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어문개혁운동

 

 

1985.7.  김 혜 준

 

 

1. 머리말

 

중국어음의 표음은 병音法의 입장에서 보아 單병法, 雙병法, 三병法, 四병法의 차례로 발전해 왔다.1) 즉, 한 개의 부호(=글자)로 하나의 음을 나타내다가, 漢末에 이르러 聲母와 韻母를 대표하는 두 개의 글자로 하나의 음을 표시하는 反切의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中華民國에 와서 音位制와 音素制를 혼용한 聲母ㆍ韻母ㆍ介母의 「注音符號」를 정식으로 쓰게 되었으며, 中華人民共和國에서는 다시 어음을 4개의 음소로 구분하여 표기하는 《漢語병音方案》에 의한 체계를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어 표현수단으로 본다면, 甲骨文ㆍ金文ㆍ隷書ㆍ楷書 등으로 그 글자체가 변화해 왔다고는 하지만 明末에 이르기까지 한자 이외의 방법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없었으며, 또 새로운 시도가 나타난 이후로도 지금껏 아직 개혁의 과정에 있을 뿐 새 문자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음운론적으로 단음절어이며 의미론적으로 고립어라는 특성을 가진 중국어를 표기함에 있어서, 특히 개념전달에 중점을 두게 됨으로써, 一字一音一義의 표의문자를 그 수단으로 삼게된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하겠다.2) 그러나 점차로 언어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비록 의미전달과 문화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하였지만 표음기능이 극도로 빈약한 한자의 사용은, 언어와 문자가 분리 발전하도록 만들었다. 이리하여 필연적으로 어문이 불일치하고 각 지방의 음이 크게 다른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한편, 문자 자체로서도 구조의 복잡함과 자수의 과다함은, 전통적으로 교육의 보편화와 전체적 문화의 향상에 결정적 장애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문자의 기계화 요구와 선진기술 습득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의 문자 개혁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아직도 한자의 사용이 언어, 문자생활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겠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중국문자 개혁의 과정을 살펴보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그 득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2-1 문자개혁의 태동과 淸代의 문자개혁운동

 

2-2-1 문자개혁의 태동

反切의 결점을 보완, 개량하기 위한 노력은 明朝에 와서도 여전하였으나 차츰 注音符號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전해지지 않으나 明ㆍ淸代에 方以智ㆍ劉獻廷 등이 병음 방법을 제창한 바 있고, 공自珍이 중국 18성의 방언과 滿蒙 등의 언어를 수집하여 《今方言》이라는 책을 편찬하려 하였다.3) 한편 17세기초 이태리 선교사 Matteo Ricci나 프랑스 선교사 Nicolas Trigault는 로마자로 중국어 음운을 표기하어 전도 목적에 사용하였다. 즉, Ricci는 《程氏墨苑》(1605)이라는 책과 《坐隱變譜》라는 책에 각각 로마자와 한자를 대조한 문장 및 로마자만으로 작성한 글을 남기고 있으며, Trigault는 자신의 저서 《西儒耳目資》(1626)에서 중국어의 음운을 5개의 「自鳴」(모음)과 20개의 「同鳴」(자음)으로 표기해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시도들은 아직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었을 뿐 큰 영향력을 갖지는 못하였다.

18세기 말엽 부터 프로테스탄트에 속하는 선교사들이 해안을 따라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포교의 목적으로 각 지방의 土語를 연구하여 로마자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로마자라 불리우는 이러한 표기체제는 일반 기독교 신자에게도 상당히 널리 보급되었으며, 그 노력의 결정으로 후일 Robert Morrison의 《廣東語詞典》(1828), 메드하스트의 《福建語詞典》(1852), 에드킨즈의 《上海語文法》(1853) 등이 출판되었던 것이다.4) 이와 같은 바탕위에, 淸朝에 영국대사관 중문비서로 있던 Thomas Francis Wade는 특히 Morrison의 특점을 계승하고 書法을 더욱 간략화하는5) 한편 英ㆍ佛ㆍ獨語의 제요소를 고려한 Wade System6)을 창안하여 《語音言自彌集》(1867)을 발간하였다.

이렇듯 서양인에 의한 중국어의 음표문자 표기화는, 1840년 아편전쟁 이후로 문자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중국지식인을 크게 자극하여, 이후 중국인 자신에 의한 수많은 시도가 나오게 되었다.

 

2-2-2 切音運動

중국인에 의한 첫번째 시도는 福建人 盧戇章에 의해서였다. 그는 일찌기 夏門에서 통용되던 교회로마자를 깨쳤었다. 이후 그는 이에 영향을 받아, 선교사들이 성경을 위해 山西省, 福建省 일대에서 채집한 土語를 표음한 「話音字」를 참고하여,7) 福建音을 중심으로 총 55개 자모로 구성된 로마자 응용의 표음문자 「中國第一快切新字」를 고안하였다.

