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대희극 개관


1993.5.20.  우  종  헌

 

1. 들어가며

 

서양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문학의 영역을 세 개의 포괄적인 쟝르로 분류하는 경향이 지속되고 있다. 즉, 시 또는 서정시, 서사시 또는 설화, 그리고 드라마의 분류가 그것이다.1) 반면에 중국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쟝르를 시가詩歌, 소설小說, 산문散文, 희극戱劇2)으로 구분한다. 당연히 각각의 문학은 여타 쟝르와는 구분되는 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중국문학에서는 특히 현、당대문학으로 오면서 각 쟝르의 독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정치와 긴밀히 관련되면서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당대문학 전체의 일반적인 시기구분에 따르고자 한다. 즉 17년시기, 문화대혁명시기, 신시기로 구분해서 중국 당대희극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이전에 용어의 문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문예의 한 쟝르로서 극 문학을 지칭하는 용어로 서양에서는 'Drama'3)를, 우리나라에서는 '희곡'을, 중국에서는 '戱劇'을 각각 사용한다. 서양에서는 'Drama'를 보통 "그속에 인생이, 그 행위의 비개인적인, 그리고 남을 흉내내는 모방형식으로서 담아지는 문학형식이다. 거기엔 배경이 있고 현실적인 장면이 나오고 거기서 실제 행동과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문학 중에서 희곡은 가장 실제에 가까운 것"4)이라 풀이한다. 중국에서는 '戱劇'을 "무대상에서 동작으로 이야기를 표현하여 관중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예술로, 예술형태 중 가장 복잡한 것"5)이라 풀이한다.

희극의 체제는 내용상으로 볼 때 비극, 희극, 비희극이 있고,6) 표현방법상에서 볼때는 연극話劇7), 가극歌劇, 무극舞劇, 가무극歌舞劇, 시극詩劇 등이 있다. 그리고 구조형식상에서 보면 단막극과 다막극으로 나눌 수 있다.8) 여기서는 일단 중국 희극을 연극話劇, 전통극戱曲9), 가극歌劇, 무극舞劇으로 구분10)하여, 각 시기별로 연극, 전통극, 가극의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중국문학에서는 따로 한 부분으로 취급하기도 하는 영화문학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17년시기와 문혁시기의 영화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신시기의 영화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2. 17년 시기의 희극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 정부는 희극 사업을 중시한다. 그래서 1949년에 개최된 제1차 文代會에서는 희극개혁협회가 창립되고, 1953년에 열린 제2차 文代會에서는 희극의 창작방법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이 행해져 당시 희극창작상의 공식화, 개념화의 경향을 비판한다. 쌍백방침의 영향 아래 1956년에 거행된 제2기 전국 연극 경연 대회全國話劇觀摩演出大會에서는 50여개의 우수한 극목이 연출되어 이 시기 희극 창작의 성과를 집중적으로 나타낸다. 1957년 이후 문예계의 반우파투쟁의 확대와 대약진운동 과정 중의 좌경적 교조주의 문예사조는 현실생활과 긴밀히 결합하는 희극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하지만 1960년에 중공 중앙은 농촌사업의 좌경적 오류를 시정하고, 조정작업을 실시하면서 문예계에서도 문예정책을 조정하게 된다. 특히 1961년 周恩來의 문예공작 좌담회文藝工作座談會와 극영화 창작 회의故事片創作會議에서의 연설을 통한 당시 문예계의 좌경적 오류에 대한 수정, 그리고 1962년 연극、가극、아동극 창작 회의話劇歌劇兒童劇創作會議에서 문예계의 좌경적 사조를 깨끗이 일소하고, 현실주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희극창작은 새로운 기운을 맞아 문혁 직전까지의 4,5년 동안 새로운 고조를 맞게 된다.

 

