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順洪 編, 신현제 옮김, 〈中國的旅游〉, 《中國槪況》, (北京 : 北京大學出版社, 1994. 9), PP.154-164.

 

중국의 관광

 

王  順  洪

 

사람들은 일단 외국에 오면,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모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곳을 관광하고자 한다. 관광은 정신상의 소일, 오락일 뿐만 아니라 아주 좋은 학습이기도 하다. 여행을 통하여 어떠한 나라, 어떠한 지방에 대하여 이해를 증진시킬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의 여행업은 활발히 일어나 각국의 보편적인 오락 활동과 새로 일어나는 경제, 문화 사업이 되었으며 중국의 관광업 또한 일단의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 여행 방면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국 여행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도 도움을 준다.

 

 

제1절 관광 자원

 

관광을 하려면 우선 관광자원이 필요하다. 관광자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연 관광자원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 관광자원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르지만 또한 관련이 없지는 않아 많은 점에서 양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자연 환경이 다른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행을 자극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항상 무덥거나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늘 온대나 아열대 지역으로 피서 또는 피한을 하고 싶어한다. 일년 내내 갑갑하고 떠들썩한 도시 사람들은 늘 들이나 농촌의 경치를 보고 싶어한다. 산악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평원과 넓은 바다를 보고 싶어하며, 해변이나 평원에서 사는 사람들은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를 보고 싶어한다. 이와 같이 자연 환경의 차이가 커질수록 경관은 더욱 신기하여 흡인력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한 지역의 사람이 또 다른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느낌을 얻으려 하고, 한 국가의 국민이 외국으로 가서 마음껏 관광하려고 한다.

중국은 땅이 넓고 지리, 기후가 복잡하여 자연히 관광자원도 아주 풍부하다. 광대한 고원이 있고, 높고 험준한 산맥이 있으며, 끝없는 사막이 있고, 경계가 보이지 않는 초원이 있으며, 쉼없이 흐르는 대하가 있고, 아름다운 호수와 해변, 얼음과 눈으로 덮인 북국의 겨울 풍경이 있으며, 사계절 푸른 아열대 지역이 있으니, 가히 전국 곳곳이 천연의 훌륭한 경치로서 예로부터 무수한 국내외 관광객을 끌고 있다.

중국은 아주 풍부한 자연 관광자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풍부한 인문 관광자원이 있다. 수천 년의 문명사상 각 시대, 왕조는 헤아릴 수 없는 고적과 유산을 남겼는데 그 수와 내용의 풍부함과 가치의 귀중함이 세계적으로도 손꼽아 헤아릴 수 있다. 중국정부는 일찍이 1953년, 1961년, 1982년에 3가지의 전국중점문물보호부문을 공표 하였는데 모두 5814곳이었다. 그 중 고적지, 고분, 고동굴, 고사찰, 고석각, 고조상, 고건축, 혁명유적, 역사와 혁명기념건축물 등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 고대와 근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방면에서의 변화, 발전 과정 중 많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유명한 도시를 형성하였다. 1982년, 중국 정부의 비준을 통하여 24개 도시가 처음으로 「역사적 문화적 도시」에 속하게 되었다. 1985년 이래로 다시 한차례의 역사적 문화적 도시를 개방하였다. 그 중에서 「6대 고도」로 불리는 北京, 西安, 洛陽, 開封, 南京, 杭州를 포함하여 蘇州, 紹興, 揚州, 長沙, 成都, 廣州, 昆明, 桂林, 泉州, 承德, 大同, 曲阜, 景德鎭, 江陵, 延安, 尊義, 大理, 拉薩 등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도시의 지상과 지하에는 모두 대량의 역사와 혁명 문물을 포함하고 있어 거의 모든 도시가 천연의 역사 박물관을 이루어서 관광객들로 하여금 마음껏 참관하도록 한다.

중국의 고전 조경예술도 풍부한 문화유산과 인문 관광자원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중국의 고전 조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제왕의 황가조경이고 또 하나는 고급 관리의 사택조경이다. 황가조경은 제왕의 피서, 수양용의 행궁인데, 일반적으로 교외에 있으며 규모가 웅대하다. 북경의 이和園, 圓明園과 承德의 避暑山莊 등이 있다. 그리고 도성 내에 지어진 것도 있는데 궁정과 인접하며 규모도 작다. 북경의 北海, 中南海등이 있다. 사택조경은 일반적으로 시가구역에 지어져 있어 거리, 주택과 붙어 있으며 규모도 그리 크지 않지만 설계가 정교하고 운치가 있으며 쾌적하다. 중국 고전 조경의 높은 예술성과 독특한 풍격은 세계 조경예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일찍이 일본과 구미에도 전파되었었다. 프랑스 파리는 바로 중국식 조경을 20여 곳이나 가지고 있다. 일본의 정원도 중국 蘇州의 조경으로부터 옮겨온 것이다. 따라서 중국조경은 「세계조경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가지고서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을 끌고 있다.

이외에도 중국은 56개의 민족이 있으며, 각 소수민족의 전통명절과 인정미, 지방특색과 민족색채가 농후하여 여행객들로 하여금 독특함과 신선함을 느끼게 하는데 이 또한 흡인력 있는 인문 관광자원이다.