盧戇章이 이와 같은 「中國第一快切新字」를 수록한 독본 《一目了然初階》(1892)를 출판하자 잇달아 福建에서 蔡錫勇과 力捷三, 上海에서 沈學, 홍콩에서 王炳耀 등이 각각 비슷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蔡錫勇은 미국의 Lindsley 속기체계를 모방하여 「傳音快字」를 만들어 내었다. 力捷三은 福州 전래의 戚林八音의 음소를 근거하고 「傳音快字」의 체재를 채택하여 1896년 「민腔快字」를 만들고 또 1902년에는 이를 보완 《無師自通切音官話書》를 펴내었다.8) 沈學은 《盛世元音》을 저술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계를 전습하였고, 王炳耀는 1897년 「병音字」를 창안하였다. 당시 工部郞中이던 林輅存은 이상과 같은 것들을 예로 들어 음표문자의 창조를 주장하였으며, 개혁정치를 펴려던 光緖帝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곧 西太后, 袁世凱 등의 쿠테타로 일단 보류되고 말았다.

노일전쟁(1904)이 발발하여 청일전쟁(1894) 이상으로 중국에 심각한 자극을 주게 되어 새로운 정치가 요구되자, 이번에는 盧戇章 자신이 직접 그의 의견을 學部에 제출, 그 활용의 타당성을 심사해 줄 것을 신청하였다. 學部는 보류되었던 林輅存의 서류와 함께 이를 흐지부지하려 하였지만, 盧씨가 이전의 연구를 보완하여 1905년에 한자편방식 자모라 할 「中國切音字母」를 고안 다시 심사를 신청하게 되자, 마침내 譯學館9)에 그 심사를 의뢰하였다. 그러나 심사결과 전국 통용의 표준음표로는 부적합하다는 결정이 내려, 결국 盧戇章 등의 切音運動은 실패하고 말았다.

 

2-2-3 簡字運動

切音運動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을때, 康有爲ㆍ梁啓超와 함께 혁신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하였던 王照가 귀국하여, 1900년에 전통적 反切 방법을 바탕으로 일본의 가다카나 방식에서 착안한 한자편방식의 「官話合聲字母」를 완성하였다. 그의 자모는 성모 50ㆍ운모 12의 雙병法이었는데, 당시의 명문장가 嚴修ㆍ吳汝綸과 管學大臣 張百熙ㆍ北洋大臣 袁世凱 등의 지지를 받아, 자모신문 《병音官話報》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河北省ㆍ東三省ㆍ山東ㆍ山西ㆍ河南省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다.10) 이러한 王照의 활동은, 宣統初 강력한 지지자 袁世凱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쇠퇴하고 섭정인 醇親王의 정치적 배척을 받아 거의 중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모안은 그 이전 부터 이를 권장하고 있던 음운학자 勞乃宣에 의해 계속 추진되었다.

기본적으로 北京音을 중심으로 삼기는 했으나 王照와는 달리 우선 土語를 깨친뒤 官音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勞乃宣은, 北京音에 국한된 「官話合聲字母」에다 성모 6개, 운모 3개, 입성부호 1개를 보태어 《增訂合聲簡字譜》(寧音譜)를 완성함으로써 南京 부근 및 安徽省 일부 어음을 포괄할 수 있게 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여기에다 성모 7개, 운모 3개, 濁音부호 1개를 다시 더하여 江蘇省ㆍ浙江省 일부의 어음을 포괄한 《重訂合聲簡字譜》(吳音譜)를 만든 뒤 결국 각지의 방언을 망라한 《簡字全譜》(1907)를 완성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추구와 병행하여 勞乃宣은 兩江總督의 막료로 재직하면서 南京에 簡字學堂의 설립(1905)을 추진하였고 나중 初等學堂에 이르기까지 簡字科를 부설하도록 「簡字」의 사용을 확대시켜 나갔다. 1908년 西太后에게 「簡字」의 용도를 설명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음으로써 이를 學部에 접수시켰으나 學部 측이 묵살해 버리고 1909년 재차 시도에도 실패하자, 그는 章炳麟ㆍ汪榮寶 등과 北京에서 簡字硏究會를 발기하여 선전활동을 시작하였다. 1910년 資政院이 성립되자, 勞乃宣ㆍ江謙 등 의원 32명이 연서로 學部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각지의 학계와 관리가 제출한 「官話簡字」의 보급을 요청하는 진정서에 따라 資政院이 이를 심사하여 음표문자 제정 등을 의견하였고, 후에 王廉廉이 제의한 《國語統一方法案》이 통과되기도 하였지만 學部는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여론이 비등해지자 1911년 學部가 개최한 中央敎育委員會의 회의안 중에도 《國語音韻釋例案》이 들어가는 등 어느 정도 희망이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辛亥革命이 성공하고 국정 담당자가 바뀌게 되자 「簡字」운동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었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이 되고 말았다.

 

2-2-4 淸末의 기타 자모안

淸末에 있었던 신문자 운동은, 이상에서 말한 것들 외에도 수많은 字母가 만들어졌는데, 대체로 세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로마자모식의 부류로, 음소제에 입각하고11) 순수히 로마자를 써서 성조표기도 로마자로 한 朱文熊의 《江蘇新字母》, 숫자로 성조를 표기한 江亢虎의 《通字》, 오늘날의 것과 비슷한 부호로 성조를 표기한 劉孟揚의 《中國音字書》가 있다. 둘째는 한자편방식으로, 楊瓊ㆍ李文治 공저의 《形聲通》, 劉孟揚의 《天뢰痕》, 李元勳의 《代聲術》, 黃虛白識의 《漢文音與簡易字法》 등이 있다. 그밖의 것들로, 字母標義를 겸용한 林子峰의 《中國新字》, 속기부호에 가까운 劉世思의 《音韻記號》, 滿蒙文과 비슷한 馬體乾의 《串音字標》ㆍ《最新韻府字標》, 악보의 음표를 닮은 鄭鐸靈의 《簡易新字》가 있다.12)