2-1 17년 시기의 연극

연극은 당대 희극문학에서 그 성과가 가장 두드러지는데 17년시기의 연극은 대략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1951년에 제기된 '백화제방白花齊放, 추진출신推陳出新'의 방침 아래 건강한 발전을 했던 시기의 연극은 제재상에서 광범위하고 형식상에서도 비교적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양해진 제재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도시와 노동자의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처음으로 노동생산을 묘사한 극본인 劉滄浪의 〈홍기가紅旗歌〉와 노동자 작가인 魏連珍의 〈매미가 아니다不是蟬〉, 杜印 등의 〈새로운 사물 앞에서在新事物面前〉, 天津부두 노동자가 집단창작한 〈육호문六號門〉, 夏衍의 〈시련考驗〉 등이 있다. 그리고 농촌생활을 반영한 연극은 농업합작화운동이 전개된 후에 점차로 많아지는데 농업합작화 이전의 작품으로는 孫芋의 〈여성대표婦女代表〉가 있고, 이후에 安波의 〈낙민하에 부는 봄바람春風吹到諾敏河〉, 旅大市興臺村業余劇團의 〈인간은 높은 곳을 향해 간다人往高處走〉, 胡丹沸의 〈화창한 봄날春暖花開〉, 海默의 〈퉁소를 불며洞簫橫吹〉 등이 있다. 혁명 무장투쟁을 반영한 것으로는 이만오천리 대장정을 반영한 陳其通의 〈만수천산万水千山〉, 국공내전 과정에서 공산당의 투쟁을 반영한 胡可의 〈전투속에서의 성장戰鬪裡成長〉, 〈영웅진지英雄陣地〉, 한국전쟁 속에서의 중국 공산당의 모습을 반영한 宋之的의 〈평화보위保衛和平〉, 沈西蒙의 〈양근사楊根思〉, 胡可의 〈남으로 옮겨간 전선戰線南移〉 등이 있다. 이상의 제재 외에 지식인의 사상변화를 묘사한 曹우의 〈쾌청한 하늘明朗的天〉, 애정과 가정생활을 그린 魯諺周의 〈귀환歸來〉과 岳野의 〈동고동락同甘共苦〉, 그리고 간부의 관료주의를 비판한 何求의 〈신국장이 오기 전에新局長到來之前〉, 소수민족의 생활을 반영한 汪鉞의 〈캉불 초원에서康布爾草原上〉 등이 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민중의 정신상의 변화를 그린 작품으로 老舍의 〈용수구龍須溝〉와 〈방진주方珍珠〉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시기 연극창작에도 보편적인 문제는 존재했으니, 하나는 공식화、개념화로 작가가 정치운동과 선전의 필요에 따라 주제를 확정하여 제재를 선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스토리에 대한 묘사에만 치중하여 인물창조를 홀시하는 등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1957년의 반우파투쟁의 확대, 1958년의 대약진운동, 그리고 1959년의 수정주의 비판 이후로는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이 대부분 비판을 받으면서 엄중한 좌절을 겪게 된다. 그래서 이때에는 연극 창작에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먼저 劉川의 〈열화같은 붉은 마음烈火紅心〉, 王煉 등의 〈공산주의 개가共産主義凱歌〉 등과 같이 현실생활, 특히 대약진과 인민공사화를 제재로 한 많은 작품에서는 과장의 흔적이 명확하고, 거짓되고 공허한 영웅적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속에서도 현실생활을 비교적 잘 묘사한 작품으로 王煉의 〈꽂이 핀 고목枯木逢春〉, 老舍의 〈여점원女店員〉 등이 있다. 또 다른 현상은 역사극이 대규모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老舍의 〈찻집茶館〉, 田漢의 〈관한경關漢卿〉, 〈문성공주文成公主〉, 郭沫若의 〈채문희蔡文姬〉, 〈무측천武則天〉, 曹우 등의 〈담검편膽劍篇〉 등이 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전기에는 周恩來의 '조정調整, 강화鞏固, 충실充實, 향상提高'의 방침 아래 〈현재의 문학 예술 사업에 관한 의견關於當前文學藝術工作的意見〉의 중요한 문건이 제기되고, 연극、가극、아동극 창작 좌담회話劇歌劇兒童劇創作座談會 를 개최하면서 좌적 착오를 수정하여 연극 창작의 새로운 기운을 마련한다. 이 시기의 작품을 제재별로 살펴보면 먼저 군사를 제재로한 것으로 沈西蒙 등의 〈네온사인 아래의 초병霓虹燈下的哨兵〉, 馬吉星의 〈표자만 전투豹子灣戰鬪〉, 賈六의 〈뇌봉雷鋒〉 등이 있다. 그리고 청소년의 교육을 다룬 陳耘의 〈젊은 세대年靑的一代〉, 從深의 〈건강을 빕니다祝니健康〉(〈절대 잊지 마세요千万不要忘記〉) 등에서는 청소년이 관심을 가지는 이상과 애정 등의 문제를 그려내고 있다. 또한 중국 내의 자산계급 우파와 세계의 제국주의자를 풍자하는 陳白塵 등의 〈아아, 미국의 작은 달이여애하하,美國小月亮〉, 〈미국기담美國奇譚〉, 姚仲明과 金山의 〈기억우신記憶憂新〉, 陳白塵의 〈종이 호랑이의 참모습紙老虎現刑記〉 등이 있고, 공업 분야를 반영한 胡万春의 〈격류가 구비치며激流勇進〉, 〈한집 사람一家人〉, 劉川의 〈두번째 봄第二個春天〉, 그리고 혁명역사를 반영한 王樹元의 〈두견산杜鵑山〉, 于伶의 〈7월의 별찌七月流火〉등이 있다. 그리고 농촌생활과 농촌의 낙후된 면모를 극복하기 위한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개혁을 반영한 작품으로는 楊履方의 〈뻐꾹새는 또다시 울었다布谷鳥又叫了〉, 王煉의 〈꽂이 핀 고목枯木逢春〉, 張仲明이 집필한 〈청송령靑松嶺〉, 劉厚明의 〈전간하변箭杆河邊〉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 속에는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한다'는 식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작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2-2 17년 시기의 전통극 

전통극 역시 '백화제방, 추진출신'과 '3병존三幷擧'의 방침 아래 발전해나가는 과정속에 좌적사조의 영향으로 우여곡절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전대미문의 발전을 이루어 '신전통극現代戱' 이전 전통극의 정리개편은 말할것도 없고, 신전통극의 창작, 신편역사극의 창작에서 모두 우수한 작품이 나타난다.

전통극은 장기간의 봉건적 전통속에서 전해져 왔기에 중국 공산당은 전통극의 개혁작업을 중시하여 추진출신의 방침에 따라 많은 방면에서 개혁을 모색한다. 1951년 5월 5일 정무원에서는 〈전통극 개혁 사업에 관한 지시關於戱曲改革工作的指示〉를 발표하고, 《인민일보人民日報》에서도 〈전통극 개혁 사업을 중시하자重視戱曲改革工作〉를 발표한다. 이 두 문건은 전통극에 대한 개혁사업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여기서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의 전통극 개혁의 경험을 총결하는 토대위에서, 백화제방의 방침에 따라 개조、발전시킬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애국정신을 발휘하고 혁명투쟁과 생산노동속의 영웅주의를 고취하는 것을 주요임무로 제기한다. 이러한 지시 아래 전통극계에서는 '세 가지 개혁三改', 즉 희극 개혁改戱, 인물 개혁改人, 체재 개혁改制을 통해 전통극 예술을 경시하는 잘못된 사상을 극복하고, 전통극의 보수적 사상을 비판하는 동시에 이로 부터 전통극 개혁 작업을 추진해나간다. 대표적으로 1951년 楊紹萱이 고대신화극古代神話故事戱을 개편하는데 대해 "신화형식과 과학내용의 결합"을 주장하였으니 〈신천하배新天河配〉는 그의 이러한 주장을 실천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1952년 제1기 전국 전통극 경연 대회全國戱曲觀摩演出大會에서는 전통극 개혁의 성과를 통한 우수한 전통극이 나타난다. 越劇 〈양산백과 축영태梁山伯與祝英台〉, 〈서상기西廂記〉, 川劇 〈유음기柳蔭記〉, 京劇 〈장군과 재상將相和〉 등의 작품들은 역사유물주의의 관점으로 역사 제재와 신화 전설의 전통 극목을 처리하여 사상성에서나 예술성에 있어서 비교적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1956년의 제1차 전국 극목 공작 회의全國劇目工作會議에서는 전통극 개혁 과정속의 오류를 시정하는 한편 昆劇 〈십오관十五貫〉의 성공적인 개편을 통해 새롭게 전통극 개혁을 전개해 나간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과 1958년의 대약진운동은 전통극의 추진출신과 신전통극의 개작에 심각한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그후 6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문예정책은 수정되고 변화되었다. 1952년의 전국 전통극 경연 대회에서 〈왕귀와 이향향王貴與李香香〉, 〈어린 사위小女壻〉, 〈나한전羅漢錢〉 등의 8편의 신전통극를 연출한 이후 한동안 침체되어 있다가 195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전통극 개작공연이 고조된다. 신전통극 창작에서는 여전히 지방극의 창작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京劇 〈백모녀白毛女〉, 豫劇 〈조양구朝陽溝〉, 昆劇 〈붉은 노을紅霞〉 등 비교적 성공적인 신전통극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당시의 좌적 사조의 영향 아래 신전통극은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전통극 창작의 중점은 전통극을 찾아내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사항이었다. 이 시기에도 전통극에 대한 발굴, 정리작업은 여전히 중요하게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1957년에는 문화부가 전국 전통극 극목 공작 회의를 개최하여 전통극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동시에 창작의 문제를 연구한다. 1958년 6월에는 전통극의 현대생활 표현 좌담회戱曲表現現代生活座談會를 개최하여 신전통극 창작과 연출의 경험과 문제를 토론하였다. 이 대회에서 제기한 전통극 개혁 방침은 전통극 사업을 강력하게 추동하여 전통극 개혁사업에 새로운 발전을 이끌어낸다. 그리하여 전통극을 계속 발굴하고 역사극을 새롭게 연출하는 동시에 현대생활을 표현하는 극작이 대량으로 나타났다.

