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ctId=bbs,fnctNo=2332 RSS 2.0 49 건 게시물 검색 제목 작성자 공통(상단고정) 공지 게시글 게시글 리스트 『유엔평화특구 지정 의미』 장세용(한국민족문화硏 HK부교수)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220 첨부파일 1 # 유엔평화특구 지정 의미- 평화의 좁은 틀 벗어나 용병출신 젊은이들 희생- 이념전쟁의 폭력 재사유최근 유엔기념공원은 도시경쟁력 강화를 위해 역사상의 부정적 문화유산에도 관심을 두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일환으로 문화재로 발굴되었다. 유엔기념공원의 공원화 사업은 묘지 주변까지도 공원화하는 사업을 촉진했다. 유엔조각공원, 부산시수목전시원, 유엔평화공원이 인접한 부지에 조성되었고, 2010년에는 이 지역 일대를 '유엔평화특구'로 지정하며 '평화산업'에 동원하고 있다.이처럼 '묘지의 공원화'를 넘어서 특구화한 배경에는 6·25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와 지역사회의 급속한 인식 변화와 연관이 있다. 그러나 특구 지정이 표방하는 평화가 여전히 낡은 이념적 틀에 매몰돼 유엔군이 참전하여 '승리한' 전쟁이 가져온 평화라고 한정한다면 유엔기념공원의 미래는 남북문제의 진전과 아시아 평화에 기여하는 바가 극히 축소될 것이다. 유엔기념공원의 가치는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이념으로 한정하지 않고 부산이라는 도시공간에서 정치, 사회 및 문화적 전망의 생성과 연동되어 결정될 것이므로 그것이 차지하는 위상학적 지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우리는 다수는 용병출신으로 추정되는, 이곳에 묻힌 젊은이들이 타국에서 벌어진 현대 이념전쟁이 자행한 부조리한 폭력의 희생자라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 공간의 의미를 확장하여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연결하고 현대 한국사회가 이념, 국가 및 산업화의 이름으로 희생시킨 이들을 애도하는 장소와 연결해 인간의 권리와 존엄을 재사유하는 민주주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부활! 한일 신 실크로드 <15> 통신사의 길, 서울에서 부산까지』 양흥숙(한국민족문화硏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039 첨부파일 1 부활! 한일 신 실크로드 15 통신사의 길, 서울에서 부산까지 사행단이 지나가는 고을 접대 소홀 땐 실무맡은 이방 곤장 치기도 ■지나가는 고을도 할 일 다 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통신사가 부산에 도착하기까지는 대개 20일에서 30일이 걸렸다. 통신사가 일본 내에서 이동할 때에는 숙소에서 일본인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문화를 알리는 일이 많았다. 반면 국내에서 이동할 때 통신사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이들이 편안하게 길을 떠날 수 있도록 음식과 말, 숙소 등을 제공하는 데 힘을 썼다. 무엇보다 사행길 주변 지역의 사또들이 지응관(사행들의 의식주 등 각종 물품을 챙겨주기 위한 관리)으로 임명되어 통신사들을 위로하느라 노고가 컸다. 무사히 돌아올 지도 확실하지 않은 먼 길을 떠나는 데다, 무엇보다 국왕의 국서를 가지고 가는 막중한 외교사절단에게 누구라도 극진한 문안 인사에 융숭한 대접을 해야 했다. 게다가 통신사 행렬의 최고 수장인 정사(正使)는 정3품 당상관 반열의 관리였다. 행렬이 지나던 고을 사또는 경상도 관찰사(경상감사)와 몇몇을 제외하고는 관직이나 품계가 대부분 정사보다 낮았다. 그러니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간 큰일 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통신사가 쓴 사행록에도 '접대가 소홀했다', '음식을 내어오는 범절이 형편없었다', '사행을 우습게 본다'는 식의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소홀한 접대에는 꽤 섭섭했던 듯하다. 고을 사또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자리를 비웠다면 그 지역의 접대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고을의 실무관리인 이방을 위시한 이들이 곤장을 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어떤 고을의 사또는 사신단이 지나갈 때 잔치를 베풀지 못하는 대신 노자나 하라고 은을 주었다가 무안만 당한 일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사신단이 지나가는 고을에 너무 많은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사신단의 수도 줄이고, 각종 절차를 간소하게 하고, 음식물의 양도 줄이려고 하였다. 1763년 사행길에 올랐던 조엄도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였으나 이러한 노력이 물거품 될 때도 있었다. 문경 유곡으로 향할 때 큰 강을 지나야 하는데 해당 고을에서 말이나 보조 인력을 제대로 지원해 주지 않아 사신단이 물살에 휩쓸려 위험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고을에서 최소한의 준비도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결국 조엄은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해당 고을의 좌수와 아전을 잡아다가 벌을 주고, 고을 사또의 처벌은 잠시 보류해 두었다. 그는 3년 전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기 때문에 낯익은 고을에서의 불편한 대우에 화가 나도 단단히 났음직하다. ■잠시 여유를 찾는 고을, 영천 사신단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빠르게 이동하다가도, 조령을 넘어 경상도 땅에 들어서면 잠시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안동을 지나 영천에 도착하면 그동안 받지 못했던 큰 연회도 있고, 풍악도 즐기는 등 그날만큼은 마음껏 취할 수도 있었다. 