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우외환 속의 1940년대 중국문학
- 1937∼
1949년의 중국문학 -

2003년 11월 12일

목   차

Ⅰ. 머리말
Ⅱ.
중일전쟁 전기의 문예사조(1937-1942)
Ⅲ.
중일전쟁 후기와 내전시기 문예사조(1942-1949)
Ⅳ. 꼬리말
참고문헌
질의답변서

 

 

변석진 변석진: 먼저 발표 수업이라는 것에 대한 부담이 꽤 컸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직접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우리 의견을 만들어 낸다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군대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조장을 맡게 되었었는데, 역시 부담이 컸었다. 부담만 컸지 실제로 많은 준비를 한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하다. 중문과에 들어 와서 지금은 졸업 학년인데, 중국 현대 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이번 기회로 조금이나마 맛을 볼 수 있었다. 졸업 전에, 정말 기존의 것들과는 색다른 공부를 해 보고 가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발표를 잘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주제를 찾는다고 우왕좌왕한 시간이 길었는데, 정리가 덜 댄 채, 발표문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아쉽다. 아무튼, 발표가 끝나서 좋고, 조원 모두들 수고 많았다^^

박주경 박주경 : 1940년대 문학이라는 테마 아래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하는데,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의의가 있는지 아무런 감각은 없고,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맨 시간이 길었다. 발표를 마치면서 느끼는 바는, 이것 하나는 제대로 해냈다는 성취감이나 뿌듯함보다는, 단지 발표를 마치는구나 하는 홀가분함이 더 크다. 이 프로젝트에 푹 빠져들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재미를 느꼈던 순간은 정말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오히려 과제라는 압박감, 어쨌든 시간 내에 결과물을 만들어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감. 이번 발표를 통해 1940년대 문학에 대해서만은 도사가 되었다기보다는, 1940년대 문학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나의 발언을 할 수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꼈다. 문학의 풍부함과 다양함, 복잡함… 조금 과장한다면 거대함이랄까? 준비하면서 중국어 원문으로 된 글들도 직접 읽었는데,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내 역량의 부족함을 느끼기도 했고, 그만큼 앞으로 키워나가야 할 역량이 많다는 데에 의욕이 생기기도 했다. 확실하게 남는 게 있다면… 路翎, 张爱玲을 비롯한 작가들과의 만남. 아주 많은 호감을 갖게 되었다. 발표는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끝이 나지만, 발표가 끝나고 나면 정말로 나의 순수 의지로 그들의 작품을 접해 볼 계획이다. 그리고… 중국 문학에 대한 나의 막연했던 느낌이… 뭐, 여전히 막연한 상태이지만 그 색채가 전혀 달라진 것 같다.

최은진 최은진 : 이번 발표와 질의 답변을 준비하면서 많은 어려운 점이 있었다. 중국문화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자료를 찾아놓고도 내용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난감했었다. 또한 그 시기에 다른 과목의 과제 또한 많아서 시간에 많이 쫓겨가면서 발표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발표할 때 내용을 충분히 익히지 못해 발표문을 보면서 거의 읽다시피 하여 그 부분이 아쉽고 미안하게 생각된다. 특히 질의 답변을 준비할 때, 우리 조는 각자가 발표할 부분을 나누어서 준비했기 때문에 다른 조원이 발표한 내용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 내가 발표한 부분에 대한 질문이 하나도 없는 바람에 다른 조원의 질문을 한 두 개 맞아서 했었는데 그 부분이 특히 어렵게 여겨졌었다. 그래도 현재는 발표가 모두 끝나서 남은 조의 발표를 여유 있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새암 문새암 :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사실 내적인 압박감은 많이 느꼈지만 몸은 그만큼 따라가 주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발표기간에 다른 수업의 과제와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미리 미리 해놓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미리 더 시간을 두고 준비했다면 더 잘 할 수 있었을건데... 하지만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고 약간의 뿌듯함(?)도 느껴지네요~ 앞에 발표했던 조원들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조는 그다지 힘들지 않게(?) 준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앞의 조를 보니 한달 전부터 준비했다고 하던데... 그에 비하면 저희가 준비한 기간은 ^^; 그래도 저희 조 역시 다들 열심히 체계적으로 잘 했어요!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저는 아쉬운 점이 저희가 발표할 때 시간이 좀 작았던 것과 제가 발표하는 부분이 난해하고 많아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었기에 발표문의 글과 제가 설명하는 내용이 ! 좀 다르고 해서 제가 설명하는 것을 제대로 여러분들이 이해 못하신 것이 아쉽습니다. 질의답변시간을 통해 잘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Ⅰ. 머리말

 

7.7 노구교 사변 이후 8년간의 항일전쟁과 그 와중에도 계속된 국공내전으로 인해 중국은 위기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1937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1949년 10월)에 이르는 12년동안의 역사적 풍파 속에서 중국문예계는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항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문예계 역시 항일선전 일색으로 흐르게 되고 국공내전으로 좌우 분열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1942년 중국공산당이 문인들을 포섭하면서 주도한 문예정풍을 계기로 문학의 정치기능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문학이 결코 없어지거나 저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창조도 이루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정치적 소용돌이 속의 40년대 중국문학을 항일전쟁문예 전기(1937-1942)와 延安문예강화 이후의 항일전쟁문예 후기 및 내전시기(1942-1949)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Ⅱ.  중일전쟁 전기의 문예사조(1937-1942) --  항일로 불타오른 문단

 

西安사변1)으로 내적을 회피하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2차 국공합작의 요구가 극에 달한 가운데 1937년 7 7〮 사변으로 일본의 중국에 대한 전면적 침공이 시작되자, 드디어 그해 9월 공산당과 국민당의 ‘2차 국공합작’ 선언으로 전면적인 항일투쟁이 시작되었다. 전 중국 인민이 항일운동에 나서자 일부 작가들도 구국 선전사업에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항일문학운동이 전개되는데, 최초의 항일문학운동은 연극계에서 시작되었다. 1937년 ‘中國劇作家協會’를 결성하고 뒤이어 ‘上海救亡演劇隊’를 조직한 극작가들은 애국정신과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구국공작을 시작했다. 그러나 上海, 北京, 南京이 함락되면서 문인들은 武漢으로 집결하게 된다. 이들은 ‘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이하 문협’를 결성하여 좌우익을 망라한 항일연합전선 구축하고 ‘文章下鄕, 文章入伍’2)라는 구호아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중일전쟁으로 중국의 문단은 양분된 정치세력3)을 따라 공통구, 국통구, 일점구로 나뉘게 된다.