淸末의 文字改革運動은, 무려 28종의 각종 신문자안이 나와13) 그중 몇몇이 상당한 세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구체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의 원인은 대체로 : 첫째, 문자안 자체의 음운론적이 기초가 결핍되어 있었고 ; 둘째, 논리성ㆍ객관성이 부족하였으며 ; 세째, 문자개혁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사회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아직 객관적 조건이 불충분하였으며 ; 네째, 운동 당사자들의 확고한 신념과 추진력이 모자랐던 탓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표음문자의 가능성을 입증해 주었고 문자개혁의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國語의 통일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컸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中華民國의 수립과 더불어 차츰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2-3 中華民國의 문자개혁

 

2-3-1 注音字母

中華民國이 건국된 후 새로 성립한 敎育部는, 1912년 7월 10일 부터 北京에서 臨時敎育會議를 개최하여 《注音字母案》을 다루기로 하고, 이를 위한 讀音統一會章程8條를 제정하는 한편, 部內에 吳敬恒을 주임으로 한 籌備處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1913년 2월에는 정식으로 讀音統一會가 열리고, 章程에 따라 國音과 注音字母를 차례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의안인 國音은, 淸의 李光地가 편찬한 《音韻闡微》에서 각 운의 동음자를 따라 비교적 상통되는 것을 골라 미리 마련한 잠정적인 「記音字母」로 注音하고 표결로 결정하는 방법을 취하여, 마침내 6, 500자가 선택되었다. 그러나 「國音」의 결정 후 음소를 조사 선택하고 자모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견이 나와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이때 제시된 방식은 대략 다음의 세 부류였다. 첫째, 王照ㆍ汪榮寶ㆍ蔡璋ㆍ汪怡 등이 각각 주장한 한자편방식안. 둘째, 盧戇章ㆍ吳敬恒ㆍ馬體乾ㆍ李良材ㆍ邪島ㆍ王최ㆍ胡兩人ㆍ楊麴ㆍ高鯤南ㆍ陳遂意ㆍ鄭藻裳 등이 주장한 각자 자신이 만든 부호안. 세째, 순로마자 사용의 楊曾誥, 로마자와 標義符 겸용의 劉繼善, 로마자 변통의 吳敬恒, 邪島 등에 의한 로마자 활용안이었다.14)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격렬한 토론 끝에 애초 잠정적으로 사용했던 「記音字母」를 정식의 자모로 하자는 馬裕藻 등의 제안이 통과되었다.15) 이것이 곧 「注音字母」이다. 원래 「記音字母」는, 章炳麟이 篆주體에서 착상하여 고안한 聲母 36ㆍ韻母 22개 중에서 혼동될 우려가 있는 자모를 고쳐서 三병法의 聲母ㆍ韻母ㆍ介母 39개 자모로 하여 내놓은 것인데, 결국 이것이 「注音字母」로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國音」과 「注音字母」를 결정하고, 讀音統一會는 5월 13일 敎育部의 공정한 자모 심사 결정을 요구하는 등 7개 항목의 《國音推進方法》을 의결한 뒤 5월 22일 정식으로 폐회하였다. 그러나 袁世凱에 반대하는 제2혁명이 일어나는 등 정국이 어수선해지고 敎育部의 수뇌도 경질되자, 讀音統一會의 결의안은 사장되어 버렸다. 이에 약 1년후 王照의 제자인 王璞 등 在北京會員 25명이 讀音統一期成會를 조직하여 1915년 1월 이의 공포를 서면으로 敎育部에 요청하고, 동년 12월 재차 진정서를 제출하는 한편, 注音字母傳習所를 설치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王璞 등은 계속해서 注音書報社를 부설하여 《注音字母報》라는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였으며, 당시 敎育總長인 張一경도 이에 적극적이어서 어느정도 가능성이 보였다. 그러나 결국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1916년 袁世凱가 병사하여 다시 개혁의 기운이 일어나자, 그동안 국어운동이 부진하여 그 추진자들이 상당한 자극도 받은 바도 있어서, 言文一致와 國語統一이 교육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논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國語를 연구하여 표준을 선정함으로써 교육에 대비하자는 취지에서 1916년 10월에 北京에서 각 성 대표로 구성된 國語硏究會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1917년 제1차 회의를 열어 蔡元培, 張一경를 정ㆍ부회장으로 선출하고 國語硏究調査進行計劃書를 議定하였다. 이런 한편에서는, 1917년 胡適의 《文學改良芻議》로 불붙은 문학혁명이 1918년에는 「國語的文學, 文學的國語」를 내세우면서 국어운동과도 접근하여 개혁의 기운은 더욱더 고조되었다.