중국관광의 자연자원과 인문자원은 지역에 따라 다르며 대단히 풍부하다. 각 지역의 자연과 인문 관광조건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따라 전국은 크게 9개의 관광구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중원관광구이다. 황하중하류 유역에 위치하여 陝西, 山西, 河南, 山東, 北京시, 天津시를 포함하며 華北지구라고 부르며 중앙관광구라고도 부른다. 황하 유역은 중국 고대 문명의 발원지로 자고이래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중국의 「6대 고도(古都)」중 北京, 西安, 洛陽, 開封의 4대 고도가 이 지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외 承德, 曲阜, 大同, 太原, 濟南, 延安 등의 역사 도시가 있다. 중국 수천 년의 문명사는 이 지구에 수많은 명승고적을 남겼다. 이 지역의 자연경관은 저산구릉과 해안 지대로서 비교적 아름답다. 수도인 북경은 문명의 고도일 뿐만 아니라 현대화된 도시이기도 하여 당대 중국 정치, 문화, 교통의 중심이다. 이상의 요소들이 이 지역으로 하여금 중국 최고의 관광구중 하나로 만들고 있다. 중원관광구의 주요 명승지는 다음과 같다. 북경의 長城, 故宮, 明十三陵, 이和園, 天壇, 雍和宮, 琉璃廠, 潭자寺, 碧雲寺, 北海, 서안의 秦始皇陵, 兵馬俑, 華淸池, 大雁塔, 小雁塔, 碑林, 半坡박물관, 낙양의 龍門石窟, 白馬寺, 개봉의 鐵塔, 大相國寺, 禹王臺, 승덕의 避暑山莊, 外八廟(普寧寺, 普樂寺등 8개사찰), 曲阜의 공자묘, 공자 저택, 공자림, 濟南의 박突泉, 珍珠泉, 黑虎泉, 五龍潭, 大明湖, 靑島의 로山풍경구, 海浜풍경구, 秦皇島의 北戴河, 山海關, 태원의 普祠, 박물관, 대동의 雲崗石窟, 懸空寺, 華嚴寺, 九龍壁, 등등. 그리고 泰山, 華山, 五臺山등은 사찰이 무리를 이루며, 산세가 험준하고 경치가 아름답다.

둘째, 동부연해관광구이다. 이 관광구는 長江 하류와 황해, 동해안에 위치하고 浙江, 江蘇, 安徽, 江西 4성과 상해를 포함하여 華東지구라고 부르는데 중국의 자연조건이 뛰어나고 경제가 가장 발달한 곳으로서 인구가 가장 조밀한 지역중의 하나이다. 이 지역은 관광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일찍이 개발되었다. 주요한 관광명소는 다음과 같다. 중국최대의 항구와 공상업도시인 상해는 번화한 거리, 유럽식의 건축이 있을 뿐만 아니라 豫園, 玉佛寺, 魯迅의 묘와 魯迅의 옛집, 孫中山의 옛집, 宋慶齡의 묘 등의 볼거리도 있다. 중국의 6대고도의 하나인 南京은 中山陵, 明孝陵, 玄武湖, 莫愁湖, 남경장강대교, 雨花臺 등이 있다. 杭州도 중국 6대고도의 하나로서 西湖, 飛來峰, 靈陰寺, 六和塔, 岳王廟와 岳墳등이 있다. 蘇州의 園林, 虎丘, 寒山寺, 無錫의 惠山, 太湖풍경구, 揚州의 大明寺와 鑒眞기념당, 瘦西湖, 天寧寺, 金山 및 園林 등, 紹興의 東湖, 會稽山, 魯迅 옛집, 周恩來 옛집 등, 수려한 富春江, 新安江수력발전소, 錢塘江觀潮등이 있다. 그리고 불교성지 普陀山, 雁蕩山, 黃山, 九華山, 廬山은 모두 유명한 관광 명소이다.

셋째, 川漢관광구이다. 즉 장강 상류, 중류지구로서 湖北省, 湖南省, 四川省중, 동부 지역을 포함한다. 이 관광구는 장강양안의 경치를 그 독특한 자연관광자원으로 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 고대, 특히 삼국 시기에 많은 명승고적을 남겼다. 그리고 이 지역의 서부는 靑海, 西藏고원의 동부변경지대로서 야생 동물, 식물자원이 대단히 풍부하다. 천한 관광구의 주요 관광지는 다음과 같다. 長江三峽, 成都의 杜甫草堂, 武候祠, 三蘇祠, 重慶山城, 大足石刻, 樂山大佛, 峨眉山의 일출·雲海·佛光의「3대절경」, 武當山과 神農架, 川西 자연 보호구, 武漢과 삼국의 자취인 黃鶴樓, 赤壁, 荊州古城등, 衡山관광구, 長沙시 및 岳麓書院, 毛澤東의 고향 韶山沖, 洞庭湖 및 岳陽樓, 張家界森林公園 등등.

넷째, 華南열대경관관광구이다. 廣東省, 福建省, 海南省, 臺灣省을 포함하는데 남부 연해에 위치하여 홍콩, 마카오, 동남아와 인접하며 아열대지역에 속한다. 해안의 여러 섬들은 이 관광구의 두드러진 특색이며 동시에 많은 명승고적을 가지고 있다. 주요 관광지로는 廣州, 福州, 厦門, 武夷山, 丹霞山 풍경구, 海南島, 深수, 珠海, 汕頭, 厦門 경제특구 등이 있다.

다섯째, 西南카르스트지형 관광구이다. 廣西, 雲南, 貴州의 3성을 포함하는데 중국 카르스트지형의 주요 분포 지역으로 용암으로 형성된 특이한 경치는 이 곳의 주요 특색을 이룬다. 동시에 또한 소수민족이 섞여 사는 지역으로서 소수민족의 특색으로 충만하다. 이 관광구의 주요 관광 명소로는 西쌍版納, 桂林의 산수, 貴州의 黃果樹瀑布, 昆明古城과 계곡, 西山관광구, 路南석림풍경구, 22개 서남 소수 민족의 풍토 등이 있다.