1960년에는 현대적 제재의 전통극 경연 대회現代題材戱曲觀摩演出大會를 개최하니 여기서는 周恩來의 의견에 근거하여 "현대극, 전통극, 신편역사극의 세 가지 병존現代劇,傳統劇,新編歷史劇三者幷擧" 방침을 제기한다. 이 '3병존' 방침 아래 60년대 초기에는 신편역사극의 고조가 나타난다. 吳함의 〈해서의 파직海瑞罷官〉(京劇), 田漢의 〈사요환謝瑤環〉(京劇), 孟超의 〈이혜랑李慧娘〉(昆劇)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1963년을 전후해서는 또 다시 한 차례의 신전통극 창작열이 나타난다. 京劇 〈팔월의 폭풍八月風暴〉, 호劇 〈홍등기紅燈記〉, 〈갈대밭의 전투蘆蕩火種〉, 豫劇 〈이쌍쌍李雙雙〉 등이 이 시기에 나타난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은 대약진운동 시기의 공식화、교조화적인 결함을 상당 부분 극복하여 사상적인 면에서나 예술적인 측면에서 명확한 성장을 보여준다. 특히 1964년 전국 경극 신전통극 경연 대회全國京劇現代戱觀摩演出大會에서 공연된 〈홍등기紅燈記〉, 〈사가빈沙家濱〉, 〈지혜로 탈취한 위호산智取威虎山〉, 〈갈대밭의 전투蘆蕩火種〉 등은 중대한 성과를 올린 대표작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전통극의 특색을 유지하는 동시에 현대생활을 반영하는 면에서도 그 성과가 나타난다. 이 대회를 통해 전통극 개혁의 성과를 굳건히 하는 동시에 전통극 개혁으로 하여금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했다.

 

2-3 17년 시기의 가극 

5·4 신문화운동 중에서도 몇몇 사람은 가극의 창작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고, 30년대에는 비교적 완성된 가극 〈양자강의 폭풍우揚子江暴風雨〉가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가극은 서양 가극의 형식과 수법의 영향이 비교적 커 민족화의 방면에서는 두드러진 특색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 1942년 毛澤東의 〈연설講話〉 발표 이후에 앙가극秧歌劇11)이라는 새로운 가극이 등장한다. 이와 동시에 극작자들은 기타 전통극과 민간예술의 장점을 흡수하여 이를 앙가극의 장점과 결합시켜 우수한 민족 신가극을 창조하였다. 〈유호란劉胡蘭〉, 〈적엽하赤葉河〉, 〈백모녀白毛女〉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성과가 잘 나타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의 새로운 역사적 조건하에서 신가극은 어떻게 새로운 요구에 부응할 것인지, 서양의 가극、음악을 어떻게 대하고 학습할 것인지, 사회주의 시대와 새로운 인물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등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다. 이 시기의 가극은 연극이나 전통극에 비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공통구의 신가극운동을 기초로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 于村의 〈왕귀와 이향향王貴與李香香〉, 李伯釗의 〈장정長征〉, 〈형제처럼如兄如弟〉 등의 작품에서는 내용상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상에서도 다방면의 탐색을 보여준다. 하지만 신가극이 진일보 발전한 시기는 50년대 중기이다. 1953년부터 北京、上海 등 각지에 실험가극원實驗歌劇院이 세워지면서 가극의 전문화를 촉진한다. 田川의 〈소이흑의 결혼小二黑結婚〉, 丁毅의 〈어느 지원군의 약혼녀一個志願軍的未婚妻〉, 任萍의 〈초원의 노래草原之歌〉 등은 과거의 가극 극본에 비해 인물 성격의 창조면에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다.

1957년 중국희극가협회와 음악가협회가 北京에서 연합하여 신가극토론회新歌劇討論會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중국의 민족신가극 창작경험과 교훈을 총결하여 신가극의 기초와 방향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그리고 중국 고전가극의 전통과 외국의 우수한 가극을 어떻게 계승하고 학습할 것인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론하였다. 이 토론을 통해 신가극발전에 있어서의 비교적 중요한 이론적 문제를 해결하고, 신가극 발전의 방향을 확실히 하는 한편, 신가극의 창작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린다. 그리고 1962년 2월의 周恩來의 연극, 가극, 아동극작가에 대한 연설과, 3월 廣州에서 개최한 연극、가극、아동극 창작 좌담회話劇歌劇兒童劇創作座談會는 신가극의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비록 신가극에 있어서 현대의 시기를 다룬 작품은 비교적 적고, 연극의 제재에 비하면 덜 광범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혁명역사와 민간전설을 제재로 한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혁명역사를 제재로 한 것과 영웅인물의 업적을 제재로 한 작품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 湖南省 實驗歌劇團의 〈홍호적위대洪湖赤衛隊〉, 閻肅의 〈지앙 누님江姐〉, 廣西壯族自治區 歌舞團의 〈유삼저劉三姐〉, 〈두 명의 여자 홍군兩個女紅軍〉, 石漢의 〈붉은 노을紅霞〉, 〈봄우뢰春雷〉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민족전통을 계승하여 농후한 민족적 색채를 지니는 한편 신가극의 음악적 방면에서도 성과를 보인다.

