海를 근거지로 그의 부인 江靑·張春橋·姚文元·王洪文등을 이용하여 권력 탈취를 노리게 된다. 毛澤東은 '개혁파가 주장하던 수정주의를 방지하고 중국이 자본주의로 변질하는 것을 막는 것'을 文革의 표면상의 이유로 내세우게 되는데, 그는 사회주의 안에서도 계급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사이의 '계급투쟁도 끊임없이 발생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또 그 계급투쟁이 확대되어 착취계급이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폭력으로 타도하는 혁명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그의 이른바 '연속혁명·계속혁명론'이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계급도 계급투쟁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혁명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수정주의인 것이다. 1967년 8월 제8기 11중앙위원회전체회의가 개최되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나오게 되고, 바로 18일 天安門광장에서 최초로 100만인 집회가 열려 毛澤東이 처음으로 紅衛兵과 직접 접견하였으며, 이후 8차례나 되는 天安門 접견을 통해 毛澤東은 대중에게 직접 실권파 타도를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紅衛兵운동이 文革의 중심, 추진력이 되었다. 紅衛兵운동은 더없이 극렬했다. 취직·결혼·주택·진학문제 등이나 간부 자제의 차별적 우대 등 생활상의 다양한 불평불만으로 울적해 있던 데다가 조정정책이 그것을 확실히 해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관료주의와 신분계층을 고정화하려 하고 있다고 느낀 젊은이들은 毛澤東을 지지하며, 毛澤東의 명령으로 움직이겠다고 말하며 궐기한 것이다. 그들은 毛澤東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할 여유도 갖지 않은 채 해방감에 취해 거의 모든 지도자를 '실권파(實權派)'라고 규탄하며 지도조직을 무시하고 파괴했다. 폭력과 무정부상태가 이어지다가 최종적으로 탈권투쟁의 목표였던 劉少奇를 당에서 영구 추방하면서 어느 정도 혼란한 상태는 진정되어갔다. 그러나 국내재건을 위해 실무능력이 있는 예전 간부의 복귀를 추진했던 周恩來와 그의 추천으로 다시 복귀된 鄧小平 등의 실무관료파와, 文革을 이끌던 4인방과의 대립 무드가 조성된다. 4인방과 이른바 走資派6)로 몰린 周恩來 등과의 치열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76년 1월 8일 周恩來가 사망함으로 그 화살이 모두 鄧小平에게 집중된다. 이와 같은 긴박한 정세 속에서 4월 4일 淸明節, 사망한 周恩來를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天安門광장에 모여들었다. 文革파는 이것을 자신들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하고 나아가 이들의 배후에는 鄧小平이 있다고 억측해 광장의 인민들을 무력 진압한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天安門사건' 이다. 이후 전국적으로 天安門광장의 반혁명 정치사건과 연관된 鄧小平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鄧小平은 두 번째로 실각되고, 文革파의 천하가 온 듯했다. 그러나 최대의 의지처인 毛澤東이 9월 9일 사망하게되자 4인방의 권력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4인방은 끝까지 毛澤東의 위엄으로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제2인자로 있던 華國鋒에 의해 체포당한다.
2-4 제4기 중국의 재건과 개혁·개방(1976∼ ) 이제 중국은 文革의 10년의 대동란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 시비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당은 전적으로 4인방을 당권 찬탈과 국가 분열이라는 죄목으로 숙청하게 된다. 그러나, 華國鋒은 근본적으로 文革을 부정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그의 사상은 毛澤東의 좌적인 착오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이후 文革에 대한 꾸준한 반성은 결국 毛澤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이는 毛澤東의 권위를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華國鋒의 권력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華國鋒은 78년 鄧小平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된다. 권력을 이양 받은 鄧小平은 부강한 중국 건설에 그 목표를 두고, 大躍進과 文革등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게 된다. 바로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중국적인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건설'에의 첫발을 내디딘다. 먼저 대외개방의 일환으로 연해의 4개 도시7)를 경제특구로 만들어 외국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농촌에서는 인민공사를 폐지하고 생산 책임제를 실시한다. 도시에서도 기업의 자주권을 조금 확대시키게 된다. 당은 이전에 소멸시킨 개체경제가 사회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민중 생활에 편리함을 준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유제를 조금씩 용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외 개방정책을 시작한 후 10여년 중국의 경제는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완고한 사회주의 체제에 묶여있던 중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고, 또한 사유제 인정은 배금주의적 풍토와 빈부격차, 인플레이션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전까지 억압당해왔던 지식인들이 대외개방으로 서방의 사조를 접하게 되고, 목소리를 조금 높일 수 있게 되자,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를 하게 된다. 결국 정치적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만으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고, 1989년 胡耀邦의 갑작스런 사망을 도화선으로 제2차 天安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시위활동에 들어간 학생들과 시민들은 언론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대적인 농성을 벌이게 되나, 6월 4일 군대의 강압적인 진압으로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중국은 보수파가 당권과 정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와해되어 가는 속에서도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게 되고, 또한 이때부터 서서히 江澤民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당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97년 鄧小平을 이어 국가 주석의 자리에 오른 江澤民은 등소평이 쌓아놓은 경제발전의 업적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리고, 江澤民은 鄧小平의 놀라운 경제 성장에 대한 부담과 그로 인한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도 함께 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정권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얻기 위해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을 강조하여 빈부격차등의 사회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江澤民이 주장하는 개혁개방의 견지와 사회주의 정신의 고수는 香港을 반환 받음과 함께 1국 2체제의 새로운 실험으로 들어선다.
