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12일
목 차 Ⅰ.
문화대혁명 |
이경석
: 발표가 끝나고 나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 이제 정말 학교생활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우들과 같이 모여 발표를 준비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함께 했던 2주간의 식ㄴ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마지막이니만큼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짧은 지식과 열의 부족으로 매끄럽게 발표를 마치지 못 한 것이 아직도 부끄럽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2주간의 즐거움으로 모두 보상을 받은 것 같다. 열심히 모자란 조장을 따라준 조원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자칫 서먹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에서도 잘 어울려준 상희양에게도 감사한다. 혼자서 다른 과에 가서 작업을 같이 하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쉽게 알기 어려운 50년대 이후의 중국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고맙게 생각한다. 월요일 저녁에는 조원들이랑 술 한 잔 해야겠다...
이승현
: 먼저 발표가 마무리되어 정말 기쁘다. 기쁜 만큼 발표를 하면서 어려운 점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주제를 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의 긴 시간동안 중국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 알맞은 주제를 찾아 그것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하나의 의견으로 조합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라면 교과서에 나오는 간단한 내용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발표를 통해서 적어도 그 시기의 문예는 어떠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어 뿌듯하다. 의견을 조합하는데 있어서 자주 모임을 갖고 얘기를 많이 나눈 것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서로의 생각은 어떤지 의견 교환도 하고, 큰 부담을 나눠 진 것 같아서 훨씬 좋았다. 아무튼 모두들 수고했고 고맙다.
진상희
: 처음엔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발표 준비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서로 잘 맞춰가며 준비하는 동안 토론도 하고 가르쳐 주고 배우기도 하면서 조별 발표를 계획하신 교수님의 의도에 조금은 부합되는 준비 과정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몇 가지 이야기 나눴던 서로 다른 시각들과 주제들을 자료 부족이라는 핑계아래 관철시키지 못한 점이 많이 아쉬웠다. 그리고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는 말처럼 내용의 전달하는데 있어서 나는 충분한 연습과 준비가 부족해서 생각했던 것처럼 잘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 후회스럽다. 정말 모두가 한결같이 말했던 것처럼 많이 부담스러웠던 것만큼 일단 끝나서 너무 후련하다. 그리고 단지발표 과정과 그 이후 정리에 있어서도 남는 것이 많은 경험 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조 함께해서 즐거웠고 다들 수고하셨어요 ^^
최인화
: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작은데도 구석구석 다 알지 못하는데, 이 세상 많고 많은 나라들에 대해 내가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늘 나를 따라 다니는 것이다.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겪어보고 싶다는 것은 대학 생활에 있어서 늘 내가 추구하는 목표이며, 수업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중국에 대해서 글자 그대로 '문외한'이었던 나는 적어도 지금 '문화대혁명'의 부분에서는 어느 누구와 이야기해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깊은 주제의 심도 있는 대화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꽤 많은 논문과 책을 보고 의견을 나누고, 원인을 분석했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 무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그것에 서툴던 능숙하던 열심히 노력했고, 누군가의 '이해하기 쉬웠다','수고했다'는 말은 그동안의 노력에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는 기쁜 것이었다.
중국 당대문학사에 있어 문화대혁명의 시기는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데 그 의의가 크다. 그것은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인해 현대 중국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예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변화를 야기한 문화대혁명이라는 사회적 배경의 이해를 선결과제로 삼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해당하는 1966년에서 1976년의 문예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956년부터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후 1958년에 소련이 大躍進과 人民公社, 그리고 金門島포격사건2)을 비난하면서 소련 통제하의 중소연합함대를 창설할 것을 계획하자 중소관계는 본격적으로 악화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중국은 1960년대 격화된 월남전으로 미국과의 전면전의 위험도 있었다. 이러한 외부 압력으로부터 사회전체가 전시체제와 유사한 구조로 움직이면서 고조된 긴장은 대중들의 심리를 폭력에 쉽게 동화되는 비정상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게다가 중공이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 일종의 계급정책을 도입하며, 국민들을 출신성분과 당의 정책에 호응하는 정도에 따라 분류해서 차별대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 속에 사회적 갈등이 불안하게 내재되어 있었다. 대중들은 정신적, 물질적 압력을 해소할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소련과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중공의 정책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하게된다.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소령 공산당의 정책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을 뿐 아니라. 이에 휩쓸리지 않도록 생산력을 높이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던 데서 계급투쟁과 정신무장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대략 57년을 기점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방향전환에는 毛澤東澤東(이하 毛澤東)의 사상적 변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약진이나 인민공사 등도 사실은 경제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약진이 실패하고 1959년에 廬山회의에서 정책 오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2선으로 물러나, 당의 정책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던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우회적인 경로를 통한 비판운동의 토대 마련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 문예계에 대한 毛澤東의 관심과 비판이 강화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毛澤東의 이러한 권력 재탈환이 문혁의 주요한 원인이지만, 그 밖에도 혁명이 일어나게 된 다른 요인들도 무시할 수 없다. 문혁은 이념적으로 계급 투쟁을 기초로 했는데, 이는 인민 내부의 모순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당내 주자파와 인민 대중과의 투쟁이었다. 혁명은 인민 대중의 사회주의 교육과 그를 통한 대중동원의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반대세력에 대한 견제와 선전을 위한 인민 해방군의 무력과 조직체계를 필요로 했다. 문혁이 지향하는 명시적 목표중의 하나는 당내 주자파에 의해 조성된 자본주의 경향과 인민대중 일부에 잔존해 있는 유교주의적 문화 및 자본주의적 문화를 동시에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당 내부에서도 주자파와 毛澤東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계열로의 분열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고, 무지몽매했던 당시의 대중들이 그러한 정치권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없이 선동되어 주체성을 잃은 것 또한 문혁이 일어나 정체되는 시기를 가지고 온 요인이 되었다.