경상도의 수장인 경상도 관찰사가 사신단을 작별하고, 위로하기 위해 크게 벌이는 전별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별연 술상은 영천 조양각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조양각 앞 남천 강가에서는 마상재 공연도 이어졌다. '영남의 큰 행사'라고 불린 이 날의 행사를 보기 위해 인근 고을 사또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까지 구경꾼이 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마상재는 말 등에 바로 서기, 두 말을 함께 타기, 말 위에 물구나무서기 등 여러 장면을 연출하는 고난도의 무예기술이었다. 일본에서는 인기가 높아 통신사가 올 때 꼭 데려오라는 요구를 했었다. 이러한 무예기술은 정작 조선 백성도 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영천에서 마상재 공연이 있는 날에는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에서는 지역 유생과 사신단 사이에 교유도 있곤 했다. 1624년, 1636년 사신단이 영천에 도착하자 이곳 선비들이 사신단을 찾았다. 사신단을 찾는 이는 사신단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러 오는 지방 사또나 아전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들 외 친인척, 친구 그리고 그 지역 유생, 선비들도 있었다. 이는 통신사들이 '한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재'로 구성된 엘리트였기 때문에 지역 선비들도 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가 시를 요청하거나 각종 글을 부탁하고 교류하는 모습이 종종 있었다. 1636년 김세렴이 영천에 도착하였을 때 영천 선비 수십 명이 그를 찾아와 1609년에 사망한 조호익(曺好益) 선생의 비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세렴은 1616년 문과 장원급제 출신이었다. 조호익은 평생을 학자로 살았고, 때론 지방관으로, 때론 의병장으로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특히 영천의 서원에 이미 배향된 인물로, 영천의 선비들은 조호익의 비석에 새길 명문장을 김세렴에게 요청한 것이다. 김세렴은 사양하지 않고 사행이 끝난 후에 비문을 짓겠다고 약속하였다. ■동래, 다시 의장을 갖추고… 사신단이 서울에서 동래까지 오던 길은 파견될 때마다 똑같지는 않았다. 영천-경주-울산을 거칠 때가 많은데, 사신 중에는 고향에 들르기도 해서 행렬과 따로 움직여서 동래에 도착하는 일도 많았다. 1719년 통신사 사행록인 '해유록'을 쓴 신유한은 고향이 고령이다 보니 문경 유곡에서 행렬과 헤어져 고향 집에 들렀다. 그리고 집에 머물면서 행장을 꾸려서 현풍-창녕-밀양-양산을 거쳐 동래에 도착하였다. 창녕-밀양을 지나오는 내내 그의 인척과 친구들이 그를 배웅하였다. 사신 구성원 대부분은 행렬을 이탈하지 않고 동래까지 함께했다. 사신단이 영천-경주를 지나 울산에 도착하면 동래가 눈앞이었다. 이제 하루 반나절 정도면 동래에 도착하기 때문에 동래에서도 이들 사신단을 맞이하느라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아전과 군인들을 보내 동래까지 호위하러 나섰다. 또한 동래 고을 사또는 동래 경계까지 나와 사신단을 맞이하였다. 흩어졌던 사신단이 모두 정렬하는 곳이 동래였기 때문에 동래 남문을 들어서는 사신단은 여느 지역보다 관복을 정갈하게 하고, 의장대를 갖추어서 국서를 봉안하면서 동래로 들어섰다. 1763년 통신사 조엄은 몇 해 전에 동래부사를 한 적이 있어 조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전과 군인, 일반 백성, 심지어 승려까지 동래 경계에까지 나아가 그를 맞이하였다. 동래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할 때는 의장에 더욱 힘을 썼다. 부산 가까이에는 왜관이 있어 조선 국왕사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부산은 오늘날 자성대 공원 주변의 부산진성으로, 부산진성 서문 밖 영가대 아래 항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사신단은 여독도 멀리한 채 바삐 걸음을 옮겼다. 부산은 통신사가 출발한 곳이고, 출발과 관련 있는 영가대, 해신제 등으로 다른 지역보다 통신사에게 중요한 장소이다. 더욱이 부산이 통신사에게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곳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도착하는 첫 조선 땅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를 떠나 멀리 부산의 산들이 보였을 때에는 얼마나 기뻤을까? 사신단의 배가 보이면 우리나라 배들이 나아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신단을 영접하면서 영가대 아래로 들어왔다. 사신단은 마지막 힘을 다해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면서 항구로 들어왔다. 부산진첨사와 그 휘하의 만호들까지 배를 타고 나와 맞이하고 어촌의 백성들은 모두 횃불을 들고 나와 어두운 바다를 환하게 밝혔다.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4) 선데이서울과 유신시대의 대중』 김성환(인문학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979 첨부파일 1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4) 선데이서울과 유신시대의 대중 ㆍ독재권력 시대 억압의 탈출구, 대중의 ‘날욕망’■ 주간지 전성시대‘선데이서울’은 지금까지 선정적 대중잡지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 덕에 ‘선데이서울’이 전거가 되기라도 하면 어떤 말씀이든지 단박에 품위가 떨어진다. 주간지 자체가 저급한 잡지로 몰린 데에는 ‘선데이서울’의 공이 크다. 