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비평문

 

 

네 도시를 통해 바라본 중국, 중국인

 

2007년 6월 22일  중어중문학과  200701141  문  유  찬  MunYouchan

 

《현대 중국 문화 체험 - 네 도시 이야기》는 비교적 부담스럽지 않은 양의 한 권의 책 안에 중국의 네 도시 北京, 上海, 香港, 台北의 지리, 역사, 문화, 영화 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현대에 막 들어서는 20C 초의 중국과 근래의 중국을 비교한 점과 당시 중국과 중국인의 모습을 문학과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고찰한 점은 자못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직접 네 도시를 탐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가적인 효과 말고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화하는 중국과 중국인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우선, 北京 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작고 조용한 北京’이라는 러시아 시인 에로셴코의 말이다. 北京은 明•淸이래 황가의 도시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라는 생각 때문에 단순히 크고 발달한 땅이라고 여겼는데 작고 조용하다고 하니 이상하였다. 그 원인은 1920년대 北京의 지식 계급 사이에서 형성되었던 대가족이나 동향 근친자에 의한 공동체인 사합원 공동체에 있었다. 여러 지방에서 모여든 대학 학생들이 지연․혈연으로 친밀해져서 사합원 공동체를 이뤄 방원으로 이야기하고 고향의 요리를 먹었다고 한다. 우리로 따진다면 경상도 사람이 서울에 대학을 가서 같은 경상도 출신 사람들을 만나 반가워하며 경상도 방언으로 대화하면서 함께 자취하는 등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아주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이런 사합원 공동체가 인민공화국 시기에 들어 쇠퇴하고 ‘단위’ 사회 체제로 변화한 것은 안타깝다. ‘단위’ 사회는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제적이고 개방적이라기보다는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단위’ 내에 우체국, 은행, 병원, 상점 등 완결된 공간을 형성하여 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겠지만 자유로운 유동이 불가능해 삭막하고 쓸쓸한 느낌을 자아낸다. ‘단위’밖의 공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강한 시민 의식을 형성하는데 무리가 있다. 최근에 중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범죄 행위를 보고도 아무도 피해자를 도와주지 않고 못 본 체하며 지나가버리거나 구경만 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란 적이 있는데 이는 ‘단위’사회가 초래한 부작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폐쇄성 짙은 ‘단위’공동체에서는 미디어보다 입 소문이 더 설득력이 있나보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발달하나 시대에 그것도 땅이 넓은 중국에서 입소문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는 그만큼 중국 사람들의 중국 언론에 대한 신뢰가 많이 낮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이 아닐까. 北京에 유학 가 있는 친구에게 한 때 들은 바로는 중국 언론은 당의 잘한 점은 부각시켜 말하고 잘못한 점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문이나 뉴스가 이렇듯 당의 규제 아래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입소문이 더 낫다는 표현은 수긍하기 어려운 허황된 말만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언론이 올바른 정보 전달이라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중국 사람들의 알 권리를 충족하지 못하자 르포르타주 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도 의미 있는 사실이다.