여섯째, 西北비단길관광구이다 「비단길」이라 함은 중국고대에 아랍, 유럽과 행하던 비단무역의 육상통로의 하나이다. 그것은 長安(西安)에서 시작하여 渭河유역을 지나 河西회랑지대(황하 서쪽의 甘肅지역)와 塔里木분지를 통과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지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거쳐 지중해동안에 도달하는 것으로 전체 길이가 7000여㎞에 달한다. 「비단길」은 중국 국경 내에서 陝西, 甘肅, 新疆 3성을 지나간다. 그것은 예로부터 고대중국과 서방의 정치, 경제, 문화교류에서 중요 작용을 발휘했기 때문에 일찍이 명성을 떨치는 국내외의 역사 유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또한 「비단길」을 따라서 敦煌石窟과 벽화, 麥積山石窟의 雕塑, 嘉욕關, 玉門關, 樓蘭유적 등 문화고적 · 고비사막, 劉家峽댐, 투르판분지, 火焰山등 자연경관 · 蘭州, 酒泉, 烏魯木齊, 喀什등 주요도시 · 위구르족 등 십여 개의 소수민족 풍토 등이 있다. 따라서 이 지구 역시 수천 수만의 관광객으로 하여금 참관하고, 고찰하며, 관광하도록 한다.

일곱째, 東北관광구이다. 이 관광구는 遼寧, 吉林, 黑龍江 3성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관계로 겨울이 춥고 강설량이 크며, 여름엔 시원하여 피서에 적합하다. 또한 大興安령, 小興安령, 長白山은 중국 최대의 원시삼림지역으로서 차갑고 눈으로 덮인 북국의 경치를 형성한다. 이 지구의 주요 관광 명소로는 「五大連池」(화산호), 鏡泊湖(화산방죽호), 하얼빈의 얼음 축제, 沈陽의 古城, 鞍山의 千山, 大連의 피서지, 吉林의 스키, 長春「八大部」(淨月潭)등이 있다.

여덟째, 북쪽변방관광구이다. 즉 장성이북에 위치하는 내몽고자치구이다. 광활한 대초원과 독특한 몽고족의 정취는 이 지역의 두드러진 특색이다. 다음과 같은 오래된 민가가 있다. 「하늘은 푸르디푸르고, 들판은 넓디넓은데, 바람이 불어 풀이 누우니 소와 양떼가 보인다.」 변방 몽고대초원의 풍경을 생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준마 또는 낙타를 타고 망망한 초원을 질주할 때 평소의 괴로운 마음은 깨끗이 없어질 수 있다. 몽고족들은 아주 호탕하고 손님을 좋아해서 만약 여행객이 초원에서 여관을 찾지 못한다면 어떠한 몽고움막이라도 묵을 수가 있다. 전문적으로 여행객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자치구 정부소재지인 呼和浩特시 북부에 몇 개의 초원 관광소를 열었다. 여행객은 몽고식 옷을 입고 말, 낙타, 차를 타고 목축민가에 가거나 몽고움막에 묵으면서 우유차를 맛보거나 횃불놀이에 참가하거나 승마, 활 시합, 씨름, 말 잡기 경기 등을 참가할 수 있어 독특한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아홉째, 靑藏고원유목구이다. 西藏, 靑海 두 성과 四川서부를 포함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이 곳은 해발 6000㎞이상의 높고 험준한 산이 많으며 세계 최고의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 또한 거대한 얼음천, 얼음 봉우리, 고원호수가 있고 아름다운 고전도시 拉薩가 있으며 웅장, 화려하고 풍격이 독특한 고원 사찰 布達拉宮과 大昭寺가 있다. 西藏의 고원을 여행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높고 넓은 산지의 웅장하고 호탕하며 거칠고 힘찬 경지이다.

이상의 9대 관광구는 중국관광자원 최대의 구분 단위로서 모든 관광구는 또다시 몇 개의 부관광구로 나누어지며, 부관광구는 다시 몇 개의 관광소지역으로 나누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구체적인 풍경구와 관광소가 나온다. 이러한 구분은 중국의 관광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충분히 얘기해 주고 있다.

 

 

제2절 관광사업

 

중국은 관광자원의 대국이지만 개발은 그리 이르지 못해 관광사업의 발전은 비교적 느렸다. 최근 몇 해 계속된 개혁, 개방에 따라 관광사업 또한 흥기하기 시작하여 새로 개발, 개방된 관광소가 점점 많아졌고 먹고 자고 유람을 위한 관광조건도 날로 개선되어 관광객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외국으로부터의 관광객 수가 1986년 2100만 명, 1988년 3169.5만 명으로 매년 평균 20%이상이 증가하였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계속적으로 대폭 증가하여 1991년 3335만 명, 1992년 3811.61만 명이었는데 그 중 외국인이 400.65만 명이었고, 화교가 16.51만 명, 홍콩·마카오 동포가3262.62만 명, 대만 동포가 131.83만 명이었다. 1992년 중국을 찾은 외국관광객중 일본과 구소련에서 온 사람수가 가장 많아 각각 79.15만 명과 89.53만 명에 달하였고, 그 다음은 미국인으로 34.63만 명, 그 다음은 싱가폴, 태국, 필리핀, 영국, 말레이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기타국가였다.