선정, 음란, 외설을 지나 쇼킹과 엽기까지, 대중의 온갖 하위문화적 코드들이 ‘선데이서울’이란 다섯 글자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선데이서울’이 대중잡지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독자의 열망이 이 한 권의 주간지 속에 모두 담겨 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한 분야의 대명사가 되었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선데이서울’이 한국 주간지의 시초는 아니지만 한국 주간지를 대표하는 것은 분명하다. 1968년 7월 주간지를 발행하지 않기로 한 협약이 해소되자 각 신문사들은 앞다퉈 주간지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주간중앙’을 필두로 ‘선데이서울’ ‘주간경향’ ‘주간여성’ 등이 몇 달 동안 쏟아져 나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선데이서울’이 단연 최고 수준에 올랐다. 대중 주간지는 처음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대중오락 잡지를 표방한 주간지는 곧장 음란, 외설 논란에 시달렸다. 대학생들은 주간지를 불태우면서 불매운동을 펼쳤고, 국가의 검열제도는 실질적으로 위협을 가했다. 1969년 월간지 ‘아리랑’과 ‘인기’가 검찰에 기소되는 상황에서 주간지의 선정성은 1970년대 내내 검열의 최대치를 시험해왔다. 그러나 곡절 속에서도 주간지는 1970년대 대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로 이 시기를 가로질렀다. 여기에는 도시와 농촌의 근로청년뿐만 아니라 대학생도 포함됐다. 그야말로 1970년대는 주간지의 전성시대였다. 잡지란 읽을거리가 가득 쌓여 있는 텍스트의 보고다. 잡지는 신문에 비해 양과 깊이에서 훨씬 요긴한 읽을거리를 품고 있다. 월간지나 계간지의 수준 높은 정보는 지식인의 요구에 부응한 결과다. 1960년대 말 이후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이 한국의 비평계의 새 흐름을 주도했다. 1980년대 무크지가 시대의 억압을 견딘 것도 마찬가지다. 잡지는 글을 싣는 매체이면서 담론이 모여드는 사상의 저수지 역할을 한다. 그런데 1970년대에 태동한 주간지는 어떠했을까. ‘선데이서울’을 위시한 대중주간지는 고담준론은커녕 한번 읽고 버려도 무방한 기사, 사상의 아카이브가 될 수 없는 통속적 글로만 채워져 있다. 그래서 주간지에는 대중의 다양한 욕망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대중은 주간지가 그려내는 값싼 판타지를 소비하며 일상속에서 허름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동질감에 안도한다. 주간지는 ‘선데이’의 가벼운 유흥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것이 대중문화에서는 핵심적인 사건이 된다. 주간지보다 대중의 정체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가 있을까. 이미 화보가 다 뜯겨나간 ‘선데이서울’을 사료로서 넘겨보는 이유는 그 속에서 1970년대를 살아온 대중의 정체와 욕망을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대중적 욕망과 성경제성장이 가시화되자 바야흐로 한국에도 대중사회가 도래했음을 곳곳에서 선포한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대중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대중인가. ‘선데이서울’을 통해 본 1970년대 대중의 한 국면은 성(sex)이다. 전후에서 1960년대까지를 아울렀던 ‘명랑’ 이데올로기는 ‘성’이라는 자극적 대상에 의해 소멸된다. ‘3S정책’은 5공화국의 전유물 같지만, 실은 1970년대 ‘선데이서울’에서도 충실히 활용됐다. 스포츠, 영화 그리고 성을 빼놓고는 잡지를 말하기 어렵다. 화보 여배우의 도발적인 육체는 검열관과 대중 모두를 시험에 빠지게 했다. 배우나 탤런트, 가수, 그리고 스포츠스타의 자잘한 동정이 과장된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연예계 이면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지금의 수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간통과 불륜의 드라마로 이어지면서 정점에 달한다. 간통 재판 기사는 당대 최고의 특종으로 몇 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파헤쳐진다. 화보에서 여성의 육체를 대할 때와 같이 연예기사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한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연예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즉 낮 시간의 주부, 고고클럽을 드나드는 여대생과 여공 그리고 전문직이랄 수 있는 마담, 호스티스에게까지 미친다. 주간지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1970년대 대중의 새로움이란 시대 요구에 맞게 분출되고 소비되는 성에 의해 증명되는 것 같다. 1970년 정부의 윤리위원회는 음란성의 기준을 들고 검열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성적 수치심’과 ‘성적 흥분’이란 말이 여기서 시작되거니와, 그 기준이란 형편없이 자의적이다. 예컨대 미니스커트 단속기준이 “속옷이 비치는 칠칠치 못한 여자” “경찰이 보기 민망스러운 아가씨” 등 판단을 포함하는 상황에서 통제의 합리성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선데이서울’의 화보는 대중의 선택을 이끌었고, 통제 권력은 대중의 선택을 적당한 선에서 존중해 주었다. 이는 주간지의 이중적인 태도가 통제 권력과 적절히 호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데이서울’의 ‘쇼킹화제’ ‘놀랐지 정보’만 보면 한국 사회는 온통 성해방에 도취된 듯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간지는 건전 코드를 이에 적절히 버무려놓는다. 