 

3. 문혁 시기의 희극

 

문혁의 10년 기간 중에 江靑 등은 대대적으로 '모범극樣板戱'을 선전한다. 그들은 전국 각지의 경극단이 상연한 모범극을 지시하고, 동시에 모범극을 고무하는 문장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모범극을 무산계급문예의 본보기로 제시하여 전국의 사람들에게 '8편의 극八척戱'만을 보게하는 문화적 전제주의를 실시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모범극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60년대 초 많은 극작가들은 중국 공산당의 문예정책을 따라 경극 개혁을 진행하였고, 경극이라는 구형식을 이용하여 현대의 혁명투쟁과 생활을 반영하면서 전국에 경극 혁명의 고조를 불러일으켰다. 이 경극 개혁의 과정 속에서 〈홍등기紅燈記〉, 〈갈대밭의 전투蘆蕩火種〉, 〈지혜로 탈취한 위호산智取威虎山〉 등의 우수한 신전통극이 창작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중국 공산당의 방침에 따른 경극개혁의 일정한 성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문혁 시기에 江靑 등은 이러한 성과를 탈취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무산계급문예를 제창하니 결국 이러한 모범극이 모든 무대를 점령하게 된다.

江靑 등이 모범극을 대대적으로 고취하고 선전한 것은 어떠한 목적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이러한 모범극의 선전을 통해 정치적 권력의 탈취를 대신하고, 17년시기의 문학 성과에 대한 부정을 통해 그들의 반혁명적 활동에 이용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모범극팀樣板劇組의 이름으로 모범극 창작경험을 만들어내고, 여기서 만들어진 이론체계를 문예창작상에서 필수적으로 따라야하는 지도적 사상으로 삼아 모든 문예계의 문예이론과 문예영역에 문화적 전제주의를 감행한다. 이러한 모범극에서 나온 문예이론이 바로 근본과업론, 삼돌출론, 주제선행론이다.

 

3-1 문혁 시기의 연극

문화적 전제주의로 인하여 이 시기의 연극창작은 10년의 공백기로 나타난다. 연극 〈성대한 경축일盛大的節日〉은 江靑 등의 음모와 문예를 결합시켜 탄생시킨 '기형아怪胎'다. 그리하여 1973년부터 희극 무대에는 江靑 등의 극좌적 사상을 선전하는, 4인방의 기풍으로 충만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3-2 문혁 시기의 전통극 

문혁의 10년은 전통극예술이 공전에 없던 재난을 당한 기간으로 1964년 경극 신전통극 경연 대회의 성과를 부정하면서 〈홍등기紅燈記〉 등의 8편의 모범극을 만들어 낸다. 기타의 극단은 봉건주의, 수정주의의 죄명을 쓰고 타도의 대상이 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누명을 썼고, 심지어는 박해로 인해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한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전통극 예술의 생기를 압살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도 비교적 우수한 작품이 전통극의 명맥을 유지한다. 즉 湘劇 〈원예사의 노래園丁之歌〉, 晋劇 〈도봉에 세번 가다三上桃峰〉, 楚劇 〈통계표를 따라잡다追報表〉 등이 바로 그것이다.

 

3-3 문혁 시기의 가극 

문혁의 문화전제적 10년동안은 신가극이 엄중한 피해를 입은 기간으로 10년중에 신가극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발전의 길을 걷던 신가극은 이 시기에 중단되었다.

 

4. 신시기의 희극

 

1977년은 신시기 희극이 중흥한 해였다. "특히 3중전회 이후, 희극은 빠르게 '혁명성, 군중성, 전투성'의 전통을 회복하고, 창작이 활발해지면서 다른 예술의 앞에서 나아갔다."12) 중국 공산당의 11기 3중전회 이후 극작가들은 극좌적 문예사상을 극복하는 사상해방의 조류속에서 혁명적 현실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는 우수한 극작을 발표한다. 1979년 1월 5일 문화부가 거행한 건국 30주년 기념 공연國慶三十周年獻禮演出開幕은 성황을 이루어 30년 동안의 희극창작의 성과를 집중적으로 구현해내었다. 여기서 연출된 극목은 광범위한 제재, 더욱 심도 깊은 주제, 다양한 형식풍격, 새로운 인물형상의 창조 등을 그 특징으로 하였다. 그리고 1980년 극본좌담회劇本座談會 이후부터는 이전과 같은 많은 창작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작가들이 엄숙한 사고를 거치고 현실 제재에 대한 개척, 중대한 사회문제에 대한 제시와 새로운 주제의 개척을 중시하는 동시에 예술 형식과 표현 수법의 탐색에도 역시 주의를 기울인다.

신시기에는 우선 제재와 주제상에서 이전의 제재결정론, 무충돌론 등의 이론으로 인한 제재상의 한계를 타파하고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시킨다. 이에 따라 4개현대화 건설 중의 첨예한 모순을 제시하는 사회문제극을 창작해낸다. 신시기 희극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회문제극은 50년대 중기의 동류의 극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신시기 극작가는 관료주의의 범람을 폭로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사회생활의 각 영역에서 엄숙하고도 진지한 해부를 가하고, 서로 다른 각도에서 중국 공산당과 국가가 지니는 근본적 의의에 대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제재의 다양성과 광범위함 속에서 주제의 첨예함과 심각성을 체현해내는 한편 사회모순에 대해서 회피하거나,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과감하게 나타낸다. 이러한 제재, 주제상의 확대를 통해 새로운 인물형상을 창조해내는 동시에 이전까지 개념화의 폐단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특히 영웅적 인물형상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신격화의 경향을 극복해 나간다.