이렇게 추세가 개혁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가운데, 吳敬恒은 讀音統一會에서 만든 《國語彙編草》를 보완정리하여 모두 13,000여자를 《康熙字典》의 순서로 배열한 다음 王璞ㆍ馬裕藻ㆍ錢玄同ㆍ黎錦熙 등과 함께 최종 원고를 결정하고 인쇄에 넘기는 한편, 陳懋怡와 같이 敎育部 당국과 담판을 벌였고,16) 이것이 성공함으로써 드디어 1918년 11월 23일 총 39개의 자모로 된 「注音字母」가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2-3-2 國語羅馬字

1918년 11월 23일 「注音字母」가 공포된 후, 敎育部는 12월에 國語硏究會의 건의에 따라 國語統一籌備會17)의 규정을 제정하고 1919년 4월 21일 敎育部 부속기관으로 이를 설립하였다. 張一경이 회장으로 선출된 籌備會는 회원의 대부분이 國語硏究會에도 소속해 있던 관계로, 자연 전자는 정책집행을 후자는 선전공작을 하는 식으로 보조를 맞추어 일을 추진해 나가게 되었다. 籌備會의 주요활동 중 하나는 「注音字母」의 정리였는데, 대체로 唐末 守溫의 36자모 순서에 의거했던 「注音字母」의 차례를 재배열했고, 자모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으며, 「國語」의 성조를 결정한 뒤에는 오늘날과 같은 4성 표기법을 확정지었다.18) 또 1920년 11월 20일 敎育部 훈령으로 《國語彙編草》를 고친 吳敬恒의 《國音字典》을 정식 공포하고, 1930년에는 「注音字母」의 명칭마저 여론에 따라 「注音符號」라 개칭 공포하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활동은 표준어음의 결정과 「國語羅馬字」의 제정이었다.

처음 讀音統一會에서 각 성 대표의 표결에 따라 독음을 결정한 만큼 그것은 일정한 표준도 결여되어 있었고 성조도 통일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1920년 초 張士一이 《國語統一問題》를 발표, 공개적으로 이를 지적하여, 이후 표준어를 北京音에서 취할 것인가 《國音字典》식의 인위적인 國音으로 할 것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國音派와 京音派간의 격렬한 논쟁은 1924년 결국 京音京調로 귀결이 되고, 이로부터 다시 《國音字典》의 수정이 시작되어 1932년 5월 7일 《國音常用字彙》19)가 공포되었다.

「國語羅馬字」란 로마자모로 만든 주음체계로, 이것이 정식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籌備會의 제5차 연례대회에서 錢玄同이 《國語羅馬字委員會組織要請案》을 제출하면서 부터이다. 「注音字母」의 제정으로 신문자 운동이 끝나지 않고 이처럼 또 하나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注音字母」자체가 독립적 문자로서의 기능이 부족하고 음운학적으로 불합리한 요소가 있었던 데다가 5·4운동 이후 언문일치를 위한 민족공통어 확립의 사조가 강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멀리는 Mateo Ricci나 Trigault로 부터 가까이는 盧戇章으로 부터 시작된 로마자 활용의 자모안은 이로부터 다시 활발히 논의되었다. 당시 錢玄同ㆍ趙元任ㆍ林語堂ㆍ周辨明 등 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로마자 병음제도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籌備會는 1923년 8월 29일 상기 네 사람과 劉復ㆍ黎錦熙ㆍ汪怡 등의 11명을 위원으로 國語羅馬字병音硏究委員會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때 각 군벌 간의 투쟁이 격렬해져서 정국이 어지러워져 정상적인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이에따라 이들 위원 중 劉ㆍ趙ㆍ錢ㆍ黎ㆍ汪 5명은 따로 1925년 9월 數人會를 조직하여 1926년 9월에는 《國語羅馬字병音法式》을 성안한 뒤 이를 籌備會에 제출하였다. 籌備會는 國語羅馬字병音硏究委員會를 열어 이를 통과시키고 敎育部에 공포를 요청했지만 敎育部는 이에 반대하였다. 籌備會는 11월 9일 단독으로 포고를 내어 일반에게 알리는 한편, 黎錦熙의 《國語模範讀本》ㆍ趙元任의 《最後五分鐘》 등 「國語羅馬字」에 의한 읽을거리를 준비해 나갔다.20)

1928년 6월 국민혁명군이 남북을 통일하고 정권이 바뀌자, 드디어 大學院에서 1928년 9월 26일 國音字母第一式으로 명명된 「注音字母」와의 대조표를 만들어 第二式으로 「國語羅馬字병音法式」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렇게 제정된 「國語羅馬字」는 음운학자들이 만든 만큼 지극히 합리적이기는 했으나 반면 그점이 오히려 일반인에 대한 불편을 야기하였다. 예를 들어, 성조의 표기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일체의 기호없이 로마자만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자연 복잡한 체제가 되도록 만들었고, 결국 사용에 번잡함을 주어, 보급에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이 와같은 점은 정책 당국의 무관심과 더불어 결국 「國語羅馬字」의 보급에 한계를 주어, 지지자들이 각종 출판물을 간행하고 國語羅馬字促進會를 설립하는 등 열렬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표음방법상의 난잡한 현상이 여전하도록 하였다.

 

2-3-3 「拉丁化新文字」운동

「注音字母」와 「國語羅馬字」가 확정될 무렵, 한자를 없애고 표음문자 만을 사용하자는 또 다른 문자개혁운동인 「라틴화 신문자」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다.