신중국 성립 이래로 관광사업은 줄곧 국가가 경영해 왔다. 국가관광국은 전국관광사업의 총체적 계획, 정책의 제정 및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국가관광국 아래에는 4개의 큰 국영여행사가 있다. 하나는 국제여행사로서 전문적으로 외국관광객을 책임지고 접대한다. 그리고 중국여행사, 화교여행사, 청년여행사가 있는데 외국, 홍콩, 마카오, 대만에서 친척 방문이나 관광 오는 화교들을 책임지고 접대한다. 이 4대 여행사의 본사는 모두 북경에 있고, 전국 각 성,시, 자치구에 지사가 있으며 이로부터 전국최대의 관광망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의 관광사업도 관리체계에 있어서 개혁을 진행하여, 하나는 상술한 4대 국영여행사를 자주적 경영, 손익을 책임지는 독립 경제 체제로 바꾸었다. 또 하나는 민간 여행사를 포함하여 사회 각 방면에서 여행사를 설립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현재, 전국의 유명여행사는 1500소 이상으로 중국의 관광사업은 이미 과거의 경직된 관리체제를 깨뜨리고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숙식과 여정은 여행의 기본조건으로 오랫동안 중국은 이 방면에서 비교적 낙후하고 불편한 점이 많아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나쁜 영향을 주었다. 관광사업의 신속한 발전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최근 10여년동안 중국의 각 대도시와 관광명소는 많은 고급호텔을 신축하였다. 북경에만도 3,40곳에 지어졌는데, 建國호텔, 長城호텔, 昆侖호텔, 國際호텔, 王府호텔, 西苑호텔, 香山호텔, 샹거리아호텔, 長富宮호텔 등 그 현대화정도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호화로운 특급호텔이외에 각지에는 민족과 지방 풍격을 구비한 호텔, 여관을 지었다. 예를 들면, 북경 回龍觀의 전통사합원식 호텔, 절강일대의 조경식호텔, 섬서 연안의 동굴식호텔, 내몽고의 몽고움막식호텔, 운남 西쌍版納의 대나무 여관, 등등. 10년 이전에는 중국의 관광호텔의 수량이 적어 객실공급이 수요에 못미쳐 예약이 아주 어려웠다. 오늘날에는 전국각지에 관광호텔이 많이 생겨나서 도처에 즐비하게 되었다. 그 중 고급호텔의 객실은 약 10%, 중급객실은 약 40%, 저급객실은 약 50%를 차지하여 기본적으로 국내외여행자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있다. 1991년 말 전국적으로 성급 해외관광호텔 777개소를 평가공표하여 그 중에서 5성급 17개소, 4성급 44개소, 3성급 221개소를 지정하였다. 이처럼 웅장, 화려하고 사람의 주의를 끄는 호텔은 개혁, 개방이후에 중국 관광사업의 활기차고 두드러진 상징이 되었다.

개혁, 개방이래 중국의 관광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정부는 일련의 관광구, 관광소에 대해 중점적인 보수, 건설을 진행해 새로운 관광소와 여행노선을 개발하였다. 예를 들면, 陝西省의 臨潼驪山관광구, 산동반도관광구, 북경의 圓明園, 무한의 黃鶴樓, 長江三峽관광로, 厦門-泉州-福州-武夷山관광로, 「비단길여행」, 초원의 여행, 등등. 1992년은 「친선관광의해」로 중국은 해외관광객에게 249개의 국가급관광명소, 14개 관광노선을 내놓고, 각지에서는 몇백 개의 여행활동과 민속경축활동을 조직하였다.

광대한 관광객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관광부문은 관광 서비스질의 관리를 강화하고 여행사와 호텔은 종업원들에게 엄격한 교육을 강화하여 서비스 질은 이전에 비해 훨씬 상승하였다. 현재, 모든 큰 여행사와 관광호텔에서는 가이드, 통역 등 각종 인력이 준비되어 있으며 각종 서비스항목이 완벽하고, 능동적이며 친절하다. 관광서비스와 관리인력을 배양하기 위해서 전국의 각 성,시는 거의 200곳의 중등관광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20여개소의 대학교에서 관광과 혹은 관광관리전공을 개설하여 직업훈련, 성인교육 등을 실시함으로써 중국의 관광서비스, 관리진의 재질은 한층 높아졌다. 이 외에 세계의 앞선 관광관리경험을 배우고 유치하기 위해 중국은 또한 외국으로 유학생과 연수생을 파견하고 있다.

교통 방면에서도 최근 몇 년동안 많이 개선되었다. 현재, 중국각 대도시 혹은 주요도시는 모두 공항시설을 갖추고 있고, 일반 도시도 열차 혹은 시외버스가 있어, 각 관광구, 소는 모두 시외버스나 관광버스를 이용해 참관하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도착이 가능하다.

중국의 관광사업이 비록 일정한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중국은 발전중의 국가인 것은 틀림없다. 경제는 아직 그리 발달하지 못했고, 관광사업에로의 투자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세계의 관광산업이 발달한 국가와 비교해 볼 때, 그리고 중국의 아주 풍부한 관광자원과 비교해 볼 때, 중국의 관광산업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는 편이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광자원이 비록 풍부할지라도 개발되지 않거나 충분히 이용되지 않는 곳이 아직 많이 있다. 둘째, 관광설비, 서비스가 비록 많이 향상되었을지라도 종합적인 완성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있다. 셋째, 교통시설은 있으나 표를 사고, 차를 타기까지에는 아직 불편한 점이 많다. 넷째, 일의 효율과 서비스의 질적인 면에서 아직 한 단계 더 높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더욱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관광산업으로써의 외화획득을 예로 들면, 1978년의 중국의 관광 외화 획득은 거의 2.6억 달러였으며, 1980년에는 6.2억 달러까지 상승하였다. 그러나 중국보다 훨씬 크기가 작은, 유럽의 스페인은 1980년 관광외화획득이 70억 달러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해 중국의 11.7배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10여년간 중국관광산업의 발전속도는 비교적 빨라서 1988년 외화획득이 10.5억 달러였고, 1991년에는 또 28.4억 달러까지 증가하였으며, 1992년에는 39.5억 달러에 도달하여 1978년의 15.2배가 되었다. 중국 관광외화수입의 세계에서의 위치는 이미 1978년의 제41위에서 제18위로 상승하였다. 금세기 말에 와서 중국의 관광외화수입은 약 100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관광산업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혁·개방의 계속적인 확대와 경제의 고속성장에 따라, 중국의 관광산업은 세계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서 명실상부한 관광대국이 될 것이다.