가정주부와 청춘남녀에게는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타이르고, 호스티스와 마담에게는 건실한 직업의식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이 같은 성적 올바름은 ‘선데이서울’이 표방한 선정성과는 모순되지만, 성적 유흥의 허용되는 대가로 지불되는 최소한의 포즈이기도 했다. ‘선데이서울’은 이 아이러니를 ‘딸자랑’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포장했다. 학자에서 사업가, 예술인, 정치인에 이르는 사회 저명인사의 딸을 소개하는 ‘딸자랑’의 화보가 비키니 화보나 거리의 관음적 ‘도촬’과 나란히 놓인 장면은 퇴폐와 순결이 혼재된 1970년대의 한 풍경으로 도드라져 보인다. ■ 부에 대한 열망 - 성공 이데올로기주간지의 또 다른 관심은 말 그대로의 ‘돈’이었다. ‘신동아’ ‘세대’ 등 종합교양월간지와 달리, 주간지는 어떤 수사적 표현도 배제한 채 돈 버는 일에 집중한다. ‘차관’과 ‘재벌’이 월간지의 경제문제 키워드였다면, 주간지의 관심은 ‘부자’가 핵심적 주제였다. ‘선데이서울’의 초창기에 연재된 ‘예비재벌’은 대중의 열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재벌이 경제문제로 부각될 때 평범한 대중은 재벌의 비리나 국가 경제를 걱정하는 대신, 어떻게 우리도 그들처럼 부자가 될 수 있는지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예비재벌’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재벌처럼 돈을 번 사람들이다. 중소규모 상공인과 자영업자가 다수였지만 공무원이나 교직원, 종교인, 나아가 돈깨나 만진다는 마담들도 예비재벌의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이들은 하나같이 ‘맨주먹’으로 떨쳐 일어나 남이 부러워할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몇 년이 지난 후 이들 중에서 준재벌의 수준에까지 오른 이들도 많았으니 이들은 곧 대중의 선망 대상 혹은 역할 모델이 되었다. 부가 이 시대의 미덕이 되고, 부에 대한 열망이 인정받자, 부를 선취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결과로써 정당화된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돈을 모을 수만 있다면, 그 과정의 작은 비위는 ‘선데이서울’에서만큼은 문제 삼지 않는다. ‘쇼킹화제, 집 사고 차 산 구두닦이 4형제’(1971·1·31)는 가난한 형제의 미담을 전하는데, 기사의 핵심은 그들이 큰돈을 모았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 등장한 땅투기, 고리대금, 식비·하숙비 착취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성공비결로 여겨진다. ‘선데이서울’이 발굴해낸 수많은 성공담들은 1970년대 개발과 성장의 비열한 신화와 너무나 닮아 있다. 최소한의 포즈도 없는 성공 이데올로기의 맨얼굴 앞에서 공식적인 윤리적 규범은 작동하지 않는다. 실상 ‘선데이서울’을 포함한 대중잡지에 등장하는 규범들은 스스로 그 규범을 무화시키는 모순을 노출한다. 예컨대 여성들의 성적 일탈을 질정하는 윤리적 규범이 잡지의 곳곳에 표면화되어 나타나지만, 한두 페이지만 넘기면 곧 여성의 성감대를 가르쳐주며 어떻게 잘 놀고 즐길 것인지를 상세히 알려준다. 가난이라는 좌절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고 한껏 동정하고 위로한 뒤 곧바로 재벌을 향한 부러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두 모습 모두 대중의 실체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대중의 정서에는 두 가지의 감정이 혼재되어 있다. 모호한 윤리의식에 정체성을 의탁하는 동시에 통속적인 욕망에도 충실한 것이 대중적 욕망의 참모습이다. ■ 권력과 욕망의 사이 ‘선데이서울’이 보여준 대중의 욕망은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듯이 보이지만, 문제는 거기에도 권력의 억압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에 드리운 그림자는 유신체제의 실질적인 힘이다. 1975년을 기점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활력은 한풀 꺾이면서 권력과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대마초 파동같이 직접적인 제재도 있었으며, 긴급조치 같은 초법적 권력에 의해 대중의 의식 자체가 억압당하기도 했다. 이 시기 ‘선데이서울’에도 관변 기사들이 눈에 띈다. 육영수 여사 1주기 특집기사에서 백리 길을 걸어와 매일같이 참배했다는 노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배신자 김형욱’을 비난하는 연예계 인사의 공개 발언이 소개되기도 한다. 1980년에 이르기까지 이 어색함은 가시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선데이서울’은 제 역할을 잃어갔지만, 1970년대 대중성의 기원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통제와 억압에 현실적으로 대응해 간 대중의 날욕망은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데이서울’의 선정성도 변함이 없다. 『명저 새로 읽기 -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곽차섭(사학과)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422 첨부파일 1 [명저 새로 읽기]앨런 재닉·스티븐 툴민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ㆍ분석철학을 낳은 ‘세기말 빈’의 문화“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1918) 머리말에 나오는 유명한 언명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의 절대적 구분, 즉 사실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을 칼로 자르듯이 단절한 것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과 종래의 모든 철학자들을 갈라놓은, 결코 넘을 수 없어 보이는 경계선으로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 수리논리학이나 분석철학의 발전에 공헌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온 것도 사실과 가치에 대한 바로 이러한 구분 때문이었다. 