국민당 정부는 문협과 郭沫若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제3청(國民政府軍事委員會第三廳)을 두고 항일 선전공작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胡愈之, 杜國痒, 冯乃超, 洪深 등 많은 공산당원 및 좌파작가가 대거 참여했는데 이후 문예계에서의 공산당 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한 국민당은 제3청을 폐지하고 항일운동에 있어서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영국, 프랑스의 조계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존한 상해의 문단은 주로 ‘孤島’문학으로 서적이 대량 출판되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상해가 일본에 점령된 후, 이곳의 문인들은 국민당 혹은 공산당 통치구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또한 공통구에서는 1940년 毛澤東이〈新民主主義論〉을 발표하면서 세력과 군사력을 넓혀 공통구 문학이 형성되었다. 毛澤東의〈新民主主義論〉은 5  4〮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혁명문학의 성격, 임무, 방향 등을 제시하였다. 공통구 문인들은 가두시운동, 민가학습 등을 통해 군중문예를 강조하여 소형통속작품이 대량 생산되었으며 새로운 형식도 창조되었다. 또한 신문보도에 비해 상세하고 구체적이며 예술화된 보고문학이 성행했으며 시에 있어서는 낭송시, 소설에 있어서는 평서체 소설, 장편소설, 대중소설이 유행하였고, 희극부분은 지방극, 활보극, 가두극, 다막극이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문학은 좌련의 전투적인 전통과 항전투쟁이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항일선전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형식의 다양화와 군중과 문학의 결합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예술적 취향과 정치성을 편향적으로 강조하여 창작의 내실화가 결여되고 창작방법의 공식화라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이 시기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문단에서는 문예의 형식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문예형식에 관한 논쟁은 항전무관론이 제기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문단에 항전과 관련된 작품이 속출하자, 1938년 신월파의 핵심이었던 梁實秋는《中央日報》부간에〈編者的話)〉를 발표, “문예는 항일전쟁과 관계없다”는 논조4)를 내놓게 되었는데 施蟄存, 深從文 등의 작가들도 항전팔고의 지양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공식주의, 구호교조문학을 반대하고, 문예의 냉정초탈과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에 대해 좌익 작가들은 “항전시기에는 예술이상주의는 필요 없다”고 일축하며 순수문예를 배격했다. 郭沫若은《新華日報》를 통해 항전무관론을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켜 ‘항전문예의 역류’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로써 항전문예논쟁이 끝났다.

다음으로 전국론과 그 논쟁이 있다. 1940년 4월 陳銓, 林同濟 등은《戰國策》을 창간하고 이 잡지와《戰國》부간에 지금은 ‘전국시대’5)임을 선전하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토대로 힘을 받드는 ‘상력정치(尙力政治)’6)를 내세웠다. 이들의 문학은 민족문학의 기치 아래 공포, 환락, 정중함을 창작의 모체로 하여 신비, 강력함, 광적인 열정을 창작하였다. 이에 茅盾, 胡繩, 孟超 등이 폭로와 반박을 가했다. 많은 신문잡지들을 통해 비판문장을 게재하고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 그들의 목적을 폭로했으며, 그들의 문예주장은 반이성주의적이고, 소위 공포니 광희니 경건이니 하는 것은 파시즘 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국파에 대한 비판은 나아가 陳銓의〈野玟瑰〉등 극본에 대한 비판으로 표현되었다.

1938년 발족된 문협의 문학과 대중을 결합하는 노력을 계속되었는데 그 결과 向林氷은 전통문학형식의 이용과 대중문학운동의 관계를 제기7)하였다. 그러나 「민족형식」이 구호로 출현한 것은 1938년 10월 毛澤東이 6차 중중전체회의서 발표한〈中國共産黨在民族戰爭中的地位〉에서이다. 여기서 毛澤東은 유산의 계승 및 민족형식의 창조 문제를 제기하였고 1939년부터는 延安문단에서 5 4〮운동의 전통을 확실히 인식하고 구형식을 이용하여 민족형식을 창조하는 경로에 대한 구체적인 토론8)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시작된「민족형식 논쟁」은,  1942년 상반까지 약 3년 여 계속되는 동안, 延安·香港·重慶·桂林·晉察冀邊區 및 上海·永安·金華·成都·昆明·晉冀魯豫邊區·晉綏邊區 등 일점구를 제외한 중국 각 지역에서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수많은 문예종사자가 논쟁에 참가하였고, 수십 차례의 좌담회가 개최되었으며, 공개적으로 발표된 글만 해도 수백 편이 넘었다. 그 다루어진 논점 역시 대단히 다양하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 즉 「민족형식」의 개념, 민족형식 문제 제기의 의의, 신문예·문인문예·민간문예의 성격과 장단점, 전통문예의 계승과 외래문예의 수용 등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검토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문예의 민족성과 세계성·전국성과 지방성·민족화와 대중화·내용과 형식·신형식 탄생의 법칙·예술성과 보급성이라든가 문예와 정치·문예와 사회의 관계 …… 등등과 같은 문예 이론의 각종 문제가 언급되었고, 더 나아가서 심지어는 대중어·문자개혁의 문제와 문화노선·문화정책의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1940년초 毛澤東은〈新民主主義論〉에서 “민족적 형식과 신민주주의적인 내용, 이것이 우리의 신문화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통속화와 구형식의 이용에 관한 문예계의 토론을 촉진시켰다. 이 토론의 실질적 문제는 신문학의 발전 방향이었는데 문인들은 주로 외래 영향을 흡수한 신문학은 점차 이식성을 제거하고 민족기풍을 증강해야한다고 여겼다. 국통구의 문단에서도 “민족형식이란 대중이 듣고 보는데 익숙한 민간문예형식이 중심이며, 5 4〮 이후 신흥문예형식은 부차적이다”고 했다. 이러한 민족형식론은 郭沫若에 와서 그 해답을 찾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郭沫若의 의견은 重慶지역에서 일어난 「민족문예」에 대한「중심원천 논쟁」(민족형식 창조의 중심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에서의 하나의 주장이며 그 결말이나 해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郭沫若의 주장은 민족형식문제에 있어 현실생활의 중요성을 재학인한 점에 있어서는 인정받을만하지만 편견과 오류역시 적지 않다. 또한 郭沫若의 글이 발표된 뒤에 그에 대한 반발 역시 많았다.

민족형식에 관한 논쟁의 종결에 관해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있어왔는데,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이 논쟁은 1942년 상반기에 종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각 지역의 논쟁이 대략 이 무렵 또는 그 직전에 종결되었으며 이 시기 발표된 防耳의 〈민족형식의 재제기〉의 제목과 그 속의 언급으로 보아 민족형식논쟁이 이 시점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 이후 발표된 글에서 뚜렷한 논쟁이나 관점상의 진전이 없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치열했던 민족형식논쟁이 이 무렵 종결된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국공합작의 균열 태평양전쟁의 발발 경제상황의 악화 등 시국의 변화, 둘째, 문예가의 관심의 다각화와 작품창작 등 실천적인 노력의 시도, 셋째 논쟁 자체의 진전 상황이 결국 논쟁을 무종결의 종결로 나아가게 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역별 조정 내지는 수습의 노력이다.