예술 형식과 표현면에서의 새로운 탐구에서는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이 '희극의 영화화'이다. 오래동안 입센적 현실주의의 영향속에서 작은 장소에 무대를 설치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왔었는데 이는 오히려 희극을 구속되게 하였다. 그래서 신시기 극작가들은 자유로운 영화에 흥미를 지니게 된다. 都郁의 〈아, 대삼림……阿,大森林……〉이 무대위에 표현된 영화화 경향의 첫번째 작품이다. 그리고 程浦林의 〈빠리여, 안녕再見了,巴黎〉에서도 영화화의 경향이 뚜렷하다. 宗福先과 賀國甫의 〈피, 언제나 뜨거운 것血,總是熱的〉에 이르러면 본격적인 영화화의 단계에 들어선다. 또한 다양한 풍격을 추구해 나가는 것 역시 신시기 희극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신시기 초기의 희극계에는 명확한 유파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일부 지구의 작가들이 제재、형식과 풍격상에서 독특한 예술경향을 보여 주목을 끌었다. 그래서 전국의 희극은 점차적으로 '4개 지역 양대 중심지四個地區兩個中心'의 상황이 형성되었다. 이 4개 지역은 東北、西北、北京、上海이고, 양대 중심지는 北京과 上海이다.

서방의 다양한 형식과 수법이 중국희극 속에서 소화되면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가 있었다. 즉 신형식、신수법의 창조 속에서 중국희극의 민족화를 이루어내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희극계는, 이러한 창조는 문예가 민중을 위해 복무해야 하고,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방침 아래의 창조여야 한다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외국의 우수한 규범을 채용하여, 발휘해야 하고", "중국의 유산을 선택해서 새로운 틀에 융합해야 한다"13)는 것을 제시한다.

 

4-1 신시기의 연극 

문혁이 종결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되는 문예계와 마찬가지로 신시기의 연극계에서도 새로운 발전도상에 올라서게 된다. 작가들은 4인방의 폐해에서 벗어나 혁명적 현실주의의 전통을 회복、발휘하면서, 17년 시기의 갖가지 한계를 극복하고, 제재 영역에서 광범위한 개척을 일구는 동시에 예술형식과 풍격의 방면에서 다종다양한 탐색을 이루어 우수한 작품을 창작해낸다.

먼저 혁명역사를 제재로 한 창작이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으니 중대한 역사적 사건, 중국 혁명 1세대의 형상 등을 무대 위로 끌여들였다. 이러한 작품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교적 높은 수준에 이르렀는데, 첫번째 작품으로는 白樺의 〈서광曙光〉이 있고, 이어 나타난 것이 丁一三의 〈진의가 출마하다陳毅出山〉, 邵沖飛 등의 〈신문팔이 소년報童〉, 所云平、史超의 〈동쪽으로! 동쪽으로!東進!東進!〉, 趙환의 〈추수폭동秋收霹靂〉, 程士榮 등의 〈서안사변西安事變〉 등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의 생활과 투쟁을 반영한 沙葉新의 〈진의 시장陳毅市長〉이 있다. 이러한 많은 작품에서는 기본적으로 1세대 무산계급 혁명가의 신격화를 극복하고, 역사에 대한 유물주의적 정신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4인방이 실각한 이후 이들에 대한 폭로와 공격을 가하고, 민중의 4인방과의 투쟁을 재현해 낸 작품으로 최초로 나온 작품은 王景愚、金振家의 대형풍자극 〈단풍이 물들 때楓葉紅了的時候〉이고, 이후에 昆明軍區國防文工團의 〈노호하라, 황하여怒吼파,黃河〉, 蘇叔陽의 〈일편단심丹心譜〉, 宗福先의 〈침묵 속에서於無聲處〉 등이 나타난다. 4인방에 대한 심도 깊은 비판에 따라 극작가들은 장기간의 좌경적 사조에 대한, 특히 10년 재난에 대한 다방면의 사고를 통해 중대한 사회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탐색을 보여준다. 초기의 작품으로는 崔德志의 〈보춘화報春花〉, 趙國慶의 〈그녀를 구하라救救저〉, 邢益勛의 〈권력과 법權與法〉 등이 있고 이후에 中杰英의 〈회색왕국의 여명灰色王國的黎明〉, 馬中駿、賈鴻沅의 〈집 밖에는 열류가 흐른다屋外有熱流〉14) 등이 창작된다. 11기 3중전회 이후 중국 공산당 사업의 중점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옮겨졌다. 이에 극작가들은 사상을 해방하고, 현실에 직면하여 현대화 건설 속의 복잡한 갈등과 모순을 반영한 극본을 창작해낸다. 趙梓雄의 〈미래가 부르고 있다未來在召喚〉, 宗福先、賀國甫의 〈피, 언제나 뜨거운 것血,總是熱的〉, 梁秉곤의 〈누가 강자인가誰是强者〉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충돌론의 영향에서 벗어난 군사제재의 연극 속에서는 생활 속의 모순충돌을 진실되게 반영하고 심도있게 제시한다. 漠雁의 〈송지도원의 일기宋指導員日記〉, 冠潮의 〈앞으로 앞으로向前向前〉, 그리고 소설을 개편한 〈천산 깊은 곳天山深處〉, 〈높은 산 기슭에 놓인 화환高山下的花環〉 등이 있다. 애정 제재의 제한 역시 극복되어 애정을 묘사한 〈약속約會〉, 〈사랑의 노래愛情之歌〉 등도 나타난다. 이 외에도 고대의 역사생활을 제재로 한 연극으로 중시할 만한 작품은 曹우의 〈왕소군王昭君〉, 陳白塵의 〈대풍가大風歌〉, 顔海平의 〈진왕 이세민秦王李世民〉 등이 있다.