그가 러셀과 프레게, 그리고 조지 무어 등 영국의 논리철학자들과 맺은 친교도, 철학이란 언표 가능한 세계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체라는 주류 해석에 일조하였다. 요컨대 논리-철학 논고 는 한 천재 철학자에 의한 매우 새로운, 순수 논리적 성격의 저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한 중요한 측면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제 어떻게 그러한 발상을 하게 되었을까. 그가 케임브리지에 온 뒤라고 말하면 문제는 쉬워지겠지만, 과연 그럴까? 앨런 재닉과 스티븐 툴민이 함께 쓴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필로소픽)은 바로 이 의문에서 출발한다. 풍요롭게 보이지만 쇠락의 징후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던 세기말 빈-19세기말에서 1차대전 이전까지의 합스부르크 제국 말기-의 문화지형과 시대정신을 비트겐슈타인과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그의 저작 의도를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이 책의 재미는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작 논리-철학 논고 와 철학적 탐구 를 다룬 부분보다는, 저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발상을 예비한 인물들로 지목한 사회비평가 카를 크라우스, 건축가 아돌프 로스, 평론가 프리츠 마우트너 등을 중심으로 기술된 지성사적 기술을 음미하는 데 있다(칼 쇼르스케의 역작 세기말 비엔나 와는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 당시 빈의 문화계는 오늘날 상상키 어려울 정도로 매우 촘촘히 밀착되어 있었다. 소집단을 형성한 문화 엘리트들은 일상에서 서로 빈번히 조우하고 있었다. 예컨대 안톤 브루크너가 루트비히 볼츠만에게 피아노 교습을 해주고, 구스타프 말러가 정신적 문제로 프로이트를 찾아가고, 요제프 브로이어가 프란츠 브렌타노의 주치의일 뿐 아니라, 프로이트와 결투를 벌였던 빅토어 아들러가 그와 함께 저명한 신경학자 마이네르트의 임상진료소 조수였다는 식으로, 세기말 빈의 문화 엘리트들은 친분으로든 적의로든 서로 가까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이다.철학계를 놀라게 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발상은 그 자체로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바로 그가 얽혀있던 빈의 문화적 산물이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빈으로부터 무엇을 얻었던가? 결론은 이렇다. 논리-철학 논고 는 본질적으로 논리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글 첫머리에 인용한 그의 언명을 이런 관점에서 연결하자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말해질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명료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기말 빈의 이른바 ‘카카니아’ 문화는 휘황하고 번드레한 말의 성찬을 쏟아냈지만, 도덕과 가치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들은 바로 그러한 성찬의 허망함을 직시하려는 하나의 놀라운 철학적 시도였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을 포용치 못한 카카니아 문화는 1차대전에서의 패배 이후 마치 신기루처럼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5> 한국정치와 무덕전』 차철욱(한국민족문화硏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562 첨부파일 1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5 한국정치와 무덕전폭압 정권과 저항세력이 충돌한 공간 "국회의원은 버스 속에서 수난, 피란민들은 장마를 만나서 수난"이라고 적힌 신문기사의 한 토막이 1952년 피란 시절 우리나라의 정치와 피란민들의 생활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매일 날품을 팔아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고, 얼기설기로 엮어 만든 판잣집에서 고단한 육체의 피로를 풀어야 했던 피란민들에게 긴 장마는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변수였다. 1952년 5월 26일 통근버스에 탄 국회의원들은 5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감금되었다가 공병대 크레인에 끌려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이 사건만큼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무시당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6·25전쟁 당시 한국 정치의 소용돌이는 오늘날 서구 부민동에 자리 잡았던 경남도청과 도지사관사였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일어났다. 도청은 정부청사로, 도지사관사는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었다. 국회의사당은 1.4후퇴 이후에는 부산극장에서 개원했다가 1951년 6월 경남도청 내 무덕전으로 옮겼다. 야당 국회의원이 다수를 구성했던 당시 국회와 이승만정권 사이의 갈등은 커다란 정치적 사건으로 드러났다. 거창양민학살, 국민방위군사건, 중석불사건 등을 파헤친 것은 6·25전쟁 당시 이승만정권에 도전한 살아있는 국회의 참모습이었다.국회의원들의 버스 속 수난은 국회와 이승만정권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양측의 갈등은 이승만 저격 사건으로도 연결되었다. 