신시기에 들어선 중국 문예계는 그 동안 자산계급의 문예사조라고 부정해왔던 서방의 현대주의까지 포함해서 세계문학의 수용에 몰두하게 되고, 이로써 마치 5 4〮시대와 유사한 상황을 보이기도 하면서 문학의 민족화와 세계화 문제에 대한 재검토가 전개되었다. 이는 민족형식논쟁이 남긴 영향과 무관한 일로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형식논쟁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미완의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Ⅲ.  중일전쟁 후기와 내전시기 문예사조(1942-1949)

 

1.   문단의 침체와 延安문예강화

1941년 6월 독일이 유럽 및 소련 침공하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중국 공산당은 통일전쟁과 공동항일의 기치를 내세워 정치적으로 회복하고 지식인들을 포섭하였다. 이로써 공산당은 적극적으로 문예운동을 주도하게 되고 농민과 지식인을 활용하기 위한 정풍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42년 5월 延安에서 毛澤東은 문예정풍 때《在延安文藝座談會上的講話》(약칭《문예강화》)를 발표하게된다.  문화군대를 위해 사상개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毛澤東은 “정확한 정치적 관점이 없으면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며 당의 방침을 파악하도록 하였고 각자가 실천을 통해 배우고, 사상개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창작의 원칙에 있어서 군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의견을 수집, 종합, 분석, 당론과 합치시키고 이를 해석하여 대중에게 선전하며, 대중의 실천을 관찰하고, 다시 종합, 분석하여 반성하고 수정하여 목적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문예가는 중국공산당의 선전가이며 민중의 대변가가 되도록 요구한 것이다. 毛澤東의《在延安文藝座談會上的講話》은『서언』과『결론』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서언』에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1) 입장문제 : 무산계급과 인민대중의 입장에, 특히 공산당원은 당 당성 당 정책의 입장에 서야한다.
(2) 태도문제 : 적에 대해서는 적의 잔학 기만 및 그 필연적 실패의 전도를 폭로하고, 각종 부동한 동맹자인 친구에 대해서는 연합과 비판이 있어야 하고, 우리 즉 무산계급 및 그 선봉대에 대해서는 당연히 찬양해야 한다.
(3) 대상문제 : 근거지에서 문예작품의 수용 대상은 노농병 및 그 당정군 간부다.

(4) 공작문제 : 문예종사자는 자신의 사상 감정을 변화시키고 개조시켜 노농병 대중의 사상 정서와 한 덩어리로 되어야 한다.
(5) 학습문제 :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사회를 학습해야 한다.

『결론』은 다음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있다.
(1) 우리의 문예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 인민을 위한것
(2) 어떻게 위할 것인가? : 보급과 제고의 문제로 이 역시 노농병에게 보급하고 제고되는 것이다.
(3) 당내의 관계 문제와 당외의 관계의 문제 : 예술은 계급과 당의 정치 요구와 일정한 혁명시기의 혁명임무에 복종해야 한다. 통일전선 속에서는 범위에 따라 각기 단결과 투쟁이 적용되어야 한다.
(4) 문예비평 문제 : 문예비평에는 두 가지 표준이 있는데, 하나는 정치표준이고 하나는 예술표준으로 정치표준을 첫 번째로 예술표준을 두 번째로 놓아야 한다.
(5) 정풍운동 문제 : 철저하고 엄숙한 정풍운동을 필요로 한다.

이로써 다양한 형식의 가두예술이 출현하게 되고 다양한 문예소조의 활동이 전개되는 한편 문예형식이 다양해지고 창작의 소재, 내용, 언어, 인물 등이 변화되었으나 계급성의 강조로 인해 문학의 보편성과 광범위한 기능이 축소되고 밝은 면만 표현함으로써 진실의 반영에 한계를 드러내며, 문인의 다양한 감성과 진실을 표현하지 못하는 등 예술성을 소홀히 하고 창작이 공식화 되는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延安에서 공산당이 문예계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延安문예게로 문인들 집결하였으나 延安생활의 여러 문제점 노출되면서 延安생활의 어두운  면도 창작하는 등 延安공산당의 방침과 어긋나는 창작도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 발단은 丁玲의〈三八節有感〉과 王實味의〈野白合花〉에서 延安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적인 불공정을 비판하면서부터였다. 문인들은 공산당 지도의 평등성과 문학의 자유를 요구하였으며, 어두운 면을 폭로하자는 측과 밝은 면만을 찬양하자는 양측의 대립이 생겼다. 1942년 3~4월 중 《解放日報)》는 毛澤東의 ‘우리들의 학습을 개조하자’ ‘학풍(學風) ·당풍(黨風) ·문풍(文風)을 정돈하자’는 등의 말을 게재하고 정풍운동을 시작하였다. 공산당의 완고한 방침으로 王實味는 숙청되고 문단은 毛澤東을 지지하는 좌파와 비판적인 우파로 구분되었다.

문예정풍 이후 문학은 무산계급의 밝은 면만을 위주로 할 것이 제창되었고, 혁명적 영웅주의를 노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족 문예의 전통을 계승, 발양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형식으로는 문예의 대중화를 강조하고 어느 정도 구형식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희극계에서는 민요와 민속무를 채택하여 현대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고 이것을 토대로 앙가극(秧歌劇)9)을 창작했다. 그러나 《문예강화》에서 문예를 정치에 종속시키고 문예작품의 사상, 내용을 단순히 작품의 정치적 관점과 정치적 경향성에 귀결시킴으로 작가의 개성을 잃어버리게 한 것은 서정시, 서정 산문의 쇠퇴를 가져왔다. 胡風과 舒蕪는 공식교조주의와 객관주의를 반대하는 ‘주관론’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현실주의가 주관적 정신작용의 연소를 통해 객관적 진리와 결합하고 인격적 역량을 제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좌파는 이를 우경사상, 주관적 유심주의, 소자산계급적 개인주의로 매도하고, 교조주의 강화로 나아갔다. 

한편, 1940년 12월 국민당은 임시수도 重慶에서 공산당의《문예강화》발표에 대응하여 1943년 9월 ‘문화운동강령’을 통과시켜 이를 국민당 문예정책의 기본으로 삼았으나 그 내용은《문예강화》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1945년 항일전쟁이 끝나고 ‘문협’은 ‘中華全國文藝協會’로 개명하고 上海, 北京에 분회를 설립하여 각지에 흩어졌던 문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946년 국민당 정부는 단독 통일 정부 건립을 구상하고 공산당은 공산주의 의식개혁을 단행하였다. 1947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최후협상이 결렬되면서 중국은 내전 상태로 돌입하고 문단도 양측으로 나뉘게 되었다. 국민당의 열세 상황에서 좌파의 주장이 극심해졌다. 좌파는 자산계급 자유주의적 문예이며 반동문예라고 비판하였고 우파는 중간노선과 도량과 풍격을 내세우며 순수 문학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우파들은 반우파운동때 숙청되었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는 대만에 정착하여 ‘中國文藝協會’를 결성하였다.