1921년 《晨報》의 특파원으로 소련에 갔던 瞿秋白은, 때마침 실시되고 있던 소련의 대대적인 문맹퇴치운동이 라틴자모를 사용하여 크게 효과를 거두고 있음에 자극받아, 자신의 동포를 위한 새 글자 창조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27년 다시 소련에 갔을 때 그는 吳玉章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에 착수하여 1929년 《中國拉丁化字母》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그가 재차 귀국한 뒤에도 소련학자 드라고노프의 협력을 받아 吳玉章ㆍ林伯渠ㆍ蕭三 등이 계속하였고, 1931년 9월 29개 자모의 「拉丁化的中國字母」가 완성되었다. 그들은, 9월 26일 소련 영내에서 화교가 제일 많은 블라디보스톡에서 中國新文字第一次代表大會를 개최하여 이 자모를 통과시키고 13항목의 《중국 한자 라틴화의 원칙과 규칙》을 결정하였다.1932년에는 제2차 대표대회가 열려 새글자의 출판과 교습이 토론되었고, 당시 소련의 한자신문인 《工人之路》ㆍ《碼頭工人》은 라틴화판을 증설하였으며 또 각지에서는 識字班ㆍ傳習所가 만들어지는 등 「라틴화 신문자」는 활발히 보급되었다.

소련에서의 이러한 운동은 중국내에서도 파급되어, 1933년 8월 蕭三의 《中國語書法的拉丁化》가 《國際每日文選》에 소개되고,21) 10월 《言語科學》에 焦風이 《中國語書法拉丁化的問題》를 발표하자 차츰 이에 대한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이후 「라틴화 신문자」는 대중어론자들과 특히 魯迅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고, 이의 연구와 보급을 위한 上海의 中文拉丁化硏究會(1934.8)ㆍ전국적인 中國新文字硏究會(1935.12) 등이 조직되는 한편, 각종 출판물이 쏟아져 나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미 「注音符號」와 「國語羅馬字」를 제정한데다 정치적 동기까지 겹쳐 「라틴화 신문자」운동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中華民國 정부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정세가 변화하자 이를 인정하는 태도를 취할 정도였다.22)

그러나 이러한 것도 잠시 뿐, 「라틴화 신문자」운동은 곧 퇴조하게 되었다. 전쟁이 불리한 상태에서 장기전에 들어가고 정국이 다시 변화하게 되자, 원래부터 소극적이던 국민당 정부 지역에서는 자연히 저조해져 버렸고, 계속 추진해 나가던 공산당 지역에서도 그나마 몇 가지 이유로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농민측에서는 전통적으로 선망해 오던 한자의 학습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지주ㆍ지식인층에서는 첫째로 모든 문헌을 기사해 내는데 의문의 여지가 있고, 둘째로 한자를 이미 습득한 자에게는 재교육이 불필요하고 또 어려우며, 세째로 국가 전체의 언어 통일이라는 선결조건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서 반대를 해왔던 것이다. 결국 「라틴화 신문자」 운동도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이 나 버린 셈이 되었다.

 

2-3-4 簡體字의 공포와 보류

새로운 음표문자를 창조하려는 노력과는 별도로, 비록 이 역시 특별한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한자 자체를 개량해 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22년 錢玄同이 籌備會 4차 대회에서 《減省現行漢字的筆劃案》을 제출하여 이에 따라 漢字省體委員會가 조직되었다. 기대와는 달리 동 위원회는 《國音常用字彙》에 흔히 쓰이는 簡體字 약간을 수록하는 활동에 그쳤고, 이에 1934년 錢玄同은 다시 《搜採固有而較適用的簡體字案》을 제출하였다. 籌備會는 이를 통과시켜 簡體字譜의 편집을 의결하였으며 1934년 6월 《簡體字譜》초고를 敎育部에 보내어 심사를 요청하였다. 몇 단계의 심사 끝에 8월 21일 드디어 17韻 324字의 《第一批簡體字表》가 공포되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러나 이것도 1939년 7월 廣西參議會에서 簡體字에 반대하는 공문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敎育部에 의해 그 실시가 보류되어 버렸다.23)

결과적으로 한자의 개량운동은 문자개혁의 주류를 이루지도 못하였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도 못한 셈이다. 그러나 후일 중국의 문자개혁정책에서 새롭게 시도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고 본다.

 

2-4 中華人民共和國의 문자개혁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자마자 上海의 《時代月報》 副刊인 《語文週刊》에서는 적극적으로 어문혁명에 관한 글을 시작했다. 또 1948년에는 라틴화 중국글자운동 20년 논문집으로 倪海曙가 엮은 《中國語文的新生》이 간행되는 등, 한동안 주춤했던 문자 개혁의 기운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정식으로 수립된 中華人民共和國 정부는 강력하게 문자개혁운동을 실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臺灣으로 옮겨 간 中華民國 정부는 「國語」의 보급과 한자의 정리에 노력하고 「注音符號」의 사용을 보편화시키기는 하였으나 한때 羅家倫 등이 簡體字의 사용을 주장했다가 실패한 것 외에는 특별한 진전이 없었다.24) 따라서 이제 문자개혁은 中華人民共和國 정부가 주도하게 된 셈이었다.

 

2-4-1 漢字병音方案

1949년 11월 10일 北京에서 文字改革協會가 창립되어 라틴자모 표기방안, 한자 개혁, 漢語와 그 통일문제의 연구 등을 내세우며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정부 측에서는 1951년 12월 26일 政務院의 文化敎育委員會가 中國文字改革硏究委員會 설립을 의결하여, 馬敍倫ㆍ吳玉章을 각각 정ㆍ부주임으로 하는 中國文字改革硏究委員會25)가 1952년 2월 5일 정식 발족하게 되었다.