무덕전은 국회의원들의 공론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친이승만계열 정치깡패들의 국회의원 성토장이기도 하였다.무덕전은 1938년 2월 경상남도 경찰부가 유도, 검술 등 무술연마를 위한 체육관으로 건설했다. 건설 자금은 부산의 일본인 기업이었던 조선가스회사가 남선전기로 병합될 때 경상남도에 제공한 기부금 11만 원을 이용했다. 규모는 건평 187평으로 기와 건축물이었다. 무덕전은 건물의 본래 목적인 무술연마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지만, 정치적인 행사의 공간으로도 자주 이용됐다. 일제 강점기 말 군인으로 참전하는 젊은이들이 징병검사를 받는 공간이기도 하였고, 군인으로 참전한 가족을 위문하는 행사장으로도 활용되었다. 또 방공사상 보급과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조선방공협회 경남도연합회지부가 결성되던 곳이기도 하였다. 즉 그 시대 무덕전은 일제의 정치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됐다.6·25전쟁 당시 무덕전은 일제 강점기와 비슷한 정치적인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 전 군법회의장으로도 이용됐다. 그 시절 군법회의로 다루어진 대표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조방낙면사건'이었다. 조선방직은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돌아간 귀속재산이었다. 6·25전쟁 당시 종업원 6000명 이상의 대규모 방직공장이면서 전쟁의 피해가 없어 군복지를 생산하는 군납공장으로 지정되었다. 조선방직은 일제 강점기부터 근무해온 기술자 정호종과 부산의 대표적인 경제인 김지태 등이 참여하여 불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권이 큰 기업체였기 때문에 불하를 위한 정치적인 입김도 적지 않았다. 이승만의 양아들로 알려진 강일매에게 불하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 내용은 낙면을 이용한 군복제조로 군인들의 전투력을 떨어뜨려 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사법부 재판이 아닌 군법재판이 가혹하다는 여론에도 이 재판은 1951년 5월 18일 무덕전에서 공개리에 진행되었다. 관심이 많았던 사건인 만큼 방청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기소 내용은 피고인들이 남로당원이었다는 점, 군복의 품질을 고의로 낮춰 적을 이롭게 하여 국군의 작전을 방해했다는 점 등으로 이적행위로 규정되었다. 단순한 기업체 불하와 관련한 경제사건이 아니라 정치와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무덕전은 한국현대사에서 단순한 심신수련장이 아닌 폭력적인 수단으로 국민을 지배하려는 국가권력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충돌한 공간이었다.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8> 사상공단 국제상사』 이상봉(한국민족문화硏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922 첨부파일 1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8 사상공단 국제상사지금은 유통 물류단지지만 1970~80년대 부산 먹여 살린 신발산업의 메카 자리잡아 르네시떼, 홈플러스, 이마트, 하이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들이 즐비하고 주변엔 아파트 단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사상구 괘법동 일대. 이곳은 이전에 한국 신발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국제상사가 있던 공단지역이다. 수질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삼락천이나 주변의 작은 공장들이 이곳이 1970~80년대 부산 경제를 이끌던 사상공단이었음을 암시할 뿐, 명품 가로공원을 갖춘 잘나가는 유통 물류단지로 완전히 탈바꿈한 모습이다.옛 국제상사가 있던 사상공단은 도심지에 흩어진 공장을 한데 모으기 위해 1968년 착공되어 1975년 준공된 곳으로, 주로 신발·봉제와 주물·조립금속 등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자리 잡았다. 당시 도시 외곽 지역이던 낙동강 동안의 저습지에 공단이 조성된 데다 계획적인 단지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변두리의 일반주거지와 뒤섞이면서 공단이 형성되었기에 하수·폐수 시설이나 도로정비 등의 기반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았다. 공단에는 당시 한국경제의 주력산업이던 신발, 섬유, 화학공장 등이 즐비했다. 공단은 산업화와 함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온 사람들에게 일터를 제공했고, 그들은 이곳을 삶 터로 삼으면서 갖가지 애환과 추억을 일구었다. 청춘을 공단에서 일하며 보낸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고, 나이가 지긋한 일반 시민 대부분에게 사상공단은 부산 경제의 토대를 마련한 산업화시대의 아리고도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당시의 사상공단을 상징하던 국제상사 사상공장을 중심으로 산업화시기 부산의 모습과 추억을 회고해 보자.■국제상사 단일규모 세계최대 공장 완공국제상사를 이야기하자면 부산의 신발산업을 빼놓을 수 없다. 해방 이후 부산에는 일본의 생산기지를 넘겨받기에 유리한 입지 등을 발판으로 삼아 신발·고무공장이 생겨났다. 말표 태화고무(1945년), 왕자표 국제고무(1949년), 범표 삼화고무(1952년), 기차표 동양고무(1953년) 등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유명 브랜드의 고무신공장들이 모두 부산에서 탄생했다. 초기에 이들 고무신공장이 들어선 곳은 범일동, 범천동 등 동구 동천 변이었다. 