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속에서 바라본 중국의 근대와 현대
2003년 5월 20일 중어중문학과
200301208 김 미 경
<活着>과 <十七歲的單車>라는 두 편의영화를 통해 중국의 각 시대상과 그 속에서 적응하고자하는 중국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活着>에서 생존하기 위해 도덕성을 버리고 심지어 자기 존재의 의미마저 잃은 채 살아가던 중국의 혼란기를 보았다면 <十七歲的單車>에서 중국의 중심인 北京의 오늘날의 모습과 함께 소외되어져 가는 중국 청소년들의 현실을 보았다. 이렇듯 나는 영화속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주인공들의 삶을 연관하여 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국공내전을 치르는 富貴와 그의 친구들 모습에서 중국인 대부분이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정세에 대한 올바른 눈을 갖추기보다 시대와 대세의 흐름에 편승해 살아가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毛澤東이 제창한 인민주의 사상이 중국 전반에 깔려 있던 빈부의 차를 없애고 평등하게 잘 사는 국가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흑과 백의 논리처럼 혁명사상과 반혁명사상은 엄격하게 구분되었고 인민계급과 지주계급 역시 그러했다. 富貴가 혁명에 참여했다는 증표를 가보인냥 액자 속에 고이 끼워두는 장면과 도박 빚으로 집을 잃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우리는 평범한 인민이라고 다짐하는 장면에서 당시 인민으로서 혁명주의 사상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에게 생존의 한 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주위의 생활을 의식하며 毛澤東 만세를 부르짖는 모습에서 당시 그의 존재가 중국인들에게 우상 그 이상이었음을 말해준다. 50년대는 대약진 운동의 시기로 경제의 발전을 기치로 삼고 밥 짓던 솥까지 몰수해 재래식 방법으로 수 만개의 제철소를 만들었다. 많은 이가 이 일에 종사하고자 하였고 富貴역시 제철소의 일에 참여코자 그림자극을 해보이겠다고 자청한다. 이러한 모습에서 당시 중국인들이 철에 대해서 큰 가치를 두고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철의 생산이 혁명주의 노선과 함께 중국 경제의 부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의 뒤편에는 아주 큰 아픔이 있었다. 富貴 아들의 죽음이 그것인데 유경의 죽음의 근원에는 毛澤東의 혁명주의 노선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실천해야 한다는 대중 집회 방식은, 밤낮없이 철강생산에 전념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따뜻한 물을 공급하는 엄마를 따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유경을 깨워 학교로 부른다. 그리고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추월하자’는 대약진 운동의 구호는 온 마을사람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노동한 결과인 거무튀튀한 철강으로 인해 웃지 못할 코메디가 되고 만다. 여기서 중국인들의 철의 생산 방식에 대한 무지와 효과적인 정부의 지원이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진정으로 인민과 함께하는 주체가 아니라 지배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毛澤東을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해한다. 딸 봉화의 결혼장면에서 毛澤東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 사위될 이가 富貴의 집을 개조해 毛澤東의 초상화로 도배해 놓는 장면 등 곳곳에서 그의 존재가 확인되며 그가 인민에게서 우상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진솔해 보이지 않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 毛澤東의 사상을 거부할 수 없음에서이지 진정으로 그의 사상을 옹호하고 대변할 인민이 대부분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영화에서 보여준 중국인민 대부분의 생활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또는 일방적으로 습관화되어 毛澤東을 숭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연스러운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60년대는 문화대혁명의 시기로 전통적인 가치와 전통적인 것을 공격했으며 혁명을 주창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거리에는 붉은 완장을 한 홍위병들이 행렬이 이어졌고 집집마다 오래되고 낡은 것은 모조리 불태우라는 것에 응해야만 했다. 국공 내전과 대약진 운동을 무사히 넘긴 富貴의 그림자극이었지만 문화대혁명의 난관은 넘지 못하고 도구를 불태워 버린다. 중국인들은 오래된 것에 대한 가치 즉 전통이라 불릴만한 것들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직업에 관한 것일지라도 시대의 요구에 거부할만한 힘이나 능력이 인민에게는 없었다. 중국인들은 생존의 전략으로 암묵적 수긍을 선택한 것이다. 봉화의 죽음 또한 毛澤東의 혁명주의 노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동자만이 건강한 심신을 가졌고 전문가는 반동이라는 문화대혁명의 사유방식은 병원에서 의사들을 몰아내고 간호학교 학생들이 진료를 담당하는 사태를 가지고 온다. 병원을 이용하는 국민 대부분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이루어진 독단적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들 앞에서 그들은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또한 당원의 숙청이라는 미명아래 공산주의 혁명 지도자였던 이들이 단번에 반동자로 몰리는 모습을 보고도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인민들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을 질타하고 멀리할 뿐이었다. 