 

2. 어두웠던 40년대 문학의 재조명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대변되는 국난의 시대 40년대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좌익 문예가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에, 당시의 주류적 의식 형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시대 풍조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작가 자신의 속마음의 욕구와 예술적 실험의 의향에 따라서만 글쓰기를 한 작가들도 있었다.

먼저 이러한 작가들의 많은 소설들은 제재의 선택과 주제의 확립에 있어서 하나의 경향을 보이는데, 바로 개인성의 표현을 중시하고, 생활과 정신의 소박한 부분, 몽롱하고 사소한 생각들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혁명을 부르짖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성질을 드러냈다. 沈從文, 錢鐘書, 路翎, 蕭紅, 師陀, 張愛玲, 駱賓基, 孫犁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전쟁이 발발한 시대에서 작가들의 현실적 선택에는 붓을 던지고 종군하는 것과, 혹은 글로써 전쟁을 해석하고 추구하고 실증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 신분을 포기할 수 없고 또한 문학과 현실 정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작가들은 다만 시대의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개인 생활을 지키는 상태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때, 개인 주체의 일상생활 및 일상생활에 관한 기억의 시적 형상을 구성하는데, 그들이 여기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도 그들의 글 속에 나타났었다.

먼저, 칠월파 작가 중 胡風의 문예관을 가장 잘 구형하였다고 하는 路翎(1923-1994)이 있다. 대표작으로 《求愛》등이 있다. 그는 소설에서 표현해야 할 임무가 있는 삶의 진실을 평범한 일상 속의 사소하고 환상적이며 쉽게 부서지는 무수한 인상들 속에서 찾았다. 또한 인성의 발굴을 위해 인성을 발굴하기 위해 잠재된 반의식 혹은 무의식이라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포착하였다. ‘고도’인 上海에서 활동한 여류 작가로 張愛玲(1921- )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단편집《傳奇》, 장편《赤地之戀》, 《秧歌》가 있다. 그녀는 현실과 역사 즉, 현실 생활 속의 일들과 중국인의 심층 구조 사이의 대조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 있어서의 어떤 영원한 것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한다. 그리고 40년대에 나온 고향을 서술한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특히 어린이의 시각을 활용한 것들이 있다. 蕭紅(1911-1942)의 《呼蘭河傳》이나 駱賓基의 소설《姜步畏家史》의 제1부 《幼年》이 그러하다. 일찍이 魯迅도 이러한 방식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40년대 작가들은 작가 자신이 바로 어린이였다는 점 즉, 어린이에게 작가 자신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 魯迅과 다르다. 또한 이러한 점은 중국 현대 문학에서 새로운 시도였다. 張愛玲과 함께 고도를 대표하는 작가 師陀(1910-1988)는《果園城記》나《三個小人物》등에서 소도시의 하층민이나 보잘것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그 안에 포함된 특별한 생명력을 발견하였고, 풍자와 연민의 태도로 불안정한 시대를 표현하고 있다. 蕭紅 작품에서의 뒤뜰이나 駱賓基 작품에서의 변경의 작은 마을, 端木蕻良의 유년 시절의 영토와 신화와 전설의 세계, 沈從文 작품에서의 추상적 공간 등은 모두 작가의 인류 생활 방식의 이상 형태의 상상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직면한 전쟁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에 있어서는 구엽파의 한 명인 穆旦(1918-1977)이 있다. 그의 시들은 중국 전통의 중화와 평형을 거부하고 복잡한 현대인의 사유 방식과 감정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대표작 《被圍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一個圓, 多少年的人工,/ 我們的絶望將它完整./毁壞它, 朋友!讓我們自己/就是它的殘缺”

이러한 작가들은 시대의 중심적 흐름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시대를 버리지는 않았다. 작가로서의 고민과 인간에 대한 탐구가 작품에 담겨 있으며, 사상가의 철학을 해석하고, 시적인 이상을 추구하며, 실증하고, 많은 생명들의 희노애락을 설명하는 등의 작가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로는 이러한 주변적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 신문학 운동이 일어난 이후, 40년대가 이러한 작가들의 가장 완성기였다. 50년대 이후의 문학사에서 이들 작가들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로는 이들 작가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Ⅳ. 꼬리말

 

지금까지 내우외환으로 암울했던 1940년대 중국문학을 돌아보았다. 물론 문학이 항일선전과 정치의 도구로 사용되면서 그 발전을 멈추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작가의 개성과 자유를 버리지 않은 부분도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1940년대는 이전까지의 현대문학을 정리하고 완성한 시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의 문학과 지금까지의 문학에는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현대문학사에서 40년대 문학은 그 경계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이후 중국현대문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40년대 문학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0년대 중국문학은 결코 죽거나 정체된 것이 아니며 다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1) 西安사변 : 1936년 당시 蔣介石 국민당군과 毛澤東의 홍군이 국공내전을 치르고 있을 때, 滿洲와 중국 華北 및 華中지방을 쳐내려오는 일본에 항전하지 못하고 홍군과의 싸움에만 전념하는  蔣介石에게 불만을 품은 滿洲군벌 張作霖의 아들 張學良과 楊虎城은 1936년 12월 12일 西安 북쪽 250킬로미터에 위치한 延安에 홍군의 사령부와 대치하고 있는 국민당군의 최전선을 시찰 온 蔣介石을 체포하여 구금한 사건.

2) 文章下鄕,文章入伍 : “문장을 시골로, 문장을 군대로”

3) 국민당 통치구역 혹은 정부통치구역과 공산당통치구역 혹은 민족해방구역으로 나뉨.

4) 梁實秋가 실제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즉 “항전과 관련된 소재라면 우리가 가장 환영하는 바다. 그러나 항전과 무관한 소재라도 진실하고 유창하기만 하다면 역시 괜찮으며, 억지로 항전과 관련시킬 필요는 없다. 공허한 ‘항전팔고(抗戰八股)’ 그것은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다.

5) 전국시대 : 그 뜻은 결국 제국주의에 의해 통일된다는 것임.

6) “세상에는 정의도 없고 악도 없고, 오직 강권만이 있을 뿐이다.” - 이는 파시즘과 일맥상통한다.

7) ‘舊甁裝新酒(헌 병에 새 술 담기)’

8) “신문학이 대중화가 덜 된 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이다”, “민족의 문화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민족문학형식의 기초는 5.4 이래 신문학인가, 아니면 구문학 및 민간문학인가?” 에 대한 토론.