文字改革會 설립회 석상에서 郭沫若ㆍ吳玉章 등이, 毛澤東의 지시에 따른 민족 고유형식의 병音字母 제정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곧 문자개혁의 기본방침이 되었다. 이 점은 1년 후 3월 25일 제3차 전체위원회 토론에서도 확인되었다.26) 이러한 기본 원칙에 따라 1952년 3월 병音方案組는 「注音符號」를 기초로 하여 개수하자는 결정을 내리고 일차적으로 《中國병音文字的字母草稿》를 완성했다. 그러나 쓰기가 어렵다는 등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1955년 2월 부터는 신설된 병音方案委員會가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병音方案委員會는 한자 필획식의 연구를 담당하는 甲組와 국제통용자모의 연구를 담당하는 乙組로 나누어 구체적 작업에 착수한 결과, 甲組는 4종을 乙組는 라틴자모식과 러시아문자식의 2종을 마련하였고, 병音方案委員會 전체 토론에서 라틴자모식이 최종 선정되었다.

1955년 10월 병音方案委員會에서 제시된 라틴자모식이 제1차 全國文字改革會議에서 의결되었다. 文字改革會는 이를 공개 토론에 붙여 관계기관과 전국 각지의 의견을 참조한 뒤 1956년 8월 수정안을 國務院에 송부, 심사를 요청했다. 國務院은 다시 漢語병音方案審訂委員會를 설립, 이를 심사하여 1957년 10월 《漢語병音方案修正草案》을 작성하고, 이후 몇 가지 단계를 거쳐 1958년 2월 11일 제1기 全國人民代表大會 제5차 회의에서 이 안이 의결됨으로써 정식 추진하게 되었다. 이로써 드디어 1958년 8월에 26개의 알파벳 전 자모를 채용하여 21개의 성모 35개의 운모로 구성하고 격음부호와 성조부호를 사용한 《漢語병音方案》이 정식 공포되었다.

결과적으로 애초에 내세운 민족 고유형식이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 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국제 공용의 효과와 실용상의 용이함이 국가 발전에 유익하므로 결코 애국주의에 어긋나지 않으며, 또 이 방안의 자모가 최종적인 병음문자는 아니고 단지 한자의 주음과 표준어의 추진에 이용될 것임을 들어, 여전히 궁극적 표음문자의 창조를 위해 연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7)

 

2-4-2 漢字簡化方案

문자 개혁의 최종 목표를 표음문자의 실행에 두고 있지만 이의 추진을 위해서는 한자의 정리 또한 필수적이라 인정하고, 中華人民共和國은 漢字의 簡化ㆍ異體字의 整理ㆍ常用漢字의 制限 등 다각도로 이를 검토하였다.

1950년 敎育部 社會敎育局에서는 《常用簡體字登記表》를 편집하였고, 1951년 5월에 설립된 中國文字改革硏究會籌備會에서는 《第一群簡體字》를 편성하였다. 1952년 3월 부터 활동을 개시한 文字改革會의 漢字整理組는, 《第一群簡體字》를 기초로 개수작업을 해 나가기로 결정하여 이를 수정 정선한 簡體字 500개를 제시하였지만, 불편하다는 점이 지적되자 다시 연구에 착수하였다. 1954년에는 《798個漢字簡化表》ㆍ《擬廢除的400個異體字表》ㆍ《漢字偏旁手寫簡化表》로 구성된 《漢字簡化方案草案》을 마련하였다. 1955년 1월 부터 이 초안은 각계의 토론에 붙여져 다시 수정을 거친 다음 9월에 國務院 漢字簡化方案審訂委員會에 제시, 10월에 512개의 簡化字와 56개의 簡化偏旁을 수록한 《漢字簡化方案修正草案》이 통과되었다. 10월 중순에는 第一次全國文字改革會議에서 526개의 簡化字와 54개의 簡化偏旁으로 수정된 《漢字簡化方案》이 통과되고, 1956년 1월 28일 최종적으로 515개의 簡化字와 54개의 簡化偏旁으로 된 《第一次漢字簡化方案》이 정식 공포되었다.

異體字 문제는 이와 별도로 진행되었다.28) 1955년 10월의 全國文字改革會議에 《第一批異體字表草案》이 제출되었고, 이것이 심사 끝에 통과됨으로써 12월에 《第一批異體字整理表》가 공포되고 1,055개에 달하는 異體字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1964년 5월 文字改革會는 그동안의 의견을 집약하여 《簡化字總表》를 간행하였다. 그후 1977년 12월에는 그동안 사회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簡體字 등을 수집ㆍ정리한 --- 248개와 605개의 簡化字를 각 1, 2표에 실어 --- 《第二次漢字簡化方案》을 발표하였다.

 

2-4-3 普通話

문자개혁의 기본 요건이 되는 漢語의 규범화 작업은 「普通話」의 이름으로 1955년 부터 본격화하였다. 이 해에 열린 全國文字改革會議 및 現代漢語規範問題學術會議는 漢民族 공통어로 「普通話」를 확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普通話」란 '北京 어음을 표준어로 하고 北京 말을 기초로 한 전형적인 現代 白話文 저작을 어법의 규범으로 삼는 민족 공통의 언어'29)라는 것이다.