어려운 시절 중국인들로 하여금 삶에 있어 여유와 온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하루하루 불안 속에서 이기적으로 생활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현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인생의 슬픔 가운데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이 가장 크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富貴는 살아간다. 그 밑바탕에는 생존 이외의 다른 목표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평범한 인민의 낙천적인 인생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에겐 공산주의 정치가 됐건 기차와 비행기의 과학 기술의 시대가 됐건, 그저 미래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그 비전을 가다듬으려 하지도 않는다.‘공산주의가 좋지 그것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걸로 하지’이런 사고방식은 중국인의 열악한 국민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毛澤東의 사상적 오류가 중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고는 하나 중국 인민들의 안일하고 기회주의적인 국민 의식 또한 중국의 발전을 늦추는 커다란 요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十七歲的單車>에서는 오늘날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인 北京을 중심으로 영화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배경적 요소들에 중점을 두어 보았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후통 모습이다. 十七歲的單車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쫓고 쫓기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北京의 골목이 한국 도시의 막다른 골목과는 달리 서로 통하기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국내의 영화에서 보기 힘든 장면 중의 하나로 중국 그것도 北京의 후통의 모습은 인상에 남을 만하다. 빌딩 회전문도 쓸 줄 몰라 쩔쩔매는 시골 소년이 대도시 北京에서 맞닥뜨린 모든 휘황찬란한 것들-음악이 흘러나오는 호텔 화장실이나 우유처럼 흰 피부의 도시 여성처럼, 이 자전거는 소년을 단번에 사로잡는 北京 이미지다. 이러한 순수한 구웨이의 모습 속에서 1960년대 경제개발 정책으로 한국의 농촌 청년들이 서울로 상경해 얻었을 불안감과 기대감 같은 감정들이 느껴져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영화속에서 본 北京의 모습은 깨끗한 도로와 외제차, 자전거와 골목들, 활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전형적인 北京 도시인들, 도시 생활을 꿈꾸는 시골 사람들로 나타낼 수 있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중국에서 北京은 여전히 번잡하며 오히려 역동적으로 보인다. 이처럼 현대 중국인들이 공식적이고 사무화되는 인간관계 속에서 정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음을 보았다. 또한 영화 속에서 새삼 느끼게 된 것은 중국인들이 느끼는 자전거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된 점이다. 비단 구웨이가 보이는 자전거에 대한 집착 때문만은 아니다. 자전거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에게 있어 자전거는 꿈의 물건이며 레포츠의 도구가 아니라 생활 필수 교통수단이다. 중국인들은 저마다 좋은 자전거를 가지길 열망하며 대부분이 자전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새 자전거를 사는 일은 거의 없고 중고를 사거나 지안처럼 장물을 매입하는 일이 더 흔하다. 영화를 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현대 중국 청소년들의 일면을 지안에게서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부모들 자신은 굳어진 교육 혹은 교육의 부재로 인해 공감과 대화가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점점 울타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구웨이의 내성적 행동은 중국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억압받던 중국의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듯이 구웨이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표현할 줄 모르고 부당한 대우에 저항할 줄 모른다. 그에 반해 지안은 행동의 표출에 적극적이며 자신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에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이는 현대 중국인의 의식이 성장했음을 말해 준다. 주인공들이 쫓기는 가운데 스쳐 지나가는 태극권을 하는 모퉁이의 노인은 옛 중국 전통을 지향하는 기성세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北京은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혼재해 갈등을 빚어가고 있는 것이다. <活着>에서 중국의 근대사와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적나라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것은 과거 한국전쟁을 치르고 난 후의 북한의 이면을 중국의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시대배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富貴와 그의 가족들의 모습에서 당시 중국인들의 경제적 궁핍과 억압된 생활을 예상할 수 있었다. 또한 <十七歲的單車>에서 급속히 변해가는 현대 중국에서 전통적이고 가장 중국적인 것의 가치에 소홀해져 가는 현실을 보았다. 두 작품을 접한 것은 중국의 근대에서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의 의식이나 사상, 경제적 자립도 등 중국인과 그들의 생활방식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