9) 秧歌劇 : ‘秧歌’라는 것은 북방의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는 민요의 일종으로 어느 농촌에서나 흔히 보는 논밭에서 일하며 부르는 노동요이다. 이를 희극의 형태로 만든 것이 秧歌劇이다. 秧歌劇의 최초작품은〈兄妹開荒〉이라는 단막가극이다.

 

참고문헌

허세욱 著,《중국현대문학사》,(서울 : 법문사 1999)
김시준 著,《중국현대문학사》,(서울 : 지식산업사, 1992)
黃修已 著, 고대중국어문연구회 譯, 《중국현대문학발전사》,(서울 : 범우사, 1991)
김혜준,《중국항일전쟁시기 ‘문학의 민족형식 논쟁’ 연구》, (서울 : 고려대학교 석사논문 1987. 2)
김혜준, 《중국현대문학의 ‘민족형식 논쟁’ 연구》, (서울 :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1996. 2)
溫儒敏 著, 김수영 譯 《현대중국의 현실주의 문학사》,(서울 : 문학과 지성사, 1991)
范智紅, <平凡生活的復現及其敍事功能 -四十年代小說藝術論之->, 《文學評論 1997年第2期》 錢理群, 溫儒敏, 吳福輝,《中國現代文學三十年(修訂本)》,(북경대학출판사, 1998년 7월)
www. yahoo.co.kr / 야후사전

 

 

<질의답변서>

 

Q. 중일전쟁 중 중국의 문단이 여러 개로 나뉘었는데 이들 간의 마찰 또는 비판은 없었는가, 또한 현실주의가 문예형식 논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자유주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자 - 중어중문 주 보현, 언어정보 이 승현 / 답변자 - 변 석진)

A. 항일전쟁 중에도 국공내전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한 문단간의 마찰도 있었다. 문예형식 논쟁은 공통구의 현실주의 경향 작가들만의 논쟁이 아니라 공통구와 국통구에서 함께 있었던 현상이다. 즉, 이것이 각 문단간의 마찰과 논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국통구에는 우파만이, 공통구에는 좌파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Q. 최초의 항일문학운동이 연극계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어떤 연극들이 있었는가? (질문자 - 언어정보 김 지영 / 답변자 - 변 석진)

A. 항일운동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일반대중들에게 그 효과가 가장 큰 것은 시와 희곡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희곡이 가장 번영할 수 있었다. 항전시기 연극은 전후방과 도시, 농촌의 구별이나 무대의 구별도 없었다. 항일선전의 필요성에 따라 당시 대량의 단막극, 가두극, 보고극 등이 나왔는데 내용의 대부분은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 매국노를 비판 징벌하는 것, 부상병이 다시 전선으로 나가는 것, 병사들이 영웅적으로 적을 무찌르는 것, 민중이 단결하여 적과 대적하는 것 등등이었다. 이들 연극은 예술적으로는 비교적 단순하고 조잡했으나 공연효과는 뛰어났는데, 그중〈放下你鞭子(채찍을 놓아라)〉의 영향력이 가장 켰다. 이는 거리나 광장에서 공연할 때 배우가 관중속에서 연기함으로써 현실감을 강화해주었다. 이와 함께〈叁江好〉,〈最后一计(최후의 한 계책)〉은 항전초기 대표적 소형희극이었다. 또한 崔巍의〈八白壮士〉와 将锡金, 罗烽 등이 쓴 〈台儿庄〉등도 항적사기를 드높였다. 이 외에 항전을 소재로 한 항전시기 첫 번째 극으로는〈保卫蘆沟桥(노구교를 지키자)〉가 있다.

 

Q. '文章下乡, 文章入伍'의 구호를 통한 항일운동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 성과는 어떠하였는가? (질문자 - 언어정보 임 미주 / 답변자 - 변 석진)

A. 문협이 발족되고 항일운동을 펼치면서 문단은 '文章下乡, 文章入伍' 아래 작가전지방문단을 조직하여, 작가가 전선과 민간에 깊이 파고 들어가 항전의 현실을 묘사함으로써 인민군중의 철저한 항전의지를 격발시키는 것을 도왔다.

 

Q. 중일전쟁 전기의 평서체 소설, 장편소설, 대중소설 그리고 희곡부분에서의 지방극, 활보극, 가두극, 다막극의 차이는? (질문자 - 중어중문 이덕금/ 답변자 - 변 석진)

A. 평서는 중국의 전통적인 문학형태로 평서(评书)란 이야기를 구연하는 것이다. 赵树理로부터 이러한 중국의 전통적인 평서를 현대소설로 개조하여 평서체 소설의 형식을 창조되었다. 또한 수년간 작가들이 전쟁을 몸소 겪은 것들이 작품의 소재가 되면서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짦은 글로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점차 장편소설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 내용은 주로 인민군중의 경험과 아픔 등 대중에 관한 것이었다. 연극계에서는 초기에 항일선전을 극대화하기 위해 작가가 직접 지방을 돌아다니며 선보인 지방극이 성행하였다. 활보란活的报纸'라는 의미로 시사적인 사건을 스케치와 같은 수법을 사용하여 신속하게 반영한 희극의 한 종류로, 대체로 부정적 인물에 대해 희화적 묘사를 통한 비판을 가하는데, 길이가 짧고 형식이 간단하며 보통 거리나 광장에서 공연하는 것이다. 가두극 은 극장의 형태를 부정하고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항전 초기에는 소형화되고 통속화된 단막극이 유행하였으나 이후 그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막극이 창작되었다.

 

Q. 문예정풍운동에서 毛泽东의 의견에 대한 비판과 문예정풍운동의 영향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질문자 - 중어중문 이 덕금 / 답변자 - 문 새암)

A. 문예정풍운동은 문예공작이 중국혁명을 위해 더욱 잘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다. 문예정풍으로 인해 공통구의 문예에 문예는 노농병을 위해 봉사한다는 방침하에 군중문예운동이 흥성해져 그 규모와 성과가 정풍이전보다 훨씬 좋았다. 문예정풍은 인민군중과 5 4 신문학의 결합을 촉진해 신문학이 지식인의 테두리를 벗어나 농민과 병사에게 나아가서 그들의 긍정과 사랑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신문학은 주로 서방문학의 형식을 배우던 것에서 민족, 민간전통의 양분 흡수와 인민군중의 생동적인 언어학습을 더욱 중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어, 민족화의 길에 새로운 진전이 있게 되었다. 毛泽东의《文艺讲话》는 문예는 정치에 종속한다는 관점, 문예작품의 사상 내용을 단순히 작품의 정치적 관점과 정치적 경향성에 귀결시킨 점, 정치표준을 문예작품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으로 삼은 관점, 소자산계급 지식인에 대한 평가 등등의 비판이 있다. p 557

 

Q. 국공내전 후기 문예에서 좌파가 자산계급 자유주의적 문예이며 반동문예라고 비판하였고..에서 좌파가 비판 한 것이 무엇인가? (질문자 - 언어정보 이 경석 / 답변자 - 문 새암)

A. 문예정풍이후 문학은 무산계급의 밝은 면을 위주로 할 것이 제창되고 혁명적 영웅주의를 노래하게 되었다. 또한 민족문예의 전통을 계승 발양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우파는 이것이 작가의 예술적 개성을 무시하는 것이라 보고 교조주의와 객관주의를 질타, 순수문학을 주장하였다. 이에 좌파는 반자본주의투쟁을 주장하여 혁명문학이 아닌 것은 주관적 유심주의, 소자산계급적 개인주의로 매도하고 비판하였다.