'北京 방언을 구사하는 교육받은 중국인(중등학교 이상)의 일상어'를 표준으로 삼은 「國語」와 이 「普通話」를 비교해 본다면, 전자가 순전히 北京語를 골격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후자는 그 위에 北方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 요소를 포함하여 다른 중국 방언, 문언 및 외국어로 부터 필요한 말을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30)

일단 표준어를 결정하자 中華人民共和國 정부는 이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國務院의 지시에 따라 각 省과 市에는 推廣普通話工作委員會가 생겨났고, 초중등학교를 비롯한 각급 관련기관에서도 普通話를 교육시키기 시작했으며, 이해 성립된 普通話審音委員會는 1,100여개의 異讀音, 190여개 地名의 讀音을 심사하여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3. 맺음말

 

서구문명이 본격적으로 밀려 들어온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지식인은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문자개혁에 열성적인 노력을 쏟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정국 불안, 사회적 여건의 미성숙 등 제요인으로 결정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中華民國이 수립되자 注音符號, 國語羅馬字 제정 등 문자개혁운동은 차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제 중국 문자의 병음문자화를 궁극적 목표로 中華人民共和國이 이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中華人民共和國의 문자개혁 곧 어문개혁에 대한 노력은 현재, 1955년 표준어인 「普通話」의 결정, 1956년과 1977년의 《漢字簡化方案》 공포, 1958년 《漢字병音方案》의 공포 등에서 보듯이, ① 「普通話」의 普及 ② 漢字의 簡化 ③ 漢語의 병音化 이 세 가지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처음에는 簡體化 단계를 거칠 것 없이 직접 병音化에 착수하자거나, 일단 簡體字의 실시로 조건이 성숙한 다음 차츰 병音化에 들어 가자거나, 簡體字와 注音符號를 교묘히 결합한 종합문자를 과도기적으로 사용하자거나 하는 이견도 있었지만, 中華人民共和國은 이를 모두 물리치고 簡體化와 漢字의 注音化(지금으로서는 「병音方案」)를 실시하면서 병음문자의 전적인 사용으로 나아간다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외국인의 중국어 학습 등 각 방면에서는 이미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는 있다. 그러나 병음문자의 정착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그들 자신도 단어의 연서 문제ㆍ동음자 구별 문제ㆍ단어의 정형화 문제ㆍ한자 중간의 문언 성분과 외래어의 표기 문제 등이 먼저 해결되어야 비로소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31) 문자개혁이 필수적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계속해서 강력한 추진이 요구되겠지만, 결국 어느 논자가 표현한 대로 문자개혁의 전도에 대한 맺음말은 '앞으로도 오랜기간 항해해야 할 폭풍우 속의 작은 배'32)일지도 모른다.

 

 

4. 참고 문헌

 

1) 공재석, 〈중국어음표기법연구〉(별책), 《중국학보》 제24집, 한국중국학회, 1984

2) 성원경, 〈중공간화자에 대한 한국속략자와의 비교고찰〉, 《어문연구》 제30집, 한국어문교육연구회, 1981, 10

3) 김동진, 《중국의 한어병음방안평고》, 외대석사논문, 1981.2

4) 이병한, 〈중공의 한자간화방안과 실천〉, 《동아문화》 17집,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1980.6

5) 허우성, 〈중공의 '문자개혁'과 한자문제〉, 《어문연구》 제25집, 한국어문교육연구회, 1980.5

6) 안병찬, 〈표음한자에의 길〉, 《중국문제》 6집,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 1978.9

7) 유명규, 〈중국문자개혁의 사적 고찰〉, 《중국연구》 창간호, 외대 중국문제연구소, 1975

8) 노동선, 〈중국문자개혁의 검토〉, 《중국연구》 창간호, 외대중국문제연구소, 1975

9) 허세욱, 〈중국문자개혁의 영향과 그 전도〉, 《중국연구》 창간호, 외대중국문제연구소, 1975

10) 이훈종, 〈중국의 국어국자 정책〉, 《어문연구》 7·8집, 한국어문교육연구회, 1975.5

11) 倉石武三郞, 《한자의 운명》, 김종오 역, 정음사, 1974.12

12) 박동석, 〈중공문자개혁의 방향〉, 《육사론문집》 제17집, 육사, 1972.12

13) 문선규, 〈한자의 운명〉, 《월간문학》 5권5호, 월간문학사, 1972.5

14) 한무희, 〈중국의 한자개혁과 전통문화〉, 《문화비평》 4권1호, 아한학회, 1972.3

15) 황병곤, 〈중국문자 변천의 대세와 간체자〉, 《중국학보》 12집, 학국중국학회, 1971.12

16) 이원식, 〈중국의 한자개혁문제〉, 《사상계》 2권7호, 사상사, 1954.10

17) 노동선, 〈중국문자개혁 60년 운동 약사〉, 《외대학보》 3집, 외대, 1962

18) 이종대, 〈중국어문의 특징〉, 《대동문화연구》 2권6호, 성대 대동문화연구원

19) 김동진, 〈중공의 문자개혁운동 동향〉, 《중국문학》5, 1981.6

20) 장기근, 〈중공의 문자개혁과 한자의 간화문제〉, 《한뫼 허웅 박사 환갑기념논문집》 1978, 12

21) 홍순효, 《중국근대어문개혁운동의 연구》, 성대 석사논문, 1967.2

22) 공재석, 〈한자 간화의 이해〉, 《차주환선생 환갑기념논문집》

23) 姬田光義 외, 《중국근현대사》, 편집부 옮김, 일월서각, 1984.9

 

 

1) 공재석, 〈중국어음표기법연구〉(별책), 《중국학보》 제24집, 한국중국학회, 1984.