대약진 실패 이후 毛澤東를 대표로 하는 정치권력 집단은 당 내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毛澤東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책결정의 1선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정부와 당의 대부분의 업무는 국가주석인 劉少奇와 당 총서기인 鄧小平의 관할 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毛澤東는 자신을 소외시키는 중공 지도부에 대해서 자신의 지위와 신변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毛澤東는 되찾기 위해 羅瑞卿, 陸定一, 楊尙昆등을 제거하였고, 林彪, 江靑등의 毛澤東와 주변세력들이 군과 언론 등을 장악하게 되었다.
毛澤東와 문혁을 주도한 세력들이 문예비평에 관심을 집중하고, 毛澤東의 우상화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문예를 이용했다. 문예가 정치 현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현대 중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런데 49년 이후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예가 정치 투쟁의 직접적인 수단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毛澤東등은 모범극인 ‘樣板戱’를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을 주입시켰다.
한동안은 毛澤東와 江靑등의 4인방과 林彪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이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毛澤東에게 호응하여 당권파를 비난하고 나섰던 대중들이 무정부적인 성격을 때면서 통제가 불가능해지자 林彪가 나서서 대중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여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毛澤東는 이에 불안감을 느껴 구 당권파와의 단합 등을 꾀해 林彪를 제압하려 하였고, 林彪 또한 毛澤東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는데, 1971년 林彪가 비행기 사고3)로 죽게 되면서 주도세력을 잃은 문혁은 사실상의 끔을 맞이하게 된다.
문혁 주도세력이 와해됨으로써 운동에 대한 회의와 냉소적 반응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이미 문혁의 시작단계에서 ‘절대 무오류’로 믿어오면 당의 권위를 부정하는 경험을 한 대중들은, 모든 가치와 권위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됨으로써 국가권력으로 문예계에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해졌다. 1949년 7월 2일에 열린 제1차 <中華全國文學藝術工作者代表> (약칭 文大會)이후 본격적인 통제가 시작되었으며 문예는 당과의 일체화를 목적으로 하였고 다른 경향은 존재하기 어려웠다. 문예계에 대한 통제는 작품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운동과 당을 대표하는 문예조직을 통해 계속 되었다. 그리고 허구적인 대중을 통해 우회적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던 문예계에 대한 통제는 문혁을 맞이하여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1966년 2월에 작성된 <林彪委託江靑召開的部隊文藝工作座談會紀要>를 통해 이전의 성과가 부정된 후, 문예계는 당내 문혁 주도세력과 급진적 대중들에 의해 주요한 공격 목표이자 시범적인 개조대상이 되었다. 문혁주도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해 기존 세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문혁시기 문예가 이전과 다른 점이다.
1949년 제 1차 文大會에서 毛澤東의 <文藝講話>를 사회주의 중국의 유일한 문예규범이라 선정하였다. 그러나 <文藝講話>는 1942년 당시의 실천적 규범에서 1949년 이후 보편적 규범으로 전환되면서 그 새로운 현실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해석이 필요했다. 입장의 차이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존재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毛澤東과 당내 급진파들에 의해 진행된 문예비판을 통해 구체화된 문예규범은 문혁시기에 이르러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경직된 내용으로 완성되었다. 1966년 2월 발표된 <部隊文藝工作座談會紀要>는 완성된 문예규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紀要에서는 비판의 강도를 강화하고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樣板’을 제시함으로써 그 목표를 정확히 제시하였는데, ‘樣板’이란 1964년 이후 당내 급진파에 의해 시도된 경극 혁명과 거기서 만들어진 작품을 말한다. 紀要에서 문예계가 자율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에 문예계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樣板’을 그대로 모방하고 따라야했다. 紀要를 통해서 선포된 문예규범은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根本任務論’으로 사회주의 문예의 근본임무는 工農兵의 영웅적 인물을 빚어내는 것이다. 둘째는 ‘三突出論’으로 각 작품의 모든 인물 가운데 긍정적 인물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긍정적 인물 가운데 영웅적 인물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으며, 영웅적 인물 가운데 주요한 영웅적 인물을 두드러지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三突出’이론의 내용이다. 셋째는 ‘主題先行論’이다. ‘主題先行論’은, 문예를 창작할 경우에는 먼저 주제 사상을 정하고 그런 후에 생활 속에서 인물과 이야기를 선택해서 정해진 주제사상을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확립된 문예규범으로 문혁시기 문예는 정치행위와 창작, 수용 행위의 경계가 없어지고 정치가 직접 미화되었다. 문예 창작은 더 이상 정치와 별개의 독자적인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었고 개별 작가의 창조적인 역할 또한 인정되지 않았다.