 

 

제3절 도시 소개

 

더욱 깊이 중국의 여행문화를 이해하고, 여행이 중국의 인식에 대한 의의를 살피기 위해서 이 장에서는 북경과 서안을 선택해서 중점적으로 소개하였다. 이 두 도시는 모두 중국 고도의 대표이며, 최대의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1. 北京

중국의 6대 고도 중에서 북경은 고도로서 대량의 명성고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중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외국인과 국외화교들이 중국을 여행할 때는 가장 먼저 북경을 보고 싶어한다.

북경은 이미 3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에 북경은 북방교통의 요지이며 또한 수륙의 접합점인지라 인구가 나날이 증대하였다. 일찍이 기원전 1057년, 여기에 제후국인 燕나라의 도성을 세워서 「계」라고 불렀다. 그 후, 秦나라로부터 시작하여 漢, 魏, 晉을 거쳐 隋, 唐에 이르기까지 1000여년간 계城은 줄곧 이 지역의 행정중심 및 북방의 물자, 문화교류의 중심이 되었다. 서기 938년 거란이 북방에 遼나라를 세우고, 이곳을 요나라의 제2수도로 삼아 「南京」으로 고치고 또 「燕京」이라고도 불렀다. 서기 1153년, 여진족이 건립한 金나라는 이 곳으로 천도하여 「中都」라 불렀다. 또한 북송의 변梁(지금의 開封)을 모방하여 성지를 개조, 확충하는 동시에 궁전을 흥건하였다. 서기 1215년, 몽고 기마병이 中都를 공격하여 화려하고 웅장한 金조의 궁전을 불태워서 교외의 大寧宮(지금의 북해공원)만 남아 있다. 서기 1260년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중도에 도착해 7년후에는 元나라의 수도로 삼았으며, 大寧宮을 중심으로 하여 「大都城」을 건립하였다. 대도성은 宮城과 大城으로 나뉘는데, 궁성은 대녕궁과 그 주위의 호수를 감싸고, 궁성밖에는 대성으로 둘레가 28.6㎞로서 전체 성의 짜임새와 기세가 장엄하고 웅장하다. 서기 1403년 明나라 成祖 朱체는 여기에 도읍을 세워 「北京」이라 이름을 고치고, 북경성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明조의 북경성은 북성이 탁 트여 지키기 어려웠으므로 원나라 때의 북성벽을 2.5㎞남쪽으로 지금의 崇文門, 正陽門, 宣武門까지 옮겼다. 明조의 북경성은 大城, 皇城, 宮城의 3가지가 있었다. 후에 淸나라는 다시 明조 북경성의 기초 위에 많은 아름다운 조경을 만들었다.

중국의 근대역사상 여러 중대한 사건들이 북경에서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1919년의 「5.4운동」, 1935년의 「1.29운동」, 1937년의 「7.7사변」등이 있다.

오늘날 북경성의 윤곽(제2환로 이내 구역)은 대체적으로 明대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다. 중심에 위치한 고궁은 장방형의 궁궐의 무리로서 紫禁城이라 부른다. 자금성의 높이는 7.9m이고 네 모퉁이는 성루가 있고, 바깥 네 변은 성을 감싸는 강이 있다. 자금성의 바깥쪽은 皇城으로 주위가9㎞이며 사면에는 대칭 되는 성문이 있다. 황성의 바깥주위 20㎞는 內城이라 부르는데 정방형을 띠는 것으로 明 洪武 30년(서기 1397년)에 건립되었다. 내성남부의 장방형은 外城이라 부르는데 明 嘉靖 31년(서기1552년)에 건립되었다. 외성은 상업의 번영과 군사적 요구에 따라 건립된 것이다. 이처럼 북경성은 「凸」자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

북경내성 주요거리의 특징은 가로, 세로 높이가 곧게 수직으로 교차되고 있어 바둑판 모양과 같고 각 주요거리는 또한 작은 골목을 많이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도 북경성의 도로와 골목은 여전히 많은 곳에서 옛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간선도로는 대부분 이 성문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前門大街, 西直門大街, 地安門大街, 德勝門大街, 朝陽門大街, 建國門大街, 廣安文大街, 崇文門大街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여러 도로와 골목은 정부기구와 상업시장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兵馬司 골목, 海運倉 골목, 大木倉 골목, 쌀시장골목, 나물시장골목, 질그릇시장, 식량골목.....등이 있다.

신중국성립이후 북경성지구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밀집된 시내 교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50년대부터 시작해 우선 자금성을 에워싸는 도로를 넓히었고 황성의 동, 서, 북 3면의 성벽을 철거하였다. 원래 있던 天安門, 地安門, 西四, 東四 등 몇 개의 장식용 건축물도 교통에 지장을 주어 철거하였다. 최근 10여년간 북경은 더욱 대규모로 수정과 건설을 하여 고성벽의 유적 위에 제2환로를 짓고 그 아래에는 순환 지하철을 개통하였다. 그 후, 또다시 제3환로, 제4환로를 만들고 많은 고층 건물을 새로 지었다. 오늘날 북경의 황성 및 성내구역의 도로 구조는 비록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시내는 이미 대폭 확대되어 모양이 크게 변화하였으므로 이것은 옛 문명도시가 이미 현대화 도시로 바뀐 것이다.