신시기의 연극창작은 제재에 대해 광범위한 개척을 했고 현실의 첨예한 주제를 다루면서 새로운 인물형상을 성공적으로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예술형식과 풍격의 창조에 있어서도 다양한 탐색을 진행하여 이전과는 구분되는 성과를 보여준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 이외에도 沙葉新의 〈진의 시장陳毅市長〉에서는 중심사건이 없이 주인공 만을 극의 전체에 일관시키고, 독립적인 이야기로 엮어진 막들을 이어놓는 연결식 구성법을 취해 전통극의 형식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高行健 또한 예술형식의 탐색에 주의하여 〈절대신호絶對信號〉에서는 모더니즘의 예술수법인 의식의 흐름 수법을 사용하여 인물의 심리상태를 제시하는데 주력한다. 賈鴻沅、馬中駿의 〈길路〉은 심리변화를 위주로 하는 구조 속에서 인물의 심리세계에 대한 심입을 보여준다. 그리고 王煉은 〈조국 광시곡祖國狂想曲〉에서 '교향곡식交響樂式'의 희극구조를 채택하여 네 개의 악장으로 분장하여 음악과 희극을 융합시킨다. 그리고 〈피, 언제나 뜨거운 것血,總是熱的〉에서는 영화의 표현수법을 차용해 희극을 영화화한다.15) 이러한 광범위한 개척과 탐색은 연극의 발전에 광범위한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4-2 신시기의 전통극 

신시기 희극의 발전은 연극에서 두드러졌기에 가극과 전통극은 연극의 발전에 비해 그다지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10년동안의 속박으로 인해 전통극의 회복과 발전은 비교적 완만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신전통극, 신편역사극의 창작과 전통극의 정리、개편에 있어서 일련의 성과를 이룬다. 京劇 〈서구경 승관기徐九經升官記〉, 川劇 〈네 처녀四姑娘〉, 〈파산수재巴山秀才〉, 롱劇 〈여섯근짜리 현장六斤縣長〉, 越劇 〈오녀가 생일을 축하하다五女拜壽〉 등이 이러한 성과를 잘 나타낸다.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발전에 따라 생활의 리듬이 빨라지고, 10년동안 전통극에 대해 잘 모르는 청년들이 성장했기에 근년에 이르러서는 전통극의 침체적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전통극의 위기"라고 경고하고, 심지어는 전통극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민중에 근거를 두고, 선명한 민족특색을 지닌 예술이라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창작자들이 새로운 시각에서 시대와 민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개혁과 창조를 행한다면 전통극예술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4-3 신시기의 가극 

11기 3중전회 이후 각종의 문학예술 형식이 모두 발전을 이루는데 유독 신가극만이 50,60년대의 시간속에 머물러 그 발전이 정체되었다. 비록 일련의 작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현대적 시대감각이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나 신가극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듯 하였다. 하지만 1984년 6월의 신가극좌담회新歌劇觀摩座談會에서 연출된 〈방초심芳草心〉, 〈횃불절火把節〉, 〈잠자리청정〉, 〈기몽의 아들 딸沂蒙兒女〉, 〈붉게 물든 목면화火紅的木棉花〉 등은 이전의 정체 상태를 타파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다.

신가극은 오래되지 않은 예술로 창작과정이 비교적 복잡하고, 그 발전이 비교적 느리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 우수한 극목이 그리 많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후의 과제로는 사회주의 신시기에 신가극을 통해 어떻게 신시대를 반영할 것인가, 어떻게 더욱 성공적으로 인물형상을 창조해낼 것인가, 어떻게 대중의 심미요구에 부응할 것인가, 그리고 성공적인 민족신가극을 어떻게 창조해낼 것인가의 복잡하고도 중요한 임무가 남아있다.

 

4-4 신시기의 영화문학16) 

문혁기간중에 영화문학은 영화극본을 발표할 간행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연 6년동안 극영화 한 편 마저 없는 황폐한 현상이 나타났다. 1974년부터는 극영화가 다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당시의 상황속에서 대부분 극좌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창업創業〉, 〈바다의 노을海霞〉 등과 같은 비교적 나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였다. 신시기로 접어들어서도 이러한 상황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웠다. 많은 작품들에서 여전히 극좌적 경향과 스토리 전개와 인물의 운명의 변화를 통한 정치적 개념이 주를 이루었다. 동시에 4인방을 비판한 〈희망希望〉, 〈시월의 풍운十月的風雲〉, 〈험난한 역정嚴峻的歷程〉, 〈불같은 마음火紅的心〉(〈일편단심丹心譜〉) 등과 반스파이 모험 형식의 〈곰의 흔적熊迹〉, 〈흑삼각黑三角〉 등의 영화극본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극본에서는 대동소이한 유형화의 결함과 신시기의 현실생활과는 유리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79년에 이르르면 《영화창작電影創作》, 《영화문학電影文學》이 복간되고, 《영화신작電影新作》이 창간되면서 83편의 영화극본이 발표되고 65편의 극영화가 제작되었다. 이에 영화극본의 양식과 소재도 비교적 다양화되었다. 4인방과의 투쟁을 그린 〈파산야우巴山夜雨〉, 〈새로 온 현위 서기新來的縣委書記〉(영화명은 〈눈물의 흔적淚痕〉), 〈두근거리는 마음心在跳動〉(영화명은 〈고난의 마음苦難的心〉), 금기시 되던 애정을 다룬 〈혼례婚禮〉,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他們在相愛〉, 〈그들 둘과 그녀들 둘他倆和저倆〉 등, 그리고 짙은 음악적 색채로 음악적 표현수법을 도입한 〈생활의 진동음生活的顫音〉, 〈노호하라, 황하여怒吼파,黃河〉, 소설을 각색한 〈낙타상자駱駝祥子〉, 〈작은 꽃小花〉 등이 있다.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과 인민군의 인물을 그린 〈서광曙光〉, 〈북두北斗〉, 동북항일연군의 전투를 반영한 〈쏜살처럼 돌아온 마음歸心似箭〉, 반우파투쟁의 확대화를 반영한 〈비바람속의 두견風雨杜鵑紅〉(영화명은 〈천운산전기天雲山傳奇〉), 모험 스토리로 흥미를 돋군 〈정보국의 총소리保密局的槍聲〉, 중국 최초의 과학 환상 극본인 〈산호섬의 죽음의 빛珊瑚島上的死光〉 등이 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문학은 소재가 더욱 다양해지고, 역사와 현실에 대한 반영이 더욱 광범위해졌으며, 비슷한 소재를 취하면서도 묘사의 각도가 다른 점 등에서 그 성과가 뚜렸이 나타난다. 특히 이시기의 영화문학은 반성을 중시하여 〈작은 거리小街〉, 〈허무와 그의 딸들許茂和他的女兒們〉, 〈장철장의 로망스張鐵匠的羅曼史〉 등에서는 십년동란과 그 교훈을 표현하였고, 〈사랑에 잊혀진 곳被愛情遺忘的角落〉, 〈제비는 돌아오고燕歸來〉의 몇 작품에서는 극좌사조가 일으킨 위기의 사회적 역사적 원인을 깊이있게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신시기 4개현대화 건설의 신속한 발전은 상흔의 치료와 새로운 현실 및 미래의 표현을 중시하게 했다. 〈주방교향곡廚房交響曲〉(영화명은 〈이웃隣居〉), 〈잔설殘雪〉 등은 십년동란과 신시기 초의 삶이 뒤섞여 있지만 이후 영화문학 창작의 중점이 4개현대화 건설 생활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교공장장 부임기喬廠長上任記〉(영화명은 〈종소리鐘聲〉), 〈경쟁자競爭者〉, 〈당대인當代人〉, 〈피, 언제나 뜨거운 것血,總是熱的〉, 〈역광逆光〉 등의 작품에서는 현실생활을 배경으로 신시기 4개현대화 건설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인물의 모습을 나타내는 동시에 신시기 생활의 수많은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는 대담한 화면묘사, 예술영화를 위한 강한 자각을 근본으로 하여 인간의 생명력을 영상으로 재현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제 5세대 영화로 불리는 것들이다. 흔히 중국 영화계는 문혁 이전을 제 4세대라 하고, 그 이후의 신세대는 제 5세대로 부르고 있다. 제5세대의 대표적 감독으로는 〈붉은 수수밭紅高梁〉의 張藝謨, 〈황토의 대지黃土地〉17), 〈대열병大閱兵〉, 〈아이왕孩子王〉, 〈현위의 인생絃上的人生〉의 陣凱歌, 〈우물老井〉의 吳天明 등이 선두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부용진芙蓉鎭〉을 발표해 새롭게 주목을 받은 謝晋 등이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문혁 이전의 영화가 이데올로기 선전을 위한 도구로서만 기능하던 것에 비해 제 5세대 감독들이 주도한 신중국영화는 중국민중과 그들이 이끌어왔거나 현재 영위하고 있는 삶에 시각을 접근시킴으로써 인간회복이라는 인본주의적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했다. 이는 영화의 문화적 기능과 역량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18)