문혁 시기 문학 창작은 대부분 그 규범을 따르고자 하였다. 1966년 문혁이 시작된 이후 문예 창작을 담당하던 홍위병들이 1968년 해산되고 이후 2년간은 문예창작의 공백기라 할 수 있다. 1971년 ‘林彪 쿠데타 사건’ 이후 毛澤東이 문예계 위축을 걱정하는 언급 이후 창작 활동이 조심스럽게 재개되고 다양한 형태의 문예작품이 공식적으로 출판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문혁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부터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들을 문혁시기 문예규범에 충실히 따른 것이며 일부 문학성을 인정받는 몇몇 작품조차 그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樣板’의 개념은 처음부터 명확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처음 등장은 1965년 현대경극 〈紅燈記〉를 찬양하는 <解放日報>의 사설에서였다. 이후 1965년 4월, 소설 <紅巖>을 희극으로 각색할 것을 지시한 江靑이 리허설을 본 후 이 작품을 ‘樣板’으로 지정하면서 ‘樣板’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즉 이 때의 ‘樣板’이란, 문혁의 시작을 전후한 문예계 비판으로 대부분의 작가와 작품이 부정되면서 이른바 사회주의 문예의 ‘경전’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 부재하게 되자, 그 자리를 대신할 작품을 지정하면서 그것을 찬양하기 위해 붙인 수식어였다. ‘樣板’의 개념이 보다 명확해지고 또 그에 해당되는 작품이 분명하게 확정된 것은 1967년 <文藝講話> 발표 25주년을 기념해 北京에서 현대혁명경극 <智取威虎山>, <海港>, <紅燈記>, <沙家浜>, <奇襲白虎團>, 발레극 <紅色娘子軍>, <白毛澤東女>, 교향음악 <沙家浜> 등 8편의 ‘樣板’ 작품이 공연되면서부터이다. 이 공연이 열리는 동안 발표된 1967년 5월 31일의 <人民日報> 사설 <革命文藝的優秀樣板>에서는 8편의 ‘樣板戱’를 ‘혁명적 정치 내용과 완벽하게 아름다운 예술 형식의 통일’이라고 찬양하면서, ‘樣板’을 ‘무산계급 혁명문예의 발전을 위해 수립된 전범’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모든 계급이 자신의 ‘樣板’을 만들어 정치에 이용하고 있으므로, 무산계급 역시 자신의 ‘樣板’을 만들어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의 ‘樣板’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樣板’이 가지는 두 가지 의미는 첫째로, ‘본을 뜨기 위한 원판’이라는 사전적인 의미처럼, ‘樣板’은 변형시켜서는 안 되고 그 모양 그대로 복제하는 것만이 허용되는 폐쇄적이고 고정된 틀이라는 것이다. 또한, ‘樣板’이라는 개념이 나타내는 ‘모범적인 문예작품’이라는 의미 이외에, 작품을 통해 제시된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모델’이라는 의미가 함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이제 의무적으로 ‘樣板戱’를 학습하고 거기에 제시된 모델, 즉 ‘樣板’에 스스로를 일치시켜야만 했다. 이렇게 ‘樣板’이 폐쇄적이고 경직된 틀로 확립된 후, 이에 대한 사소한 수정이나 변형도 모두 ‘樣板戱’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비록 ‘樣板戱’ 작품 가운데 대다수는 문혁 이전에 이미 여러 가지 형식으로 존재하던 것을 개작한 것이었다지만, 江靑과 문혁주도세력이 행한 주도적인 역할을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전에는 각 지역의 개별 극단에서 산발적으로 추진하던 경극 현대화 작업을, 중앙에서 직접 추진하면서 당시 문예계의 최고 수준의 인원과 시설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수 있었던 것도 江靑이 개입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江靑은 이미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서도 ‘십년을 연마하여 한 작품을 만든다.’는 정신으로, 계속적인 수정, 보완을 요구해서 ‘樣板’에 걸맞은 완결된 형식과 혁명적 내용을 갖추도록 했다. 이후 각 작품을 영화로 제작하기 위한 최종 완결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江靑은 제작진에게 형식적 측면과 관련된 엄격한 요구를 했고, 그것은 대부분 작품의 질적 수준 향상으로 이어졌다. 또한 江靑은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것은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결합을 계속 시도하게 하여,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서양음악의 장점을 혼합한 새로운 형태의 전통음악 형식을 만들어 낸 것이 그것이다.