북경의 가장 유명한 곳은 천안문광장이고, 가장 넓은 도로는 長安街이다. 또한 천안문은 수도 북경의 상징이다. 천안문 광장은 면적이 50㏊로 원래는 봉건왕조의 광장이었는데 당시 광장의 주위는 붉은 담으로 쳐져 있어 일반인은 절대 접근하지 못하였다. 신중국 성립 후 벽을 모두 허물고 광장을 넓혀서 50여만 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천안문 성루는 원래 황성의 남문인데, 높이고 단장하여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되었다. 광장의 서쪽은 인민대회당이 있고, 동쪽은 중국 역사박물관과 중국 혁명박물관이 있으며 남쪽은 毛澤東 기념상이 있다. 중간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있는데 부근의 中南海는 중공 중앙과 국무원의 소재지이다. 그리하여 천안문 광장은 중국 수도의 정치중심지이며 여기서 이루어지는 정치활동은 전국, 전세계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중국의 근대이래 여러 중대한 사건은 모두 여기서 일어났다.

長安街는 서쪽의 複興門에서 시작되어 동쪽의 建國門에서 끝나는데, 전체길이가 6㎞이고 넓이는 60-70m이다. 신해혁명전 동서장안가는 천안문광장을 에워싼 벽으로 나누어져서 통행할 수가 없었으나 청조가 멸망한 후 개통되었다. 지금 도로 양쪽에는 많은 국가기관이 있으며 웅장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넓은 거리에는 자동차, 자전거의 끊임없는 물결이 중국 수도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북경의 유명한 명승고적은 長城과 故宮이다. 만리장성은 전체길이가 6700㎞로써 중국북부 6개 성, 시를 가로지른다. 장성은 전국시기에 건축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북방의 燕, 趙, 秦국이 북방흉노를 방어하기 위하여 산세가 험준한 곳에 성벽을 쌓았다. 기원전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각 제후국의 방위성벽을 연결하여 더욱 강화하였다. 그후, 漢, 唐, 宋, 元, 明대에 부단히 개축하였다. 오늘날의 장성은 대부분 명대에 새로이 건축된 것이다. 운수,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높고 험한 산에 거의 만리나 되는 장성을 쌓는데 있어서 그 과정의 어려움은 실로 짐작이 간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세계적으로 건축기적이라 일컬어진다. 북경의 만리장성 관광소는 북경서북 70여㎞의 八達령에 위치하여 북경에 오는 내외 관광객은 반드시 팔달령 장성을 구경하려 함으로 팔달령은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팔달령 장성의 관광객 밀집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북경은 최근 동북쪽 교외의 懷柔縣내에 慕田욕 장성 관광소를 새로 열었는데 팔달령보다 더욱 험준하다.

고궁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크고 가장 완정한 제왕 궁전과 옛 건축군으로서 북경성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서기 1406년에 짓기 시작하여 14년이 걸렸는데 明, 淸 2대에 걸친 24명의 황제가 살았다. 고궁은 면적이 72만 평방미터이고 궁실은 9000여간으로 크게 外朝와 內廷으로 구분된다. 전반부는 외조라 부르며 太和殿(속칭 금란전), 中和殿, 保和殿으로 중심을 이루고, 文華殿, 武英殿이 양 날개가 되어 기세가 드높은 것으로 궁전 중 가장 웅위하고 장엄하며 호화롭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그것들은 모두 높이 7m에 달하는 한백옥 층계의 받침대 위에 우뚝 솟아 있어 멀리서 보면 그야말로 신화 속의 신선궁전과 같다. 태화전은 황제가 대전의식을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휴식하거나 의식을 연습하단 곳이며, 보화전은 매년 섣달 그믐 황제가 외국 인사를 초청해 주연을 벌이던 곳이다. 후반부는 內廷이라 부르는데 황제가 평상시 생활하고 후비와 함께 거주하던 곳이다. 내정의 북쪽에는 御花園이 있는데 건축이 정교하고 아치가 있으며 배치가 여러 자태를 나타내는 곳으로 제왕 후비가 놀던 곳이다. 고궁을 참관하면 풍격이 독특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중국의 고대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봉건황제의 사치스럽고 위엄 있는 모습을 그려봄으로써 역사를 이해할 수 있고, 또한 궁내에 보존된 진귀한 중국고대 문물을 많이 감상할 수 있다.