 

5. 마치며

 

신시기의 변화 속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국희극은 그 내용이나 형식상에서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당대 중국문학에서 나타나는 희극관념의 변화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19)

(1) 감정에 대한 호소에서 이지에 대한 호소로의 전환 -- 희극관념의 이러한 변화에 따라 그 구조방식에 있어서도 다층차적인 구조가 나타난다.
(2) 스토리 중심에서 정서 중심으로의 전환 -- 작품 속에서 애매하고 다의적인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전통극의 시간적 순서에 따른 논리구조에서 탈피하여 다층차적인 시공결합의 구조를 형성한다.
(3) 규칙에서 불규칙으로의 전환 -- 분막、분장에 대한 규칙에서 탈피하여 다원화된 희극 규칙을 형성한다.
(4) 기타 예술과의 상호침투의 경향으로의 전환

이러한 변화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의 중국희극계 뿐만 아니라 문학예술계에 존재하던 갖가지 속박과 억압에 대한 극복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희극은 사회주의 정책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는 문학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공연이라는 형태를 통하기에 상대적으로 여타 예술과는 달리 직접적인 독자(관중)와의 소통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명확히 지적해낼 수는 없다고 했지만 이것이 이전 중국희극계에 나타나던 좌경적 사조에 대한 극복이라고는 했다. 결국 희극계에도 이러한 극복의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희극 내부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서양희극의 다양한 형식과 그 관념의 흡수를 통해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중에서 서양희극의 형식과 관념의 흡수에는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이는 단순하게 서양의 잣대로 동양의 희극을 잴 수 있느냐의 문제 만은 아니다. 실제로 전통적인 중국의 희극(현재까지의 희극을 포함해서)에서 나타나는 실상은 서양과는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먼저 서양희극의 저변에 깔려 있는 주된 정조는 비극이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해피엔딩이 주조를 차지한다. 동시에 그 진행 형태에 있어서도 서양에서는 대화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반면에 중국에서는 노래, 즉 '소리唱'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한 연구는 희극극본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해결키 어려운 문제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이를 어떤 형태로 수용하는가는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고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러한 희극관념의 변화가 단순한 문학예술의 변화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다양한 모습은 이전의 중국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상황들이 많이 연출되고 있다. 한가지 예로 중국 신세대에게 인기있는 영화나 영화배우는 어떤 것인가를 보자. 우리나라에서도 큰 흥행을 거둔 〈동방불패東方不敗〉, 〈신용문객잔新龍門客棧〉, 〈황비홍黃飛鴻〉, 〈종횡사해縱橫四海〉, 〈첩혈쌍웅첩血雙雄〉 등이 가장 인기있다고 한다.(이외에도 〈나홀로 집에〉, 〈나의 왼발〉, 〈터미네이터〉, 〈원스 어판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붉은 수수밭紅高梁〉, 〈향혼녀香魂女〉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영화배우로는 임청하,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영화감독으로는 張藝謨, 謝飛(〈향혼녀香魂女〉의 감독)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20) 자본주의의 영화방식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홍콩영화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사리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새로운 변화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아니면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영향하에 들어서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영화의 정치도구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하게 할리우드식의 영화를 지향하는 것은 분명코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영화는 아직은 이와 동일한 길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앞으로의 중국영화의 미래는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6. 참고문헌

 

01) 〈전환시대 중국 사회주의의 대변신〉, 《말》, 서울, 1993년 6월호.

02)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중국의 제 5세대 영화(Ⅰ)〉, 《전망》, 서울 : 대륙연구소, 1993년 5월호.