2) 倉石武三郞, 《한자의 운명》, 김종오 역, 정음사, 1974.12, P.21.

3) 유명규, 〈중국문자개혁의 사적 고찰〉, 《중국연구》 창간호, 외대 중국문제연소, 1975, P.13.

4) 倉石武三郞, 《한자의 운명》, PP.47-48.

5) 김동진, 《중국의 한어병음방안평고》, 외대석사논문, 1981. 2, P.5.

6) 나중 중국 주재 영사직을 거친 Hebert Allen Giles가 케임브리지 교수 재직시 이를 계승한 영중사전을 내놓아 Wade-Giles식이라고도 불린다.

7) 김동진, 《중국의 한어병음방안평고》, P.6.

8) 유명규, 〈중국문자개혁의 사적 고찰〉, P.14.

9) 北京大學의 전신.

10) 유명규, 〈중국문자개혁의 사적 고찰〉, P.15.

11) 노동선, 〈중국문자개혁 60년 운동 약사〉, 《외대학보》 3집, 외대, 1962, P.33.

12) 유명규, 〈중국문자개혁의 사적 고찰〉, P.18.

13) 이훈종, 〈중국의 국어국자 정책〉, 《어문연구》 7ㆍ8집, 한국어문교육연구회, 1975. 5, P.69.

14) 유명규, 〈중국문자개혁의 사적 고찰〉, P.20.

15) 이 결정의 배경에 대해서는 倉石武三郞, 《한자의 운명》, PP.80-83을 참고할 것.

16) 倉石武三郞, 《한자의 운명》, PP.86-87.

17) 이하 籌備會라고 약칭. 籌備會는 1928년 北伐이 완료된 후 國語統一籌備委員會로 개칭되었다.

18) 자모의 수정과 4성 표기법 확정은 표준어음을 京音京調로 확정한 것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 이어서 살펴 볼 「國語羅馬字」가 병기되어 있고, 다수의 簡體字도 수록되어 있다.

20) 《國語模範讀本》은 1928년 4월에, 《最後五分鐘》은 1930년 4월에 각각 출판되었다.

21) 焦風의 번역으로 소개됨.

22) 「라틴화 신문자」운동은 주로 중국공산당이 주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국민당 정부도 이를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가, 新四軍事件(1941) 이후 국공합작이 사실상 결렬되면서 이를 금지하였다.

23) 현재까지도 中華民國은 簡體字 실시를 보류하고 있는 상태이다. 1953년 6월 中華民國 敎育部는 전문가 15인으로 簡體字硏究委員會를 구성하였고, 1954년에는 立法委員 탁維藩 등 106인이 文字制定法案을 제출하면서 簡體字 사용의 가능성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편견과 결부된 격렬한 반대에 부닥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황병곤, 〈중국문자 변천의 대세와 간체자〉, 《중국학보》12집, 학국중국학회, 1971.12, PP.81-82 참고.

24) 簡體字硏究委員이었던 羅家倫은 이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954년 3월 《中央日報》(臺北)에 〈簡體字 제창의 필요성〉을 발표하여 대중의 여론을 조성하려고 하였지만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밖에 1975년 敎育部 社會敎育司가 4,079자를 로마자화하여 〈國民常用字表草稿〉를 펴내었지만, 이는 단지 연구용이었을 뿐이었다. 안병찬, 〈표음한자에의 길〉, 《중국문제》6집,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 1978.9, P.20 참고.

25) 이하 文字改革會로 약칭. 1954년 12월 23일 國務院 직속의 中國文字改革硏究會로 확대 개편되었다.

26) 박동석, 〈중공문자개혁의 방향〉, 《육사론문집》 제17집, 육사, 1972.12, PP.80-81 참고.

27) 유명규, 〈중국문자개혁의 사적 고찰〉, PP.63-67.

28) 1956년 1월 최종적으로 발표된 〈漢字簡化方案〉은 〈漢字簡化第一表〉ㆍ〈漢字簡化第二表〉ㆍ〈漢字偏旁簡化表〉의 세 가지표로 되어 있다.

29) 《語文學習月刊》,1957, P.1. 노동선, 〈중국문자개혁의 검토〉, 《중국연구》 창간호, 외대중국문제연구소, 1975, P.95에서 재인용.

30) 안병찬, 〈표음한자에의 길〉, P.13 및 P.19.

31) 유명규, 〈중국문자개혁의 사적 고찰〉, P.77.

32) 홍콩의 영문 주간지 《China News Analysis,Weekly Newsletter》의 평론 〈Writing Reform 1963-65〉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Phonetics today are like a little boat on the ocean battered by winds and waves ; it will take a long time to reach port and show result." (박동석, 〈중공문자개혁의 방향〉, P.89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