3. O.K.여기까지
中華人民共和國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심한 좌·우 파동을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격동의 역사를 지나 현대의 中國은 사회주의의 견지와 시장경제의 도입이라는 커다란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체재로 그들이 소위 말하는 사회주의 현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중국학계에서는 이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신권위주의·신보수주의라는 개발독재모델8)을 참고하여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중국은 이러한 기조 위에서 상당한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경제 발전에 매진하고 있다. 현대화가 전통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사상가치에서 현대적인 기능으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이라면, 중국의 현대화는 경제적인 면만 고려하여 이미 내재적인 문제 발생의 소지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의 견지에 대한 세계 여러 의견은 분분하지만, 정작 중국은 의연히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제 1국 2체제의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참고 자료☜ 《20세기
중국사》 히메다 미쓰요시 외 지음, 김순호 옮김 (서울; 돌베개, 1995 ) 《정통 중국 현대사》 중국 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 편, 허원 옮김 (서울; 사계절, 1990) 《중국 당대 40년사(1949∼1989)》 신승하 지음 (서울; 고려원, 1993) 《중국의 개혁 개방사》 張琢 지음, 오재환 편역 (서울; 신서원, 1996) 《한 권으로 이해하는 中國》 강준영·전병곤·지세화 지음 (서울; 지영사, 1997) 《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중국사》조관희 지음 (서울; 청아출판사, 1998) 《중국사 100장면》 안정애·양정현 지음 (서울; 가람기획,1993) 《중공 1949∼1976》 르 바르비에 외 지음, 공기두 역 (서울; 까치, 1990) 《중화인민공화국》 우노 시게아키 외 지음, 이재선 옮김 (서울; 학민사, 1988) 《12억이 사는 나라》 김종현 지음 (부산; 늘함께, 1998)
주 1) 독직, 낭비, 관료주의에 반대한다. 2) 뇌물, 탈세, 국유자산의 竊取·私取, 필요한 일의 절차누락·원재료 속임수, 국가 경제 정보의 竊取에 반대한다. 3) 당시 大躍進이라는 것은 1958년 수립된 전체 정책의 기초인 三面紅旗 정책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三面紅旗 정책은 총노선(군중노선), 인민공사, 大躍進運動 세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그 내부의 大躍進運動은 농업중심의 개혁을 의미하는 좁은 개념이다. 4) 大寨란 山西省 昔陽縣 大寨大隊를 말하며 陳永貴를 리더로 하여 빈곤한 산촌 지역에서 농업발전을 실현했다. 大慶이란 1960년대 黑龍江省 서남부에서 개발된 유전으로 중국의 석유 자급화에 기여했다. 모두 다 각고분투, 자력갱생, 집단주의 자기희생, 공산주의사상의 모델이 되었다. 5) 1963년 5월부터 시작된 것으로 당초에는 농촌집단경제에서 장부·재고·재산·임금 점수의 네 가지를 점검,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 후 1965년부터는 정치·경제·조직·사상의 네 가지를 정화하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6)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사람들. 7) 深수, 廈門, 珠海, 汕頭 8) 아시아의 네 마리용 韓國, 臺灣, 香港, 싱가폴의 발전모델. 東亞모델이라고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