03) 《세계문학비평용어사전》, 이명섭, (서울 : 을유문화사, 1985)

04) 《중국문학개관》, 김혜준 편, (부산 : 부산대학교 중문과, 1993)

05) 《중국현대문학사》, 김시준, (서울 : 지식산업사, 1992)

06) 《중국당대문학사》, 김종수 최건, (서울 : 청년사, 1991)

07) 《文藝學槪論》, 李承烈 外, (瀋陽 : 遼寧人民出版社, 1984)

08) 《中國當代文學題解》, 夏康達 外, (北京 : 語文出版社, 1989)

09) 《中國當代文學手冊》, 武漢大學 中文系 當代文學敎硏室, (武漢 : 湖北敎育出版社, 1988)

10) 《中國當代文學》, 張鍾 洪子誠 外, (北京 : 北京大學出版社, 1987)

11) 《中國當代文學》, 華中師範大學 中國當代文學編寫組, (上海 : 上海文藝出版社, 1983)

12) 《中國當代文學史》, 吉林省五院校, (長春 : 吉林大學出版社, 1986)

13) 《中國當代文學史初稿》, 馮剛 外, (北京 : 人民大學出版社, 1980)

14) 《新時期文學六年》, 中國社會科學硏究所 當代文學硏究室, (北京 :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5)

 

 

1) 《세계문학비평용어사전》, 이명섭, (서울 : 을유문화사, 1985)

2) 희극戱劇은 광의의 의미와 협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의의 의미로는 문예학의 개념으로 쓰여, 문학、미술、음악、영화、희극 등으로 분류되는 경우에서 처럼, 배우가 이야기를 연출하는 것을 통해 사회생활 중의 갖가지 충돌을 반영하는 예술을 가리킨다. 협의의 의미로는, 시、소설、산문、희극 등으로 분류되는 경우에서 처럼, 문학의 하위 쟝르 즉 극본, 대본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전자의 경우에는 통상 '극'이라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통상 '희곡'이라 하지만, 이 글에서는 모두 '희극'으로 통일하겠다.

3) 문학의 극본이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는 Drama(희곡)이고, 문예의 개념으로는 Play(극)을 사용한다.

4) 《A Dictionary of English Literature》. 《희곡문학론》, 김흥우, (서울 : 유림사, 1981), P.75에서 재인용.

5) 《중한사전》, 고대민족문화연구소 중국어대사전편찬실, (서울 :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89.10)

6) 비희극(중국 용어로는 '正劇')이란 18세기 이후에 등장한 비극과 희극의 요소를 동시에 지닌 극형태를 말한다.

7) 중국어에서 '演劇'이란 용어는, '극을 상연하다'라는 뜻과 '연극'이라는 뜻의 두 가지로 쓰이는데, 주로 전자로 사용된다.

8)《文藝學槪論》, 李承烈 外, (瀋陽 : 遼寧人民出版社, 1984)

9) 전통극은, 원래 그대로의 전통극과 현대화한 전통극 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통상 전통극戱曲이라면 전자를 가리키며, 구극舊劇이라고도 한다. 후자는 신전통극現代戱이라 한다.

10) 여기서는 극본의 개념이 아닌 문예의 개념으로 구분한 것이다. 《중국문학개관》, 김혜준 편, (부산 : 부산대학교 중문과, 1993) 참고.

11) 1942년 延安文藝座談會에서 문예정책이 제시된 후 새로 탄생한 희극 형식으로,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는 민요와 민속무를 채보하여 현대화시킨 토대위에서 탄생한 것이 앙가극秧歌劇이다. 앙가극의 최초작품은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서 창작한 〈오누이의 황무지 개간兄妹開荒〉이라는 단막가극이다. 그러나 이후 내용이 단조롭고 비슷한 곡조의 민요와 군무가 반복되자 관객들은 점차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에 앙가극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막가극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전래의 민요나 민가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민요와 민가를 창작하여 가극에 삽입하였고, 새로운 춤사위도 개발했으며, 특히 단막극에서 오는 내용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각 지방에 전래되는 이야기나 사실에서 소재를 취재하여 이것들을 과감히 개편하여 명실상부한 다막극의 가극을 창작하니 이것이 신가극新歌劇이다.(《중국현대문학사》, 김시준, 서울 : 지식산업사, 1992, P.416 참고)

12) 〈중앙선전부 주최 희극 창작 좌담회中央宣傳部召開戱劇創作座談會〉. 《新時期文學六年》, 中國社會科學硏究所 當代文學硏究室, (北京 :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5), P.341에서 재인용.

13) 魯迅, 《차개정잡문且介亭雜文》. 《新時期文學六年》, 中國社會科學硏究所 當代文學硏究室, (北京 :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5), 341에서 재인용.

14) 특히 이 작품은 의식의 흐름 소설의 표현수법을 사용하여 인물의 심리활동과 잠재의식을 추구하는 한편 조명을 주요한 수단으로 시공간의 순서와 경계선을 해체한다.(《중국당대문학사》, 김종수 최건, 서울 : 청년사, 1991, P.422)

15) 이 작품에서는 전체에 막과 장을 두지 않고 얽음새 흐름에 따라 17개 단락으로 나누었다. 극본은 단락 사이의 관계를 밀착시키면서 조명으로 단락 전환을 표시하고, 한 단락 안에 많은 배경과 장면들을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잠깐 동안에 동서남북을 날아오르기도 하고, 여러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동시에 표현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전통적 구성법을 철저히 포기하고 영화의 몽타쥬수법을 적용함으로써 전통극을 영화화했다. 이러한 표현수법은 전통극의 운동감을 강화하고 시간의 순서와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전통적 전통극의 느린 절주를 빠르게 함으로써 현대적 미감에 적응시켰다.(《중국당대문학사》, 김종수 최건, 서울 : 청년사, 1991, P.423)

16) 영화라고 할 때는 문학과는 구분되는 문예의 한 쟝르를 가리키는 반면, 영화문학이라고 할 때는 문학의 한 쟝르로 영화극본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7) 〈황토의 대지黃土地〉는 신중국 영화의 등장을 확인시킨 선언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 각 지역의 민요채집 임무를 띤 한 팔로군 병사와 외부세계와는 거의 접촉이 없이 전통적인 생활양식에 순응하고 있는 한 시골처녀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전통사회와의 접촉을 묘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선전이나 스토리 위주의 영화구성이 배제되고 카메라의 원근과 구도에 의한 화면의 조형, 중국의 자연과 중국인들의 삶을 투시하는 영화적 시각, 정제된 영상의 상징성 등으로 인해 세계영화계는 중국영화의 변화를 확인했다.

18)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중국의 제 5세대 영화(Ⅰ)〉, 《전망》, 서울 : 대륙연구소, 1993년 5월호 참조.

19) 《中國當代文學題解》, 夏康達 外, (北京 : 語文出版社, 1989)

20) 〈전환시대 중국 사회주의의 대변신〉, 《말》, 서울, 199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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