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해상 항로를 선점한 네덜란드는 동남아와 인도양을 무대로 세계 최대 해상무역국으로 부상하며 황금기를 구가했다.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유럽 금융의 심장으로 떠올랐고, 네덜란드는 바다를 통해 최초의 ‘경제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19세기에는 영국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증기선의 보급은 해상운송의 ‘속도 혁명’을 일으켰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 런던과 봄베이 간 운송 시간이 40% 이상 단축됐다. 이는 영국의 식민지 네트워크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고, 해상로를 확보하면서 세계를 향한 영국의 지배력이 본격화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가장 극적인 항로 혁신은 미국이 주도했다. 1914년 파나마 운하 개통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이 연결됐고, 미국은 두 개 대양을 아우르는 해양강국으로 도약했다. 이후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글로벌 물류를 지배했고, 막강한 제조산업 능력을 바탕으로 21세기 세계 최강 국가로 올라섰다.
아시아에서 해상 항로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대표 국가는 일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해군력 증강 계획에 따라 군함과 상선을 병행 육성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는 단순한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해상 물류와 보급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항로 운용 전략의 성과였다. 이 승리는 항만 및 항로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고, 훗날 태평양전쟁을 뒷받침하는 조선산업의 폭발적인 육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일본은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화와 산업경제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해운 조선 항만 삼각축이 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수출 입국 기조 아래 부산 울산 포항 등 동남 해안 항만을 정비하고 중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이 전략은 1990년대에 접어들며 조선산업 1위, 컨테이너 항만 3위, 해운 톤수 5위권이라는 세계적 위상과 함께 산업대국으로의 진입을 이끌었다. 항로와 항만은 산업과 경제 구조의 대동맥이었고,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관문이었다.
이제 우리 앞에 또 다른 기회가 새로운 항로의 모습으로 열리고 있다. 북극항로다. 러시아 북부 연안을 따라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이 항로는 기존 수에즈 운하 경로보다 최대 40% 거리 단축, 15일 이상 시간 절약이 가능하다. 이 항로가 ‘제3의 항로’로 불리는 것은 단순한 효율성 때문만이 아니다. 기존 해운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전략적 의미가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 항로에 ‘빙상 실크로드’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자국의 조선 기술과 해운기업 집단을 결합해 유럽으로 가는 직항로를 확보하려는 국가적 구상을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은 물론 세계 각국과 치열한 산업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앞에, 북극항로에 대한 전략적 접근의 시급성이 떠올랐다. 북극항로는 단순한 해상 운송로를 넘어 기후외교, 에너지 전환, 극지 과학, 국제표준, 안보 및 우주전략까지 연결되는 국가 전략의 최전선이다. 경제 논리상의 해상운송 루트로만 북극항로를 다루는 시각에서 벗어나 다자간 해양 협약의 협상 무대이자, 자원 개발의 실증 현장, 기후 데이터를 축적하는 전초기지, 나아가 친환경 선박기술을 시험할 실험실로 인식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조선·해운·물류·IT·극지과학·친환경에너지 기술을 모두, 그것도 최정상의 수준으로 보유한 나라다. 이 모든 역량을 유기적으로 연계해야 ‘대한민국형 북극항로 전략’이 탄생한다.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부산은 물류·지리학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이며 해상 항로의 출발점이다. 북극항로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 종착지를 넘어 북극으로 향하는 전략적 출항지이기도 하다. 환태평양-북극-유럽을 잇는 초국가 해운물류망의 연결축(키스톤)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세계 2위 환적항이자, 글로벌 해운 3대 얼라이언스가 모두 기항하는 동북아 핵심 물류 허브.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산업 벨트를 갖추고 있으며, 친환경선박 기술개발의 중심지로도 주목받고 있는 도시. 부산이 북극항로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에겐 조선·해운·항만을 통해 산업화 성공의 역사를 만들어낸 경험이 있다, 이제는 북극항로를 발판으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이제 묻는다. 북극항로를 우리는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몇 남지 않은 세계적 청정지역 북극에 등장할 친환경 첨단 선박. 처칠에 의해 전장에 투입되어 1차세계대전 승리 기폭제 역할을 하고 그 결과 석탄시대의 종말을 이끌어냈던 내연기관 군함의 등장 장면과 기시감이 든다.
새로운 항로는 새로운 방향이다. 그 방향 위에 우리의 기술 도시 산업 외교 미래를 실어 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야흐로, 다시 출항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