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 시기 서방문화의 수용
김 혜 준
1840년에서 1842년까지의 鴉片戰爭은 中西文化의 본격적 충돌과 구국을 위한 선구적 중국인의 적극적인 서방문화의 학습、수용을 촉발했다. 이후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서방문화의 수용은, ① 1895년 淸日戰爭 패배까지의 洋務運動 시기 ② 1911년 辛亥革命 직후까지의 維新運動 및 革命運動 시기 ③ 五四運動을 전후한 五四新文化運動 시기 등 대개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양무운동 시기
양무운동 시기는, 주로 자연과학과 기술을 위주로 하면서 그외 부분적으로 宗敎、史事、法政 등과 관련한 서방문화를 받아들인 시기였다. 아편전쟁의 패배와 태평천국의 진압 과정에서 서방의 우월한 점이 船堅砲利、堅甲利兵에 있다고 판단한 曾國藩、李鴻章、張之洞、沈葆楨 등의 洋務派는 군사기술과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의 과학 기술 도입을 적극 주장했다. 양무파는, 서방 과학 기술과 제도의 수용에 대해서는 그 태도가 상이했지만, 유가문화의 관념과 가치 기준의 고수라는 점에서는 王闓運、倭仁、張盛藻、洪良品、劉錫鴻、張楷 등의 頑固派와 동일했다. 또한 서방문화에 대한 전면적 인식이 결핍됨으로써 단순히 서방문화의 한 표면적 현상인 과학 기술에만 주목했고, 이에 따라 양무파는 자연히 中體西用을 통한 自强新政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서방문화 도입의 주요 방식은 同文館、製造局 및 교회 기구에 의한 서방 서적의 번역이었다. 梁啓超가 편집한 1896년의 《西學書目表》에 따르면 1895년에 이르기까지 종교 부문을 제외한 관련 번역서는 354종이나 된다고 한다. 서적 번역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서방 인사의 초빙과 유학에 의한 서방 문화 학습이었다. 서방 인사 초빙의 경우 1862년에서 1844년 사이 同文館에서는 20여명의 서방인이 교수했다고 한다. 청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1872년에 시작되었는데, 兵工船政의 학습이 그 주요 목적이었다. 서방 과학 기술의 도입과 전파는, 관념면에서는 유가적 전통관념을 무너뜨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방법론을 제공해 주었고 경제적으로는 농업경제의 붕괴를 초래하기 시작했다.
2. 유신운동 및 혁명운동 시기
유신운동 및 혁명운동 시기는, 서방 과학 기술의 지속적 수용은 물론 서방의 사회과학이 대량으로 중국에 받아들여진 시기였다. 청일전쟁의 패전 이후, 양무파가 아직 청일전쟁의 패배 원인을 서방 과학 기술 학습의 부족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에 비하여, 康有爲、梁啓超、譚嗣同 등 維新派는 서방은 선진 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회、정치、법률 제도 및 뛰어난 사회과학 이론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방의 과학기술은 물론 서방의 정치 제도 및 철학을 포함하는 사회과학의 모든 부문의 수용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정치 방면에서는 입헌군주제와 민권주의를, 교육 방면에서는 과거 폐지와 서방 과학 지식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을, 법률 방면에서는 재판제도의 도입 등을 주장하면서 變法維新을 내세웠다. 이같은 유신파의 활동이 戊戌政變에 의한 百日維新의 실패와 더불어 저조해지면서, 孫中山 등의 혁명파가 서방의 제도와 사상 도입을 주장하면서도 진화론、천부인권설 및 공화제를 내세움으로써 유신파와 논쟁을 벌이면서 봉건전제주의를 맹렬히 비판하기 시작、마침내 신해혁명을 이끌어내었다. 당시의 서방문화 수용은 주로 더욱 늘어난 번역과 유학은 물론 신문 잡지의 간행을 통한 한층 효과적인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컨대 1902년에서 1911년까지 그 명칭에 ‘譯’자가 붙은 신문사나 잡지사 혹은 출판사는 23개가 된다고 하며, 청말의 번역 소설의 수는 대략 1,500종 좌우라고 한다. 이같은 서방문화의 도입은 과학、철학、문학、정치、법학、교육학、사학、언어학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었으며, 특히 과학 부문에서는 嚴復, 철학 부문에서는 梁啓超、王國維, 문학 부문에서는 林紓, 정치 부문에서는 일본 유학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이러한 서방문화의 수용은 아직 그 심층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었다.
3. 5‧4 신문화운동 시기
5‧4 신문화운동 시기는, 서방의 과학 기술이나 정치 제도에 대한 수용 뿐만 아니라 서방의 문화 사상、윤리 도덕 즉 의식 형태의 모든 영역의 수용까지 강조된 시기였다. 신해혁명의 실질적인 실패의 원인이 사상개혁의 결핍에 있다고 본 陳獨秀、李大釗、胡適 등은 문화상의 계몽운동 전개와 더불어 서방문화 전체에 대한 심층적 수용을 주장했다. 비록 杜亞泉 등이 동서문화의 우열을 열거해가면서 신문화의 수입은 유가 사상이라는 ‘國基’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민주와 과학을 앞세우면서 심지어는 全盤西化라는 구호까지 내세웠다. 5‧4운동 직후 서방문화 수용에 의한 신문화의 추세가 더욱 강화되자 章士釗、陳嘉異、杜亞泉 등은 다시 사실상 中體西用의 변형인 中西調和를 주장했고, 이에 맞서 張東蘇、蔣夢麟、羅家倫、毛子水 등은 신구 문화의 공존은 있을 수 있으나 조화란 있을 수 없다는 등의 논리로 전통문화에 대한 전면 부정과 함께 서방 자본주의 문화의 전면 수용을 주장했다. 그후 梁啓超、梁漱溟 등이 서방문화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서방문화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새삼 전통문화를 전면 긍정하자 서방문화 수용 찬성론자들은 다소 상이한 흐름을 보여, 胡適、吳稚暉、尙乃悳 등은 서방문화는 문화발전의 유일한 길이라며 주로 자본주의적 서방문화의 전반적 수용을 적극 옹호했고, 李大釗、陳獨秀、瞿秋白 등은 자본주의적 서방문화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적 서방문화의 수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서방문화 수용은, 더욱 증대되고 다양화된 번역이나 유학 혹은 각종 출판물에 의한 수용이 백화문 사용 및 문학혁명과 결합하여 급속도로 촉진되었다. 물론 이러한 서방문화의 수용이 全盤西化라는 극단에 흐른 점은 없지 않으나, 문화 전체에 대한 수용이 이루어지고 또 자본주의 문화、사회주의 문화의 관계에도 주목하는 등 심층적 수용이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근대중국의 서방문화 수용은 양무운동 시기의 과학 기술 수용에서 유신운동과 혁명운동 시기의 정치、사회、법률 제도 수용을 거쳐 5‧4 신문화운동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문화 전반에 대한 수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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