북경서북쪽에 위치한 이和園은 아름다운 황가의 조경이다. 원래는 12세기 金나라 제왕의 행궁이었는데, 淸대 乾隆황제 때 조경림을 확충하여 淸의園이라 개칭하였다. 1860년 청의원은 영·연합군에 의해 불태워졌는데 1888년 慈禧太后가 해군군비를 사용하여 새로 시어 이름을 이화원으로 고쳤다. 이화원은 첫째, 면적이 290㏊로 현존하는 중국고대의 최대 황가 조경이다. 둘째, 산, 호수, 섬, 행랑, 대전, 사당, 성루, 누각의 설계가 특이하고 배치가 조화로우며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중국 조경 특색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이화원의 동쪽에는 圓明園이라는 또 하나의 공원이 있다. 원래 중국 최대의 황가 조경으로 이화원보다 몇 배나 컸으며 내부에는 중국 고대의 모든 조경양식이 집중되어 있고 서양식 건축물도 있어서 「정원중의 정원」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세계적인 정원은 1860년과 1900년에 북경을 침략한 영·불 연합군과 8국연합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약탈당해 남은 것은 오직 폐허뿐이다. 최근 정부는 원래의 건축 유적을 보존하는 것 외에 조경내의 풍경을 보수하여 정식으로 관광객에게 개방하였다. 이러한 주요 유적은 국내외 관광객들의 관광장소일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十三陵은 북경 북부 40여㎞에 위치한 明대 13명의 황제릉으로 지상건축이 웅장할 뿐만 아니라 거대한 지하 궁전도 가지고 있다. 현재 참관할 수 있는 곳은 長陵과 定陵 뿐이다. 장릉은 明 成祖 朱체의 릉으로 건축 년대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크다. 정릉은 明 禪宗 朱翊鈞의 묘로서 1956년 그 지하 궁전이 발굴된 후로 국내외의 파문을 일으켰다. 정릉의 지하궁전은 前殿, 中殿, 后殿으로 구성되며 깊이가 27m로서 황제와 황후의 관이 후전의 중간에 놓여 있고, 궁내에서 출토된 금, 은, 옥, 자기 등의 진귀한 문물이 3000여종이나 된다.

天壇은 북경성 남쪽에 위치하여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제단 건축물로서 약 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명, 청 2대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으로 매년 동지에 황제가 이 곳에 와서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오곡이 풍성하기를 기원하였다. 祈年殿은 천단의 주전인데 높이가 38m, 직경이 30m로서, 설계가 독특하고 금벽이 휘황찬란하며 웅대하게 솟아 있다. 기년전 남쪽에는 환丘, 皇穹宇, 回音壁등도 있다.

이상 중점으로 소개한 명승 외에도 북경에는 참관할 만한 곳이 많이 있다. 琉璃廠은 보수가 잘 된 고문화거리로서 중국의 서예, 문방사우, 미술공예품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여 중국 전통문화의 분위기가 넘쳐흐른다. 雍和宮은 북경최대의 라마사찰이다. 北海공원은 시중심에 위치한 황가 공원이다. 香山 공원은 서쪽 교외에 위치하여 臥佛寺, 碧雲寺 및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가지고 있다. 大觀園은 남쪽 교외에 위치해 있는데 고전소설 《홍루몽》에 근거하여 지어졌다. 북경 동물원에는 600여종의 동물 5000여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팬더, 공작, 금사원숭이등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동물들이 있다. 潭자寺, 大鐘寺, 白雲觀은 새로 개방한 사찰이다. 「北京猿人」유적지는 북경 서남쪽 50㎞의 周口店에 있는데 50만년전 북경원인이 살았던 곳이다. 아시아경기 선수촌은 1990년 중국에서 아시아경기를 치른 곳으로서,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또한 중국 현대화의 웅장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북경에는 또한 번화한 상가, 전통적인 먹자골목, 대형구매센터, 자유무역시장등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곳에 와서 관광하고 물건을 삼으로써 북경의 민속 분위기와 일상 생활의 모습을 진실하게 느낄 수 있다.

요약하면, 북경은 유구한 역사, 문화를 가진 도시로서 참관할 만한 명승고적이 실로 많다. 동시에 북경은 신속히 현대화로 달려가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개방되는 북경은 매일 수십만의 국내외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중국의 관광사업 중에서 북경은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2. 西安

서안은 또 하나의 뛰어난 중국문화유산지와 관광명소의 상징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경보다 훨씬 이르고, 오래도록 유지된 것으로 西周, 秦, 西漢, 前趙, 前秦, 後秦, 西魏, 北周, 隋, 唐의 10개 왕조가 여기 또는 부근에서 도성을 건립한 바 있는 1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안이 수도로 있었을 때가 중국 봉건사회의 초기와 중기로 연대가 유구하므로 명승 중에서 유적지가 비교적 많으며 지하문물자원이 풍부해 모든 지역이 거대한 박물관과 같다. 따라서 서안으로의 여행은 중국 역사와 문화를 더욱 이해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서안은 명조이전에는 「長安」으로 불리었다. 상고시기에는 이 일대에 물이 풍부하고 자연조건이 좋아 중국인 조상이 집중적으로 활동했던 지역중의 하나였다. 1957년 서안에 지어진 半坡 박물관은 바로 6-7천년 이전의 모계 씨족사회의 한 촌락 유적지이다. 서주시대에는 오늘날 서안의 서쪽에 첫 번째 도성을 건립하고 豊京이라 불렀다. 후에 다시 부근에 鎬京을 지어 주왕은 호경에서 거주하며 사무를 보았고 풍경에서는 조상에 제사지냈다. 비록 유구한 역사가 이 두 도시의 흔적을 쓸어가버렸지만 문헌기록과 출토된 문물에 의해 헤아려 볼 수 있다.