동천의 산업용수와 접근성 그리고 인근에 몰려든 피란민들의 풍부한 노동력이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1950년대 중반으로 넘어서면서 삼화고무나 국제고무 등은 종업원 1만 명이 넘는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신발산업이 국가의 유력 수출산업으로 장려되면서 저임금 노동을 기반으로 한 대표적인 수출산업으로 입지를 굳혔다.신발공장이 사상공단으로 본격 진출하게 되는 것은 국제화학(1973년 국제상사로 사명변경)이 1972년에 단일공장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사상공장을 완공하면서부터이다. 이후 국제상사 사상공장은 신발산업의 전성기인 1970, 80년대를 대표하는 공장으로 우뚝 섰다.1992년 정부의 신발산업 합리화 조치와 함께 사양길로 접어들기 이전까지 부산은 신발이 먹여 살렸다고 할 정도다. 당시 부산의 제조업 종사자 40%가량을 신발산업이 차지했다. 수출의 선봉, 신발산업의 메카, 세계 최대의 단일공장 등 당시 국제상사 사상공장을 표상하던 용어들은 어느새 부산의 자부심이 되었다. 지금은 쇼핑센터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는 국제상사 사상공장의 옛터를 돌아보면서 과거 잘나가던 시기의 영광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러한 외부적 표상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저임금 노동자·날날이집 애환도 물씬그러한 외부적 표상의 이면에는 신발공장에 묻혀 산업화의 힘든 시기를 지나온 노동자들의 애환이 자리하고 있다. 신발공장은 저임금 노동에 기반한 노동집약산업인 데다 악취와 먼지, 그리고 건강을 위협하는 화학약품에 상시 노출되는 열악한 작업장이었다.공장 폐수 등으로 삼락천의 고인 물은 화학약품 저장고를 방불케 했다. 주변의 주택가에서는 아침에 흰 빨래를 널어놓으면 저녁에 걷을 때 검은 빛으로 변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했다.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이 모여 들다보니 공장 주변의 주거환경 또한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공장 주변에는 이른바 '날날이 집'이라는 주거공간이 즐비했다. 당시 집주인들은 더 많은 셋방을 놓기 위해 조금이라도 여유 공간이 있으면 방 한 칸에 부엌을 달아 날날이 집을 추가했다. 한 집에 대여섯 개의 셋방이 딸려 있기 일쑤였다. 좁고 부실한 공간에 많은 가구가 모여 살다보니 힘든 것은 당연하지만, 거기서도 사람 사는 냄새는 진하게 묻어났다.국제상사의 노동자들 가운데는 호남지역 등에서 돈 벌러온 외지인과 여공이라 불린 여성노동자들이 특히 많았다. 지금은 중년의 '부산 아지매'가 되어 있을 당시의 여공들은 고혈을 짜내는 강도 높은 노동환경 속에서도 나름의 희망과 추억을 엮어 갔다. 두고 온 가족의 생계나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어린 나이에 산업전선에 뛰어든 감동적 사연은 당시로써는 흔한 레퍼토리였다. 육교로 연결된 통로로 공장과 기숙사를 매일 오가며, 또 시간을 쪼개 인근의 구포여상에서 공부를 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치열한 청춘을 살아간 여공들의 서사는 비단 국제상사뿐 아니라 1970, 80년대 우리 시대상을 대변한다.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한 국제상사 기숙사 건물 터에는 이들 어린 여공의 고통과 희망 그리고 부대끼던 청춘의 치열한 삶이 그대로 배여 있다.■1980년대 중반 정점 찍고 내리막길신발산업은 저임금에 기반을 둔 전형적인 노동집약산업으로 강도 높은 노동력 관리에 의해서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잔업, 생산량 증대를 위한 공장 새마을운동 등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안간힘에도 한국의 신발산업은 중국이나 동남아 후발 국가들보다 더 나은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점차 힘들어진다. 오히려 생산량을 짜내기 위한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강력한 노동운동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신발산업이 최고의 생산실적을 기록한 것은 1980년대 중반으로 당시 국제상사에만 1만5000명이 넘는 종업원을 둘 정도였다.1980년대 후반의 노동쟁의와 주요 바이어들의 이탈로 1990년대 초반 특히 1992년 정부의 신발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삼화, 진양, 태화, 동양 등 부산의 대규모 신발공장들은 줄도산을 면치 못하게 된다. 1986년 모그룹의 해체로 한일그룹에 인수되었던 국제상사 사상공장 역시 생산라인을 대폭 줄이게 되었다. 국제상사 사상공장은 1992년 김해시로 이전하면서 사상공단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 부산경제의 한 축인 신발산업… 이젠 신성장동력 잰걸음- 국제상사 재계순위 6위서 그룹 해체- 흥망성쇠 속에서도 독자 브랜드 유지국제상사 사상공장의 흥망성쇠는 부산의 신발산업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신발산업이 절정에 달하였던 1980년대 중반 국제상사의 모기업인 국제그룹은 재계 순위 6위를 기록할 정도로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으로서의 입지를 자랑했다. 5공화국 정권의 재벌 길들이기 시범케이스로 국제그룹이 공중분해가 되면서 국제상사는 한일그룹으로 넘어갔고, 그 후 사상공장의 김해이전, 모 그룹의 부도와 법정관리, 매각 등을 거쳤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진 대표적 신발기업으로 자리하고 있다.