대중들은 ‘樣板’을 적극 수용했다. 문혁 시기에 ‘樣板戱’는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수많은 대중들이 반복되는 ‘樣板戱’ 공연을 즐겨 관람했고, 등장인물들의 연기에 몰입했다. 그러므로 문혁 전 시기에 걸쳐서 ‘樣板戱’가 대중들의 정서와 문화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문혁이 종결된 이후 새로운 집권세력에 의해 거꾸로 문혁 시기의 유산들이 경계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樣板戱’ 공연이 여러 차례 대중적 성황을 이루었던 점을 보아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樣板戱’가 자연스럽게 대중들의 호응을 얻은 이유로 볼 수 있는 것은 毛澤東와 문혁주도세력이 구상하는 정치적 유토피아에 관한 상상력을 가장 대중적인 문예형식을 통해서 표현한 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樣板戱’가 전통적인 문예형식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그 장점을 최대한 살린 채 대중들의 취향에 맞게 현대화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혁 시기의 대중들이 ‘樣板戱’를 수용하는 태도는 다른 시기의 관객이나 독자들이 기타 일반적인 문예작품을 대하는 태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대중들은 ‘樣板戱’를 통해 만들어진 모델들을 일종의 우상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모든 ‘樣板戱’ 속의 영웅적인 인물 형상은 궁극적으로 毛澤東를 모델로 한 것이고, 대중들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고자 하는 대상 역시 궁극적으로는 毛澤東였다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은 직접 접촉하거나 볼 수 없었던 毛澤東 대신에 ‘樣板戱’ 속의 모델들을 접하면서 그것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의 이미지와 일치함을 거듭해서 확인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욕망과 행동이 정당함을 확인하고자 했다. ‘樣板戱’가 문혁 시기에 대중들의 의식과 정서를 지배했던 것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혁 시기에는 모든 종류의 출판에 엄격한 통제가 시행되었지만, 특히 문예와 관련된 출판에 대해서는 그것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더욱 극심한 제한이 가해졌다. 작품의 공식적인 출판이 어려워지면서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유통, 보관되는 작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전의 여러 차례 정치운동 과정을 통해서 비판을 받고 공식적인 창작을 자제하고 있던 작가들의 작품이나, 또는 1969년 이후 산간벽지로 上山下鄕된 지식청년들에 의해 주로 창작된 작품들을 흔히 ‘지하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괄되어 지칭한다.
이런 넓은 의미의 정의를 따를 때, 문혁 시기의 지하문학은 크게 네 개의 발전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966년 문혁의 시작부터 1969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대중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문혁의 분위기가 가장 고조되어 있었던 단계였다. 대자보나 자체적으로 발행하는 신문 등을 통해 발표되는 홍위병문예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지하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1969년부터 1971년 ‘9․13사건’까지이다. 문혁을 주도하던 홍위병 대중들이 그 무정부적인 행동양태로 인해 비판을 받고 上山下鄕되면서, 대중운동이 침체되고 군대에 의한 조직적인 질서재편이 이루어진 것이 이 단계였다. 이 시기에는 운동의 일선에서 밀려난 지식청년들에 의해 이른바 ‘지하문학살롱’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가장 특징적인 점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이다. ‘9․13사건’ 이후 문혁주도세력이 위축되면서, 당권파가 문혁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서 일부 성과를 거둔 것이 이 단계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하문학살롱들이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크게 성행했고, 이른바 ‘현대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창작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네 번째 단계는 1974년부터 문혁이 끝나는 1976년까지이다. 문혁을 종결시키려는 당권파와 그것을 저지하고 정세의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문혁주도세력이 맞서서 다시 격화된 이 단계의 대립은 毛澤東의 사망과 함께 문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江靑등 문혁을 주도한 급진파들은 지하문학살롱의 중심인물이나 작가들을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등 지하문학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미 지식청년들 사이에 적지 않은 기반이 다져진 지하문학은 1976년 4월 周恩來에 대한 추모를 명분으로 天安門광장에서 벌어진 청명절 시가운동을 통해서 그 잠재되었던 역량을 드러내게 된다.