 

Q. 중국문예협회가 결성된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질문자 - 언어정보 김 지영 / 답변자 - 문 새암)

A. 해방이후, 국민당은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놓고 다양한 모색을 하게 된다. 그 모색에서 대두된 주된 입장들은 중국 대륙의 문학전통에 합류하고자 하는 중국 전통 문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고자 하는 좌파, 그리고 문학의 독자성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대만 민족주의파 등이었다. 이 다양한 모색으로 1950년 국민당 정부의 주도하에 중국문예협회가 결성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소련에 맞서 싸우는 삼민주의 문예'가 제창되면서 다 같이 중단된다. 이로부터 국민당측의 우파 문학에는 '반공 문학 시기'가 시작되며 대륙 출신의 문학인들이 주도하고 대문출신의 문학인들은 소외되는 국면이 펼쳐진다.

 

Q. 문예정풍운동이 일어나게 된 목적과 배경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 주세요.(질문자 - 언어 정보 이 승현 / 답변자 - 문 새암)

A. 근거지의 문예운동이 발전해 나갈 즈음 국제적, 국내적 정치 상황에 커다란 변동이 생겼다. 1941년 말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중국의 항일전쟁도 역시 극히 어려운 대치국면에 들어섰다. 일본은 그 주요 병력을 동원하여 공통구를 포위, 공격하면서 소위 叁光政策(1940년 홍군의 대대적 반격 이후 일본군이 취한, 모조리 불태우고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약탈함으로써 홍군의 거점을 없앤다는 전술.)을 펼쳤다. 국민당은 항일엔 소극적이면서 반공에는 적극적이었다. 근거지의 범위는 축소되었고 군사적 투쟁과 물질적 생활 모두 극심한 어려움을 맞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한편으로는 근거지 민관군을 이끌고 대생산운동을 전개하면서 난관을 극복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전 공산당의 정풍운동을 전개하였다. 정풍운동은 교조주의의 반대를 주요내용으로 하여,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중국의 혁명실천을 상호 결합함으로써 중국혁명 문제를 독립 자주적으로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이는 의미 있는 또 한차례의 사상해방운동이었다. 정풍운동 중에 중국 공산당은 근거지의 문예정풍운동도 동시에 전개하였다. 문예정풍운동의 목적은, 문예공작이 중국혁명을 위하여 더욱 잘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는 비록 신문학이 5.4이후 시종 중국혁명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왔고 어떤 때는 중국혁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약점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전시기에 이르러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근거지에서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 하에 이러한 약점이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서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Q. 공통구가 발표한 <<문예강화>>와 국통구가 발표한 <문화운동강령>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은 무엇이고, 그 성과는 어땠나요? (질문자-중문과 김 소연 / 답변자-최 은진)

A. <<문예강화>>의 정식명칭은 <<옌안(延安) 문예좌담회에서의 담화>>이다. 항일전을 벌이던 延安에서 정풍운동의 일환으로서, 1942년 5월 3회에 걸쳐 개최된 문예좌담회에서 毛泽东이 발언한 서론과 결론을 문장화한 것이며, 1943년 10월 19일자 《해방일보》를 통하여 활자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으로서 비교적 짜임새 있고 독특한 역사적 문헌이며, 발표 후 줄곧 중국공산당의 문예방침이 되어, 싸우는 노농병대중으로 하여금 문예의 지도권을 확보하게 하는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내용은 항일전 중의 여러 조건에 대한 명확한 분석, 노농병대중을 위한 문예라는 기본원칙의 강조, 그러한 문예의‘원천’속에서 벌이는 실천에 의한 인식, 이에 의한 자기개조와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의 학습이라는 실천적 창작방법의 규정 등이다. 문예비평에서의 정치기준과 예술기준의 관계와 그 통일, 보급과 향상의 관계와 그 통일 등의 이론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문예는 정치에 종속되었고, 문예는 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드러냈고, 문예비평의 기준에 있어 "정치표준이 첫째이고, 예술표준이 둘째"라는 원칙을 뚜렷이 했다. <<문예강화>>가발표되자 延安의 기풍을 비판하거나 문학과 정치를 따로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비판하는 철퇴가 반박 또는 반성문의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곧 <<문예강화>>와 정치의 관계를 증명한 비판이었다. <<문예강화>>자체가 정풍의 책략인 이상 그것이 게시된뒤 1943년부터 5, 6년 동안 바로 신중국이 세워지기까지 줄곧 현실주의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다. 거기에는 두 가지 초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胡风과 수우가 제기한 '주관론'이고 다른 하나는 茅盾의 유일한 희곡 <<청명전후>>(1945)와 夏衍의 희곡 <<芳草天涯>>(1945)에 대한 평가와 그에 상관한 정치와 문예의 관계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그러나 문제점으로는 문예유산에 대한 역사주의적 관점의 경시, 특히 근대 문예 내지 프롤레타리아문예의 계승이론의 결여, 문예의 상대적 독자성에 대한 무관심, 예술에 대한 기술주의적 해석, 농민중심주의에 흐르기 쉬운‘노농병대중’이라는 용어의 개념 등을 들 수 있다. 毛泽东이 延安에서 <<문예강화>>를 발표할 때, 국통구에서 국민당의 중앙선전부장인 张道藩 또한 1942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문예정책>을 발표했다. 여기에서는 바로 문예에 유파란 있을 수 없고, 기실 오로지 국민당 정치를 위해 복무하는 문예만이 용납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내세웠다. 그래서 그는, "전적으로 사회의 암흑을 쓰지 말며, 계급적 원한을 불러일으키지 말며, 부정확한 의식을 표현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반면에 그가 표현해도 된다고 한 '정확한 의식'이란 바로 국민당의 삼민주의와 현행 국가의 정책 및 충효·인애·신의·평화 등의 봉건관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듬해 9월, 국민당 제 5 기 11차 중앙위원회 회의에서는 <문화운동강령(文化运动纲领)>이 통과되었다. 이후부터 한편으로는 선전도구를 가동시켜 그들의 문예정책을 선전하면서, 한편으로는 계속하여 <서점 인쇄소 관리규정>, <도서 잡지 극본 심사지침 개정>, <출판물 심사법과 게재 금지기준> 등을 공포했다. 당시 重庆 한 곳에서 천여 종의 책과 간행물의 판매가 금지되었고, 백여 종의 극이 상연되지 못했다. 1943년 국민당의 <文化运动纲领>이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통과된 뒤, <<신화일보>>는 즉시 사설을 발표, '반파시스트 자유민주의 문화'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내세워 정면으로 맞섰고 또한 延安 문예정풍의 정신에 근거하여 문화는 마땅히 인민군중을 위해야만 한다는 구호를 제기했다. 郭沫若 역시 문화는 인민을 본위로 삼아야 한다고 제기했다.