서주의 멸망이후 동주는 洛邑(지금의 洛陽)으로 도성을 옮겼다. 다시 500년이 지나 진나라가 지금의 서안 부근 咸陽에 도성을 세우고 각 제후국의 궁전에 따라서 대량의 건축물들을 건립했을 뿐 아니라 대단히 규모가 큰 阿房宮을 지었다. 그 후 진말 농민의 반 진나라 봉기 때에 아방궁 등의 궁전은 項羽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불태워졌고, 진시황릉 위의 부속 건축물도 태워졌으며 능묘 또한 도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진시황릉의 통층 두께는 70여m나 되어, 능묘내부는 아직도 확실히 열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1974년 秦陵의 동쪽에서 3개의 거대한 병마용 갱이 발견되었고, 발굴이후에 서안의 가장 중요한 명승고적이 되었으며, 세계에 「제8대 불가사의」로 불려졌다. 그 중 1호갱은 동서의 길이가 230m이고 넓이가 62m, 길이가 5m내외이며 갱 내부에는 약 6000개의 병마용이 있는데, 장군, 병사, 전마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모든 진용의 기세가 웅대하며 대오가 가지런하여서 진나라 군대의 모습과 진시황의 위엄, 사치를 재현하고 있다. 진시황 병마용을 참관하는 국내외 관광객은 연중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제2호 병마용 갱이 한창 발굴되고 있는 중이다.

秦나라가 전복된 후 劉邦이 漢나라를 세웠다. 渭河의 남쪽의 長安이라는 촌락에 도성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장안성이다. 장안성은 중국역사상 가장 규모가 웅대한 도시로 국가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최대의 물자집산지로서 당시 중국 경제 번영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당시의 장안성은 둘레가 20여㎞로서 궁전이 대단히 컸다. 가장 이름난 것은 長樂宮, 未央宮, 성밖의 建章宮인데 모두 황제가 거주하고 사무를 보았던 곳으로 지금은 원래의 건축물이 소실되었지만 아직도 유적지는 보존하고 있다.

서기 581년 隋나라가 건립되고 장안성의 동남쪽(지금의 서안시 일대)에 새로운 도성인 大興城을 중건하였다. 서기 618년 당나라는 수나라를 대신하여 대흥성의 기초아래에서 장안성을 신속히 발전시켜 나갔다. 그 후 약 300년 동안 장안은 중국의 정치, 경제, 교통, 문화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무역, 문화도시가 되었다.

당대의 장안성은 규모가 대단히 크고 규획도 아주 정제되어 있어 중국 고대건축예술의 고도 발전을 구현하였다. 전체성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宮城은 황제, 후비 등이 거주했던 곳이고, 궁성 남쪽의 皇城이라 불리는 곳은 정부의 관리가 사무를 보던 곳이었으며, 황성의 남쪽은 외곽성이라고 불리고 京城이라고도 불리는데 동, 서, 남 3면에서 궁성과 황성을 에워쌌으며, 일반인 또는 관리의 주택구이기도 하고 상업구이기도 했다. 성은 네모형으로 둘레가 약 35㎞이고, 성안에는 14개의 동서방향의 도로와 11개의 남북방향의 도로가 있어 장안성을 바둑판과 같이 여러 개의 작은 덩어리로 분류한다.

궁성은 원래 太極宮 하나 뿐으로 唐조 황제의 거처였다. 서기 662년 궁성동북쪽의 大明宮을 수리, 확건하여 대단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것으로 외교사절을 환영하고 행사를 거행하던 곳인데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50년이 지난 후 唐 玄宗은 다시 대명궁 동남쪽에 興慶宮을 건축했으며 여산에도 행궁인 華淸宮을 지어 양귀비와의 유락 장소로 사용하였고, 양귀비의 전용온천인 華淸池도 지었다. 현재 대명궁은 유적지만 볼 수 있고 흥경궁의 소재지는 이미 흥경공원으로 바뀌었고, 화청궁은 청대와 신중국의 재건을 통해 관광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서안일대에 도성을 세운 역대 제왕은 궁전을 건립함과 동시에 거대한 자금을 사용하여 대규모의 왕릉을 건조하였다. 진시황릉 이외에도 서한 12릉, 당 18릉 등의 왕릉군이 있다. 漢陵은 漢 武帝의 「茂陵」이 가장유명하고, 唐陵은 당태종의 「昭陵」이 규모가 가장 크다. 중국 역대 왕조는 모두 비석을 많이 세웠는데, 따라서 대량의 비석 글씨 자료가 남아 있다. 서안에는 「서예의 고향」이라 불리는 「碑林」이 있는데 중국 역대 석비 2300건을 수장하고 있어 중국 서법 예술의 보고이다.

장안성의 전성시대는 국외와의 무역, 문화교류가 활발하고, 종교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남아 있는 사찰도 대단히 많다. 중국 및 인도, 일본의 많은 승려들은 일찍이 장안에 지내면서 공부한 바가 있다. 유명한 大雁塔, 小雁塔은 바로 당승려 현장법사가 인도로부터 경을 가지고 와서 번역하였던 곳으로 오늘날에 와서도 서안이 관광객을 끄는 중요한 명승고적이 되어 있다.

장안은 일찍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큰 도시로 동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당대 말기가 되면서 조정이 부패하여 농민이 흥기하였으며 전란이 발생해 도시는 파괴되었다. 당조 멸망이후 각 왕조는 개봉, 항주, 남경, 북경 등 동부 평원지역에 각각 도성을 건립하였고 그리하여 장안은 더욱 쇠퇴하였다. 지금 서안성의 크기는 실제 당대 장안성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지만 어떠한 곳들은 아직도 당시의 풍요로움을 보존하고 있다.

서안은 중국 현대역사상 국내외를 놀라게 한 「서안사변」(1936년 12월)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 곳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신중국성립이후 정부는 서안에서 대량의 고적발굴, 수리, 복구의 공사를 진행함과 동시에 도시의 전면 건설을 실시하여 고도 서안의 면모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중국역사문화를 집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관광도시로서 서안의 관광 내용은 갈수록 풍부해지고 여행조건 또한 부단히 개선되고 있어 국내외 관광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역사,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서안에 가보지 못했다면 정말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