주로 북경 등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서클 내에서 이루어졌던 지하문학살롱의 문예활동과 달리 上山下鄕된 지식청년들의 문예활동은 중국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이들은 홍위병운동 퇴조 이후 산간벽지에 하방되어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자신들의 실망감과 정신적인 방황,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로 다듬어지지 않은 형식의 시를 통해서 표현했다. 그것은 시가 이단적인 정서를 드러내고 실험적인 형식을 시험하는데 비교적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이었다. 반혁명분자로 몰려 박해를 받았던 蔡其矯, 胡風 사건으로 수난을 당한 牛漢, 曾卓, 綠原, 우파분자로 박해를 받은 流沙河, 그리고 黃永玉, 郭小川, 穆旦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이들의 작품은 文革 당시에는 발표되지 못하고, 文革이 끝난 뒤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
시의 형식으로 된 작품들이 지하문학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소설 등 기타 형식에서도 주목할 만한 지하문학 작품들이 있었다. 지하문학 소설 가운데 대중들에게 가장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고, 따라서 문혁 주도세력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던 작품으로는 張揚의 <第二次握手>를 들 수 있다. 그밖에 문혁 초기 보수파 홍위병이었던 畢汝協의 작품 <九級浪>과 작자미상의 작품 <逃亡>도 지하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볼 수 있다. 이같이 현실을 진지하게 다룬 작품 이외에, 통속적인 흥미 위주의 소설들도 문혁 시기에 적지 않게 유통되었다. 이런 작품들 역시 공개적으로 출판되어 보급되지 못하고 필사본의 형태로 비밀리에 유통되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지하문학의 범주에 포괄된다고 할 수 있다. 작자미상인 <曼娜回憶錄>과 <少女的心>은 성적인 체험을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 당시 대중들 사이에 상당히 유행했던 소설이었다.
지금까지 문화대혁명의 전개양상과 발전과정, 그 시기의 주류문예와 지하문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당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시기의 중국 내에서 꾸준히 변화해온 정치권의 사상과 대중의 색깔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정권세력이 문예를 이용하여 신 사회주의 사상을 대중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문예는 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아야했고, 그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규범 속에 정형화된 상태로 대중에게 쉽게 주입되었다. 그 대표적 작품인 樣板은 대중이 毛澤東를 우상화하도록 하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었지만, 후에 대중의 자발적인 호응으로 인해 하나의 문학 사조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하문학은 문혁주도세력에 의해 그 존재가 부정되었지만 대중에게는 큰 호응을 받았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위축되어있던 지하문학은 문화대혁명 이후에 다양한 문학경향을 탄생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정치 권력자들이 이용하기 가장 손쉬웠던 것도 대중의 힘이었지만, 결국 문화적 사조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 또한 대중의 힘이었다. 비록 문혁 시기에 대중들이 무지몽매하였다 하더라도, 그 시기에서 중국을 깨우는 역할의 시발점이 된 것 또한 대중이었다. 그래서 이 발표문의 부제 또한 “대중들이여, 깨어나라!”로 정하게 되었다. 가난하고 우매하다 하더라도 한 나라 안에서 대중들의 힘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중들이 일어날 때 그 나라가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1) 문화대혁명(이하 문혁)
2)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25일까지 중국군이 金門島의 臺灣 수비대에 대해 포격을 가한 사건
3) 농업 부문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기 위해 1950년대 초에 실시한 운동. 1950년 6월 〈中華人民共和國 土地改革法〉의 통과를 시작으로 토지사유제에 대한 개혁에 착수한 中國共産黨은, 1953년 2월에 〈關于農業生産互助合作的決議〉를 정식 통과시킴으로써 기존의 토지사유제 형태의 생산구조를 互助組와 合作社(初級社, 高級社)라는 공동생산 형태로 전환시키려 한다. 이 운동은 수공업 부문, 상공업 부문의 사회주의적 개조와 함께 진행되었고, 그 결과로 1956년에 中國共産黨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사회주의적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선언이 발표된다.
4) 1966년 5월 6일에 林彪가 발송한 解放軍 總後勤部 〈關于進一步搞好部隊農副業生産的報告〉에 대해 毛澤東가 5월 7일에 회답한 편지. 일반적으로 ‘5․7指示’라고 불려진다. 1966년 8월 1일 《人民日報》의 사설 〈全國都應該成爲毛澤東澤東思想的大學校〉를 통해 전국에 발표된 이 지시는 전국의 모든 부문이 생산과 혁명을 함께 수행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毛澤東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五七공장, 五七農場, 五七부대, 五七大學, 五七상점, 五七간부학교 등으로 구체화시키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巢峰, 앞의 책, p.28
5) 1971년 9월 13일 林彪는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였고, 이를 ‘9․13사건’이라고 한다. 임표와 그의 동료가 탄 비행기는 중,소 접경지역 상공에서 폭발했다.
김종현, ≪중국당대문학현실주의이론연구≫, (서울성균관대학교대학원 중어중문학과 중국문학전공 박사논문, 1993년 5월)
송승엽, ≪중공의 문예정풍연구≫, (고려대학교대학원 중국어중국문학과 석사논문, 1988년 2월)
김진공, ≪문화대혁명 시기의 문예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중어중문학과 박사논문, 2001년 2월)
洪子誠
저, 박정희 역, ≪중국당대문학사≫, (서울,비봉출판사,2000년)
김시준, ≪중국당대문학사조사연구≫,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2001년)
임춘성 편역, ≪중국근현대문학운동사≫, (서울,한길사,1997년)
김종수, 최건 저, ≪중국당대문학사 : 1949-1984≫, (서울 : 청년사, 1991)
邱嵐 저, 중국어문학연구회 역, ≪중국 당대 문학사(1949-1987) : 질곡의 시대를 헤쳐온 오늘의 중국 문학≫, (서울 : 고려원, 1994)
A. 문화대혁명은 많은 분야에서 국가와 인민에 많은 손실과 좌절을 끼쳤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크게 경제, 교육, 대외정책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영향이 있었다. 1966년 경제는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서 계획대로 여전히 대폭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으므로 국가가 계획한 대로 완성되었거나 또는 초과 달성되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 9일 중공중앙은 <혁명으로 생산을 촉진하는 것에 관한 10조 규정>을 하달하여 노동은 8시간으로 제한하고, 나머지 시간은 혁명에 매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생산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경제는 급전직하로 나빠져 전면적인 경제파탄을 가져오게 되었다. 1968년 周恩來의 국민경제계획으로 경제가 다소 회복되었으나, 문화대혁명 마지막 단계의 국민경제는 다시 파괴된다.