 

Q. 40년대를 작가들의 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와 이러한 작가들이 50년대에는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질문자 - 언어정보 김지영, 안호숙, 중어중문 진상희 / 답변자 - 중어중문 박주경)

A. 「1940년대의 문학계에서는 ‘현대화’와 ‘현대민족국가’를 건립하려는 ‘신문학’의 전통 주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전쟁은 생존 상황을 급박하게 위협한 반면 오히려 이런 틈새를 비집고 생활과 예술의 다양한 연결 방식에 대한 탐색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런 탐색들은 가혹한 현실 속에서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더욱 ‘개인화’된 체험 방식으로써 인간성의 깊은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이 기간의 작품 창작에 표현되어 나왔다. …… 전쟁으로 인한 좌절감은 일부 작가로 하여금 더욱 깊은 층면에서 사회와 인생의 상충된 상황을 성찰하게 하였고, 중국 사회가 처한 ‘현대문명’충격하의 ‘곤경’을 숙고하게 하였다. 감정의 낭비와 냉소, 유머를 벗어나 지적이고 자신의 약점과 한계에 대해 깨어있는 풍자는, 40년대의 특징을 구비했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도달하려는 심미적 태도였다. 작가는 자각된 의식을 가지고 개인 체험을 창작의 출발점으로 하여 전통과 외래의 수용으로 창조적인 주조를 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자신의 예술적 개성을 빚어내었다. …… 연안 문학을 중요한 구성 성분으로 하는 좌익문학이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일한 문학적 사실이 됨으로써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고, 毛泽东의 문예사상이 지도적 사상이 되면서 문학창작의 제재, 주제, 풍격 등에서 준수해야 할 ‘규범’이 규정되었고, 작가의 존재 방식, 글쓰기 방식, 작품의 출판, 독서와 비평 등의 문학 활동 방식에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던 것이다.」(박정희, <문학사로 본 새로운 역사 - 중국 당대의 ‘문학사 다시 쓰기’ 담론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당대문학사》, 서울 : 비봉출판사, 2000년, pp311~378 중에서) 1940년대에는 신문학 운동 이후의 백화문 쓰기와 문학에서의 인성과 개성 해방 추구 등의 지속, 발전과 전쟁으로 인한 삶에 대한 깊은 통찰 등을 바탕으로 보다 성숙된 문학 작품들이 출현한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이후로는 이러한 작품 활동들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개인을 버리고 단순히 사회주의 혁명에 따라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문예 창작에 있어서도 극도의 일체화로 이념에 복무하는 작품 외의 다른 문학은 모두 다 비판 받았다. 외부적인 억압으로 단지 문학 작품의 출판만이 불가능하였는가? 1950~1970년대는 지식인들의 정신 혁명이 이루어지는 때로, 많은 지식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가 먼저  자아비판을 하여야 했으며, 그러한 많은 자아비판의 글들이 잡지에 실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표면적인 자아비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아의 분열이 일어나고 심리 기질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들의 창작 능력과 감각이 사회주의 의식 속에서 마멸되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작품 발표 시기가 왔어도 작가들은 이전과 같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실제로 앞 시간에 소개하였던 작가 몇몇을 살펴본다면, 萧红의 경우에는 1942년에 일찍 생을 마감하였고, 张爱玲은 홍콩을 통해 미국으로 넘어 갔지만 창작 활동이 계속되지는 않았으며, 沈从文도 절필하였고, 路翎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등 이들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1940년대가 그들의 최고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30,40년대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하였는데, 그러나 1950년대-70년대에 오랫동안 펜을 놓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문학계에 복귀한 '归来诗人' 艾靑의 시에서 그들의 곤혹을 읽을 수 있다. 「이미 때늦은 '돌아옴'은 그들의 창작을 "한차례 재난 뒤의 한 가닥 슬픈 미소,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유감에 가득찬 시편...... "(艾靑, <致亡友丹娜之灵>) 이 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洪子诚 저, 박정희 역 《중국당대문학사》(서울:비봉출판사, 2000년), pp217) 개인성을 비판하는 신중국에서 이들 작가들의 작품은 비판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穆旦을 비롯하여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인간 이화 상태를 그리는 모더니즘 계열의 구엽파 시인들은 더욱 더 그러했다. 또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은 중국에서의 비판 방식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 간주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와 반대되는 것에 대한 배척이 극화 된 시대였다.

 

Q. 작가의 개성과 자유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항일정신 같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작품을 창작한 작가는 없었는가? 있다면 누구의 어떤 작품인가? (질문자 - 행정 강 지혜 / 답변자 -  박 주경)

A. 먼저 ‘시대정신’이라는 표현과 관련해서, 발표문의 5쪽에서 “혁명을 부르짖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성질을 드러냈다”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이는 참고문헌 <平凡生活的复现及其敍事功能 -四十年代小说艺术论之->에 나오는 "它们显示出一种与这个伟大时代的时代精神不甚相称的性质"을 옮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과거에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주류적 흐름만으로 간주해 왔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가 않다. 한 시대 아래에서도 여러 가지 상황이 존재하며, 무엇을 중심에 두고 창작하느냐는 작가 나름일 것이다. 시대정신은 꼭 주류적인 것만을 지칭하지는 않으며, 한 시대의 시대정신이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1940년대의 시대정신을 살펴본다면, 항일 정신 외에도 사회주의적 흐름이나 전쟁 속의 모순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작가의 개성과 자유라는 것도 어떠한 작가든 그 시대나 문화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다. 물론 질문자의 질문 의도는 잘 알겠지만, ‘시대정신’과 ‘작가의 개성과 자유’라는 것이 다소 주관적인 기준으로 여겨진다. 모든 작가와 작품들을 “시대정신에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 “작가의 개성과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로 나누어 살펴보기란 지금의 역량으로는 곤란한 것 같다. 직접 모든 작품들을 섭렵하여 작품들에 대한 나름의 주관이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속 시원한 답변을 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 시대의 모든 작품들이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는 않고 路翎이나 张爱玲과 같은 작가들도 역시 현실을 간과하지 않고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작가들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쾌한 답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을 소개한다면, 먼저 路翎의 <财主底儿女们>이 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의 개성이 있으면서  ‘민중 계몽’을 중심으로 하여 작품을 창작한 작가로 赵树理(1906~1970)가 있다. 그는 민간적 언어로 민간 생활을 제재로 하여 토지개혁, 미신 타파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小二黑结婚>과 <李有才板话>이 대표적이다.