다음 도시인 上海는 보통 경제와 상업, 무역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방명주 및 수많은 마천루가 늘어서 있는 지금의 上海가 있기까지 그 모습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구미의 조계 도시에서 내셔널리즘의 발흥지로, 중일 전쟁 때에는 일본군 점령지에 떠 있는 외딴 섬으로 변화하였다가 人民共和国 설립 이후 20c 후반부터는 개혁․개방 정책으로 다시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된다. 이만큼 上海가 발전한 데에는 문학과 영화와 같은 문화의 역할이 컸다. 上海에서는 鲁迅, 胡适 등의 저명한 문학가 외에도 巴金과 같은 신인 작가가 많이 출현하여 문학을 꽃피우고 胡风 등 직업 비평가도 다수 나타나 上海가 문화 중심지로 성숙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등의 혼란 속에서 터진 봇물처럼 밀려드는 서양 문물 아래 겪어야 했던 중국인의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깊이 고찰하고 조명했던 것 역시 上海에서 이루어졌던 문학의 특징 중 하나이자 중요한 역할이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시 上海 문예계에서 여성 작가의 수가 크게 늘어난 사실이다. 대표적인 작가로 张愛玲을 들 수 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여성 작가들이 출현하여 그 뒤를 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여성 해방과 같은 근대적 시민 사회의 이념이 上海에서 일찍 깨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을 대변하는 좋은 예가 모던 치파오의 등장이다. 그동안 현재의 치파오를 중국 전통의 고유 의상이 계속 이어져 온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맵시 있게 개량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茅盾의 소설 『子夜』에서는 30년 이래 시골에 살던 노인이 모던 치파오를 보고 그 변화한 모습에 깜짝 놀라고 급변한 근대도시 上海에 충격을 받아 급사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다. 노출이 많아진 모던 치파오를 통해 여성의 노출을 허용하지 않았던 전통적 인식이 上海에서는 이미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上海의 사회적 인식 수준이 그만큼 많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上海는 세계 최초의 영화가 상영된 다음해에 上海에서 바로 상영되고 40여개의 중국 자본 영화사가 집중되어 있었을 만큼 영화의 황금기를 누렸다. 당시 上海에서는 1928년부터 1931년까지 400여 편의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하루 관객 수만 100만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上海를 영화의 도시라 부르는 것이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같은 上海에서의 영화의 인기는 지식인들의 의식 고양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무엇보다 上海가 산업․금융뿐만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에도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도시인 香港은 1824년 청조로부터 영국에 할양되어 오랫동안 지배를 받았던 도시이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독자적인 면을 구축하기보다는 서양이나 대륙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香港의 지식 계급이 오로지 대륙의 신문학을 소개하거나 모방하는데 그쳐 香港 스스로를 묘사하는 일이 없었다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일제 강점 하에서도 우리 고유의 것을 중시하고 우리 스스로에 대해 집중적으로 글을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문화의 사막’이라고까지 불리던 香港은 1970년대 말에 들어 비로소 ‘香港문화’, ‘문화의 오아시스’라 자칭할 정도로 문화 산업 발전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香港 시정국에 추천되는 대표적인 문화 양식이 그 기원이 이탈리아에 있는 발레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음으로 인해 넘지 못한 香港의 한계라고 여겨진다. 서구에 원형이 있고 그것과 특별히 차별화되어 바뀌지 않은 형태 그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香港의 문화’라고 과연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보다는 1980년대 등장한 香港문학과 香港영화가 진정한 ‘香港문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소설로 나와서 후에 영화화된 작품 『입술연지』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30년과 1980년 사이의 50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1997년 영국이 중국 대륙으로의 香港 반환 후 50년 동안의 ‘1국 2체제’에 대한 香港인의 불안함, 당시 香港으로 밀려드는 대륙인들로 인해 형성된 香港 아이덴티티 문제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香港인의 삶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香港의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바쁜 사람들을 위해 왼쪽을 비워두고 오른쪽에 서는 것이 규칙이라는 사실이다. 요즘의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 반가웠다. 香港의 바쁘고 활기찬 모습과 그에 걸맞게 질서가 구축되어 있는 모습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네 번째 도시 台北는 台湾의 수도로서 역사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경험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읽는 동안 일본인인 저자가 다소 자국을 옹호하는 시선으로 台湾과 台北를 서술하고 있다고 느꼈다. 台北의 도시 계획, 인구 증가, 교통의 발달 모두 일본의 힘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심지어 일본이 台湾에 강제적으로 도입한 국어인 ‘일본어’가 台湾 규모의 공동체 의식 형성과 내셔널리즘 확립에 도움을 주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台湾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황민화하여 묘사하였다고 말하고 그 예로 周金波의 『지원병』을 들고 있다. 이 책에서는 台湾 청년들이 지원병으로 전장에 나가 피를 흘림으로써 일본인과 대등하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 주변 지역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아래 台湾 사람들이 스스로를 황민화하였다는 것을 이 작품 하나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겪었지만 꼭 친일파와 같이 황민화를 주장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애국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은 반외세를 거세게 외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자국의 台湾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던 우리나라의 입장을 생각하면 좀 거북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台湾과 台北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에 동서 냉전 구조 속에서 미국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 급격히 산업화, 서구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270만 명의 台北에 1996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이 없었다는 사실은 뜻밖의 일이라 놀라웠다.

아직도 주변에는 최근 들어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질투심 섞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중국의 약진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한 사람이었으나 이 책을 읽고 이제까지 품고 있었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그릇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중국은 쓸데없이 땅덩어리만 크고 인구만 많은 나라라든지 중국인은 게으르고 더럽다는 막연한 부정적 인식은 역사 속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과 같은 요인해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과거의 중국과 현재의 중국을 혼동하는 시대  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리고 설사 과거의 중국이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잠시 덮어썼다 할지라도 거기엔 중국 나름의 문화와 배경에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점들은 문화적 상대주의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사실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미개하고 중국인의 삶의 우리의 것보다 떨어진다고 무시하는 사람들조차도 우리나라가 현대에 막 들어섰을 때 겪었던 가난, 무질서, 더러움, 삶의 질의 낙후를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 우리의 모습이 현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듯이 오늘의 우리의 모습과 현재 중국인의 모습 역시 큰 차이가 없다는 인식을 이 책을 읽으면서 갖게 되었다.

실제로 네 도시를 직접 탐방한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간접적으로나마 네 도시에 대해 몰랐던 점을 많이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여러모로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직접 네 도시를 탐방하여 책에서 소개했던 부분들을 비롯해 더 많은 것을 온 피부로 느껴보고 싶다.


참고문헌
후지이 쇼조 저, 백영길 역, 《현대 중국 문화 체험 - 네 도시 이야기》, (서울: 소화출판사, 2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