중국의 교육은 정권 수립직후부터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는데 이용하기 위한 정치적인 논의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변동이 있을 때마다 정책이 바뀌었다. 건국초기에는 소련의 교육제도를 모방하였고, 이후 첫 번째 변동은 문화대혁명 이전까지의 군중운동을 통한 무조건적인 목표 지향적 정책이었고, 두번째는 문화대혁명시기의 교육대혁명으로 교육 단절기로 볼 수 있는 혼란의 시기였다. 세번째는 문화대혁명이후의 개혁개방시기로 중국 현대교육의 재활기 및 부흥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국의 대외문화교류는 호혜평등의 원칙, 상호존중의 원칙에서 진행되도록 자신들의 의지대로 상대방에게 강요치 않는 기조 위에 국내외 정세변화와 중국의 정세변화와 중국의 외교정책과 국내 문화예술정책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왔다. 그러나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신중국건국이후 쌓아온 대외문화교류 성과를 전면 부정하고 세계 각국과의 문화교류를 계급투쟁으로 몰아부치면서 구 소련과 서방국가들의 문화를 수정주의, 자본주의의 반동적이고 썩은 문화라고 모두 배척했다. 이러한 문화대혁명시기의 대외문화교류의 부재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1079년 12월에 개최된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 5차 대회에서 통과한 중국헌법에서는 세계 각국과의 외교관계와 경제, 문화교류 발전을 통한 세계평화수호와 인류발전을 위하여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과학기술이 뒤떨어지고, 과거 유산과 유적이 파괴되고, 전통 도덕의 가치하락, 제 3세계에 확립했던 중국의 영향력과 이미지 하락이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이후로 혁명적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과 세계를 직시하게 되었고, 중국 인민 대중의 가야할 방향감각을 찾게 되어 1980년대, 1990년대 국가와 사회의 정상화 및 힘찬 현대화 과정을 가능케 하였다.
A. 4인방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王洪文,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張春橋, 정치국 위원인 江靑, 姚文元의 4명의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毛澤東澤東의 아내 江靑을 중심으로 한 '문혁파'이다. 그들은 사회생산력 발전의 측면을 무시하고 생산을 파괴하며, 문예를 이용한 사상고취를 목표로 양판희를 창작하는데도 한 몫하였다. 1974년 특히 周恩來를 비판하였다. 1976년 周恩來가 죽자, 4인방은 奪權을 음모하였다. 그리고 4월 전국에서 천안문 사건으로 대표되는 周恩來의 추도화 사인방 반대의 혁명운동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1976년 9월毛澤東澤東이 죽은 후 중국공산당 내부 지도층 간에 격렬한 권력투쟁이 벌어지자,. 전면적으로 毛澤東澤東의 권력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江靑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王洪文을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으로, 張春橋를 국무원 총리로 임명하려고 준비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10월 중공중앙에 의해 격리 심사되어 숙청당했다.