 

Q. 조계지인 上海의 문학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질문자 - 행정 강 지혜 / 답변자 - 박 주경)

A. (먼저 발표문에서 张爱玲과 师陀를 上海 일본점령구의 작가로 수정합니다.) 「1937년 10월 上海가 함락되자 영국과 프랑스 등의 조계는 일본의 포위 속에서 절해 고도의 형국이 되었다. 일부 작가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항전문예운동을 견지하였으며, 그 기간은 일본이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이후 조계를 침략할 때까지 장장 4년 1개월이었다. 사람들은 이 기간 동안 上海 조계에서 벌어진 문학운동을 고도문학이라고 부른다. 고도문학의 성취는 대단하였다. 우선 출판 방면에서는 희극 운동은 고도문학 중에서 가장 활발했던 한 분야이며, 또한 창작의 성취가 각 분야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분야이기도 하다. 于伶이 이끈 上海剧艺社는 가장 중요한 희극 단체였으며 그 밖에 군중성의 소극단은 백여 개에 달하였다. 연극 창작 방면에서는 阿英의 南明史剧과 于伶의 <夜上海>가 가장 중요하다. 산문 분야에서 비교적 영향력이 컸던 것 중의 하나는 잡문이다. 많은 작가가 鲁迅의 전통을 이어 신문 잡지에서 잡문으로 일본이 중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부리는 갖가지 속임수를 폭로하고 적에게 투항한 매국노들의 추한 면모를 폭로하였으며, 또한 민족적 위기 속에서 드러난 민족의 열근성을 채찍질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들은 또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 가운데 광채를 발한 훌륭한 민족정신을 찬양하였다. 이 밖에 소설과 아동문학 등의 분야에서도 비교적 우수한 작품이 나왔다.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의 애국작가들은 “가시덤불 속에서 잠행하였고, 진흙탕 속에서 악전고투하였다.” 그들의 전과는 고도문학을 항전문예의 한 중요한 부분으로 만든 것이다. 」 (황수기 저, 고대중국어문연구회 역 <중국현대문학발전사>(서울:범우사, 1991년)에서)

 

Q. 문학이라는 것은 작가가 창작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문학을 읽는 독자가 있어야 더욱 빛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내전외전이 끊이지 않는 40년대에 항일사상 고취 등을 목적으로 쓴 문학들이 그 목표만큼 성과가 있었는지(그 정도로 널리 읽혔는지) 궁금하다 (질문자 - 언어정보 임 미주 / 답변자 - 박 주경)

A. 성과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항전문예운동에서는 희극운동이 그 선봉이었다. 선전의 필요성에 따라 당시 대량의 단만극․가두극․보고극 등이 나왔다. 내용은 대부분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 매국노를 비판 징벌하는 것, 부상병이 다시 전선으로 나가는 것, 병사들이 영웅적으로 적을 무찌르는 것, 민중이 단결하여 적과 대적하는 것 등등이었다. 이들 연극은 예술적으로는 비교적 단순하고 조잡했으나 공연 효과는 대부분 뛰어났는데, 이는 나름대로 대중의 굳은 항일정신을 반영함으로써 강렬한 선전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규모 희극의 성행처럼, 문학에서 비교적 간편한 형식인 보고문학․단시․낭송시의 창작 역시 활발하였다. 항전 초기 흥분된 사람들은 전황과 민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므로 보고문학이 다시 한 번 성행하게 되었다. 낭송시는 1937년 武汉에서 거행된 鲁迅 서거 1주년 추모회에서 시낭송 활동이 시작되어 이후 각종 집회나 거리와 방송에서 항상 시낭송이 있었다. 朱自淸은 낭송시에 대해서 “선전은 낭송시의 임무며, 낭송시는 행동이나 일을 풍자하고 비평하며 고무한다. 낭송시는 때로 형상화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나라한 추상적 언어 - 이는 지식인 냄새가 풍기는 구질구질한 언어가 아니라 매운 맛과 뜨거운 기운이 충만하고 통쾌함이 가득찬 언어다 - 를 사용하는 데 있다. 이는 구어요, 대화요, 듣는 이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덧붙여서, 항일 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쓴 작품은 아니지만, 민가체라는 형식상의 특징으로 인해 민중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작품들이 있다. 국통구에서 출현한 <马凡陀的山歌>는 대부분 시민에게 익숙한 민요와 소조의 격조로 쓰여진 것이며 어떤 것은 곡조에 가사만 붙인 것이다. 가볍고 위트있고 유머러스하지만 예리하고 신랄하며 예봉이 있다. 공통구에서 나온<白毛女>는 ‘구사회는 사람을 귀신으로 만들고 신사회는 귀신을 사람으로 만든다’는 주제의  앙가극이다.

Q. 이 발표문에서 중점적으로 알아야 하는 요점을 알 수가 없다. 중일전쟁간의 항일 문예인가? 국통구와 공통구 등의 논쟁인가? 주목 받지 못했던 40년대 비주류 문학에 대한 재조명인가? (질문자 - 언어정보 최 인화 / 답변자 - 박주경)

A. 먼저 준비 과정에서의 역량과 노력의 부족으로 발표 내용이 다소 산만하게 전달되었음에 사과 드립니다^-^  아무튼, 발표의 원래 의도와 발표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말한다면, 어느 한 분야에 중점을 맞춘 것은 없다. 단지 1940년대 문학의 전반적인 흐름과 경향, 의의이다. 물론 1940년대의 특수성으로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즉 전쟁 시기라는 점이 중요하게 적용될 것이다. 그리고 신문학 운동 이후로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는 점, 그리고 이후 1950년대 문학과는 다르다는 점, 하지만 그러한 전환을 맞이해 가는 중이라는 점 등을 강조하고 싶었다. 어느 한 시대를 재현해 내는 데에 있어서, 그 시대의 어느 한 일면이나 부분만을 보여 주어서는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많이 고민했는데, 딱히 알맞은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번 발표 준비하면서 느낀 바도 그러하지만, 그만큼 1940년대 문학은 풍부하고 다양하고 복잡했다. 여러분께 보여 주고 싶은 것도 그러한 점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식적인 측면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서 듣고 잘 알아 둔다는 것 보다는 여러 면을 다만 느낄 수 있는 것이 더 의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역량과 노력의 부족으로 처음의 의도에 따라서 매끄럽게 되지는 못하였다. 일관성 있게 묶어 내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다시 한번 사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