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명의 오션드림] 사람이 머무는 도시
정부가 추진 중인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이 연일 화제다. 지역 거점국립대를 전략산업과 연계해 지역 성장 핵심축으로 키우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재정을 투입한다고 해서 서울대급 경쟁력이 확보될 것이라는 기대는 과한 낙관이다. 젊은 인구와 사회 문화 경제 인프라가 모두 수도권, 특히 서울에 집중된 현실에서 대학 하나만 바꾼다고 지역이 살아나기는 어렵다. 산업 연구 교육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삼위일체’ 구조를 구축하지 못하면, 지역의 우수 인재는 다시 수도권으로 빠져나가고 지역은 또다시 쇠퇴의 길을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시점 동남권 전략산업 분야는 단연코 ‘조선·해양 산업’이다. 국내 해운·항만 기업의 69%, 이 분야 종사자의 절반, 그리고 매출액의 70% 이상이 동남권에 집중되어 있다. 울산과 거제에는 세계적인 조선소들이 밀집해 있고, 부산항은 북극항로 개척의 전초기지로 거론된다. 그만큼 산업의 무게 추는 동남권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산업의 ‘몸통’이 지역에 있어도, 정책·법률·금융 등 산업을 움직이는 ‘두뇌’는 여전히 수도권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구조를 두고 흔히 ‘몸은 부산에 머리는 서울에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현 상황은 다분히 기형적이다. 이러한 구조가 지속되는 한, 산업과 교육의 시너지는 기대하기 어려울뿐더러 산업 성장 속도 역시 더딜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해양수산부와 산하 공공기관을 부산으로 이전하고, 해운·물류 대기업과 선박금융·보험기관은 물론 해사 전문법원 설치까지 검토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시도다. 이는 단순한 기관 이전을 넘어 조선·해양·해운 산업의 전 생태계를 하나의 지리적 공간에 집적시켜 경쟁력을 극대화하겠다는 구상이다. 나아가 북극항로 시대를 대비해 부산·울산·경남을 하나의 ‘해양 수도권’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물적 인프라의 집중만으로 산업 성장을 담보할 수는 없다. 산업의 핵심에는 결국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 인재를 양성할 교육과 연구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기관과 기업이 몰려와도 도시의 성장 동력은 지속되기 어렵다.
현재 조선·해양 산업은 거대한 전환점에 놓여 있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배출 규제로 전 세계 선박 시장이 LNG 암모니아 수소 등 친환경 선박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유럽 일본 노르웨이 등은 이미 수소 추진 선박 실증을 국가전략으로 채택해 항만과 에너지 인프라를 동시에 개편하고 있다. 이 거대한 전환의 한가운데에 대한민국 동남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울산의 수소 모빌리티 특구, 부산의 수소 항만 실증, 거제의 조선 기술 인프라가 유기적으로 연계된다면 동남권은 21세기 해양·에너지 산업의 글로벌 중심지로 부상할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세계적인 해양 도시들은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대학 일체형 국책 연구소 운영을 통한 산업·연구·인재 양성의 지역 내 선순환 구조를 갖추고 있다. 노르웨이의 SINTEF(노르웨이과학기술대와 연계된 연구재단), 네덜란드의 MARIN(해양 연구소), 일본의 JAMSTEC(국립해양기술연구소) 등은 모두 지역 대학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 운영되는 ‘대학 기반’ 국책 연구기관들이다. 이러한 모델이 강력한 이유는 대학의 학문적 전문성과 국가 차원의 기술검증·표준화 기능이 한 지붕 아래에서 통합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산이 해양수도로 거듭나기 위한 근간이 해양 관련 기관을 지역으로 옮기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 한층 명확해진다. 산업을 이해하고 신기술을 개발하며 에너지 체계를 설계하고 국제 규범을 해석해 대응할 종합적 지식 체계를 갖춘, 대학 기반 국책 연구기관이 반드시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 기반이 구축되어야만 산업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인재들도 떠나지 않는다.
동남권에는 이미 산업과 항만, 세계적 수준의 조선소까지 갖추었고 그 중심 도시 부산은 ‘해양수도’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미래를 설계할 인재, 그 인재를 키워낼 지식의 터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고 인재들이 활동할 영역을 제공하는 대학 기반 국책 연구소까지 동남권에 갖춰진다면, 수도권에 버금가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축이 바다에서 시작될 수 있다.
수도가 되면 인재가 모일까? 인재가 모여야 수도가 될까? 이 질문은 어느 도시나 빠지기 쉬운 순환 논리의 함정이다. 마치 꼬리를 좇아 제자리에서 맴도는 강아지처럼, 누가 먼저 움직일지를 두고 논쟁만 거듭될 뿐이다. 하지만, 도시의 미래는 망설이는 사이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결단을 내려 먼저 길을 열어야 한다. ‘용인불재(用人不在)’, 인재가 없으면 모든 계획이 공허하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인재가 머무를 수 있는 조건부터 우선 마련하자. ‘해납백천(海納百川)’, 바다가 모든 강을 품듯 인재와 기술을 아우르며 받아들이는 도시를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