A. 소설 가운데 文革의 문예규범을 가장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은 작품은 上海縣‘虹南作戰史’寫作組가 지은 장편 《虹南作戰史》와 南哨의 장편 《牛田洋》이다. 두 작품 모두 文革주도세력의 지시에 따라 창작된 것으로, 창작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한 1972년 2월에 처음 출판되어 이후 다른 소설 작품의 창작에 기준이 되었다. 《虹南作戰史》는 50년대 ‘農業合作化 운동’4) 중에 벌어진 ‘두 갈래 노선 사이의 투쟁(兩條路線鬪爭)’을 주된 내용으로 다룬 작품이다. 빈농 출신의 간부 洪雷生과 그를 지지하는 安克明, 丁四海 등 鄕, 區 간부로 대표되는 올바른 노선과, 鄕 지부 서기 浦春華와 그 배후인물인 副區長, 부유한 중농, 도망친 지주 등으로 대표되는 잘못된 노선 사이의 양극화된 대립이 이 작품의 기본 구도이다. 이는 劉少奇로 대표되는 당권파와 文革주도세력 사이의 대립구도를 도식적으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 洪雷生이 천재지변과 人灾를 겪으면서 ‘우경 기회주의에 반대하는 노선투쟁’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고 사상의 질적인 비약을 하게 된다는 단순한 줄거리의 이 작품은, 《人民日報》, 《文匯報》, 《光明日報》등을 통해 ‘농촌 사회주의 혁명의 장엄한 한 장면’, ‘농촌 노선 교육의 좋은 재료’라는 칭송을 받았고 백만 권이 넘게 출판되었다. 본래는 2부작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走資派와의 투쟁’을 다룰 예정이었던 2부는 文革이 종결됨으로써 출판되지 못했다. 《牛田洋》은 60년대 초에 人民解放軍이 南海에서 바다를 막아 경작지를 만든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인 解放軍 모 부대 정치위원 趙志海와 그의 지휘를 받는 부대원들은 계급투쟁의 정신과 毛澤東의 〈矛盾論〉, 〈實踐論〉을 무기로 삼아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40여 km의 제방을 만들어 경작지를 간척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장비와 자금의 절대적인 부족을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미국과 장개석의 간첩이 침투하는 것을 물리치며, 내부에 숨어있던 계급의 적까지 색출해낸다. 이 작품은 계급투쟁, 생산투쟁, 과학실험의 ‘三大革命運動’ 중에 새로운 인간형을 배출해낸다는 당시의 정책 모델을 도식적으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人民解放軍은 마땅히 대학교가 되어야 한다. 이 대학교에서 政治, 軍事, 文化를 학습하고 農副業 생산에도 종사해야 한다’고 한 毛澤東의 〈5․7指示〉5)를 충실하게 구현한 작품으로도 평가되었다. 물론 文革 이후의 當代文學史에서는 이 작품들을 모두 陰謀文藝의 대표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 1973년에 출판된 郭先紅의 장편 《征途》와 1976년에 출판된 盧群의 장편 《我們這一代》, 胡尹强의 《前夕》 등도 文革의 문예규범에 충실하게 따른 작품으로 인정받은 것들이다. 단편으로는 1973년 5월부터 1976년 9월 사이에 中共 上海市委寫作組에 의해 발간된 문예잡지 《朝霞》 월간에 수록된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에도 당시에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은 작품들은 1975년에 《朝霞叢書》라는 이름의 단행본으로 묶여서 출판되었다. 〈初春的早晨〉(淸明), 〈金鐘長鳴〉(立夏), 〈第一課〉(谷雨), 〈初試鋒芒〉(夏興), 〈紅衛兵戰旗〉(姚眞) 등이 그 안에 수록된 단편들이다. 話劇, 전통극, 영화 등 공연예술은 그 형식적인 특성으로 인해 文革주도세력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했고, 따라서 文革 당시에 주도적으로 정치적 선전 기능을 담당했다. 영화 《反擊》, 《春苗》, 《歡騰的小凉河》와 話劇 《盛大的節日》, 《戰船臺》, 《風華正茂》, 《宣戰》 등은 흔히 四人幇의 주도 하에 제작된 작품으로 설명되는데, 그만큼 文革의 이념을 충실히 구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A. 樣板戱 8대 작품 중 대부분은 하나의 영웅을 내세워 공산주의의 집체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현대경극중 강청을 위시한 문혁주도세력의 상당한 지원을 받은 작품인 <智取威虎山>을 살펴보자. 이 작품의 배경은 수정작업을 통해 1946년 겨울의 東北지역으로 설정되었다. 共産黨 人民解放軍의 거듭되는 승리로 발붙일 곳을 잃게 된 國民黨 軍 잔존세력 座山雕는 비적이 되어 험준한 威虎山 속으로 숨는다. 사냥꾼 常獵戶와 그 딸 常寶의 도움으로 토비들의 종적을 찾아낸 解放軍 정찰부대 대장 楊子榮은, 비적 두목 座山雕가 손에 넣기를 갈망하던 비적들의 비밀연락지도를 가지고 비적으로 위장하여 威虎山에 잠입한다. 楊子榮은 기지를 발휘하여 座山雕와 비적들이 의심을 풀고 자신을 신뢰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解放軍에 체포되었다가 도주하여 자신을 알아본 비적 欒平을 거꾸로 몰아붙여서 제거하여 위기를 극복하기도 한다. 결국 解放軍 부대원들은 楊子榮이 보낸 정보를 바탕으로 座山雕의 생일잔치를 틈타 威虎山의 비적 근거지를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전체 10장으로 된 이 작품은 줄거리 자체가 毛澤東가 강조했던 무장투쟁 노선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또한 주인공인 楊子榮이 다른 등장인물들, 특히 긍정적인 인물들과도 확연하게 구별되는 완벽하고 독점적인 영웅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江靑등 文革주도세력의 樣板戱 제작 의도에 가장 충실하게 부응한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樣板戱 작품에서 형상화된 영웅은 우상으로서 대중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대중들이 樣板戱 작품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웅들의 모습을 동경하며,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게 함으로써, 문혁주도세력들은 새로운 사회주의의 상을 제시하려고 했다. 현실에서의 毛澤東의 모습이 아닌 대중들에게 이상화된 毛澤東의 허구적 이미지로 정치세력의 당위성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이다.
A. 국민당을 몰아내고 전국을 장악한 중공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 일종의 계급정책을 도입한다. 즉 국민들을 출신성분에 따라 분류해서 차별적인 대우를 하는 것이다. 혁명군인, 혁명간부, 혁명열사의 가족 출신은 이른바 ‘홍오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중공이 정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근거로 삼는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정치적인 신분 면에서 특혜를 누리며 중앙과 지방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고, 당의 충실한 지원세력이 되었다. 반면에 지주, 부농, 반동, 불순분자, 우파의 가족 출신은 이른바 ‘흑오류’로 분류되어 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비판운동이나 정치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이들은 주요한 공격대상이 되었다.
문혁 초기 교육계와 문예계, 학술계 등 구 지식인들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고 이후 당권파를 실각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른바 ‘홍위병’은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등장시기, 구성원의 출신성분, 당 조직과 당권파에 대한 태도 등에 따라 크게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뉜다. 보수파는 이른바 ‘홍오류’ 출신으로 문혁 초기에 등장하여 구 지식인들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으며, 당 조직과 당권파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던 청년 학생 집단을 일컫는다. 조반파는 보수파에 비해 좋지 못한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으며, 보수파에 맞서서 당 조직과 당권파에 대한 공격을 주도한 집단을 가리킨다. 문혁 시기 무장투쟁을 벌인 것이 주로 이들이었다.
A. 지하문학은 문력 주도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비판과 탄압을 받았다. 산간벽지로 축출된 작가들은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자신들의 실망감과 정신적인 방황,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로 시를 통해 표현했다. 문혁 주도세력들은 필사본으로 유통된 이들의 작품들을 대중들이 읽는다는 것은, 권력의 공식적인 입장을 벗어나는 집단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라며 탄압을 가했다.
A. 문혁 시기에는 모든 종류의 출판에 엄격한 통제가 시행되었고, 특히 문예와 관련된 출판에 대해서는 그것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더욱 극심한 제한이 가해졌다. 거의 모든 작품의 출판이 실질적으로 금지되었고, 문예 잡지 또한 출판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문학파라고 이름 붙는 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A. 문혁 시기에 문예 영역 전체를 배타적으로 지배한 듯 보이는 주류문예의 규범 밑으로, 그것에 대항하고 실질적으로 그것을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지하문학은 폭넓게 존재했다. 대중들 또한 毛澤東으로 상징되는 주류문예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毛澤東으로 상징되는 그 중심점에 스스로가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도 있었다. 대중들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중심점에 서서 문예를 접했던 것이다.
A. 문혁 시기의 홍위병들이 그 주체가 변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홍위병의 보수파와 조반파가 毛澤東에 의해 그 세력다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문학 발전 단계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시기의 주요한 지하문학 경향인 홍위병문예는 기존의 모든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면서 毛澤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질서의 등장을 예찬하는 문혁 고조기 홍위병들의 정서가 잘 드러난 것이었다. 각 학교의 홍위병조직에 의해 연출된 화극이나 무극, 그리고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발표된 시가나 산문 등이 주된 형식을 이룬 홍위병문예는 홍위병 대중운동의 확산에 힘입어, 지하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공개적으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1969년에 들어서 각 지역의 대중조직이 해산되고 지식청년의 上山下鄕으로 홍위병운동이 종결을 고하면서 1966년부터 1968년 사이에 전개되었던 이러한 홍위병 문예 활동은 실질적으로 부정되었다. 그리고 운동의 일선에서 밀려난 홍위병 출신 청년들은 달라진 조건에 따른 자신들의 감성의 변화를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지하문학살롱’은 이들의 조건과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모임이었다. 문혁 시기의 지하문학살롱은 대부분 이처럼 홍위병들, 특히 문혁 초기에 운동을 주도했던 보수파 홍위병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이들이 일찌감치 운동의 일선에서 밀려나면서 그로 인해 가지게 된 불만을 해소할 공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고, 또한 여러 가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상의 조건으로 인해 당시에 금지되어 있던 국내외 문학작품들을 비교적 손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각 도서관이나 구 지식인들의 집에서 탈취해온 책들을 돌려보면서 문학적 감성을 키웠고, 그것을 지하문학살롱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서로 교환했다.
A. 사실상 樣板戱는 毛澤東이 문예영역에 대해서 새로운 사회주의의 상을 대중들에게 전파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문예적으로 특정한 의미를 가지기는 힘든 작품들이 많다. 대부분 영웅주의적 주제를 가지고 변용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8가지의 작품 중 교향악 <沙家浜>만은 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창조라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 서양의 관현악 반주와 중국의 경극의 한 대목이 접목된 작품이기에 그러하다. 이하 다른 작품은 형식면에서도 기존의 것을 차용하고 있기에, 새롭게 문예적으로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