부산의 신발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 것은 값싼 노동력 중심에서 기술력과 디자인에 기반을 둔 경쟁력으로의 전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전만은 못하지만, 신발산업은 여전히 부산의 핵심 산업이다. 2011년 기준으로 부산의 신발제조업체 수와 종사자 수는 230여 곳에 5700여 명으로 전국 대비 45% 안팎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자체 브랜드나 OEM으로 수백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도 있지만, 전체 80%가량은 종업원 20인 미만의 영세성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들어 기능성 신발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면서 신발산업은 노동집약산업이 아닌 첨단 R D(연구개발) 및 디자인 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부산시와 신발업계는 사상구에 신발산업 명품화를 위한 '첨단신발융합 허브센터'를 건립하는 등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모쪼록 신발산업 메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4> 피란민의 흔적, 판잣집』 차철욱(한국민족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645 첨부파일 1 정전 60주년-임시수도 부산의 삶과 문화 4 피란민의 흔적, 판잣집한 세대, 1·2평가량 공간서 불안한 삶 "낙엽진 포푸라가 눈바람 속에서 추워떨면 판잣집 문틈으로 밀려들고 겨울바람이 한결 차거웁다." 1952년 12월 어느 날 국제신문에 실린 피란민의 판잣집 생활풍경이다. 피란민들의 부산 정착은 갑작스러웠다. 특히 1·4 후퇴와 이북피란민들의 부산행은 더욱 그랬다. 북진한 국군과 유엔군의 생각지 못한 철수 때문이었다. 잠시 이 순간만 피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부모형제와 평생 못 보고 살아갈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전쟁 직전 약 40만 명 정도였던 부산 인구는 1·4 후퇴 이후 84만 명을 넘었으니, 사회시설이 풍족할 리가 없었다. 정부와 부산시가 부랴부랴 수용소를 마련하였다. 적기수용소, 영도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등 공장이나 극장 같은 대규모 시설을 지정하였으나, 모두 7만 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었다. 수용소라고 해서 특별한 시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기수용소는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수출하는 소를 검사하던 막사였다. 당감동수용소도 인근 가야역에서 사용하던 말 마구간이었다. 이런 수용소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피란민들은 스스로 주거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친척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셋방을 비싸게 장만해야 했다. 이것도 저것도 마련할 수 없는 피란민들은 빈 땅만 있으면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판잣집은 국제시장과 부두를 배경으로 한 곳이면 어디든 등장했다.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 영도 바닷가, 충무동 해안가 등에는 순식간에 판잣집들로 가득했다. 판잣집이라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리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보수천가나 해안가의 판잣집은 수상가옥 같았다.판잣집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한 세대가 1, 2평 남짓 된 공간이었다. 넓을 필요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곧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료 구하기도 어려웠다. 바닥을 조금 파고 모퉁이에 나뭇가지로 기둥을 세우고, 가마니로 벽과 바닥을 만들었다. 나무판자나 운 좋게 함석을 구하면 지붕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도 안 되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박스에 콜타르를 발라 사용하였다. 혹은 돌을 주워다가 돌벽을 만들기도 했다. 돌아다니다 집 짓는 재료는 무조건 주워다 사용했다. 이웃에 누군가 또 피란 오면 집터를 양보하면서 같이 어울려 살았다. 판잣집에 몸만 눕혀 잘 수 있으면 좋았다. 피란민 마을의 흔적이 남아있는 당감동이나 아미동, 우암동에는 이런 집터의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다.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피란민들을 괴롭힌 것은 화재였다. 하루에도 몇 건씩 발생하는 화재는 판잣집을 원흉으로 몰아갔다. 국제시장 화재, 부산역전 대화재로 판잣집 철거가 본격화되었다. 화재는 또 다른 이재민을 생산했다. 그동안 얼기설기로 만들었던 판잣집도 사라졌다. 미국 원조기관에서는 천막을 제공하여 이재민의 임시거처로 사용하였다. 천막 임시거처는 괴정, 영도 청학동, 동상동 등에 설치되었다. 난방시설이 없어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토박이들의 텃새도 만만찮았다. 아미동 천막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에 설치되었다. 천막 하나에 12~16가구가 함께 살았다.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무덤 하나가 한 가족의 집이 되었다. 이런 시설이지만, 시내가 가깝고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던 피란민들에게는 그나마 좋은 위치였다.피란민 마을 가운데 그때부터 여태까지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판잣집은 현대식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비좁은 골목길이나 집들의 모양새에서 당시의 흔적은 여전하다. 피란민의 생활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오늘의 부산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7> 동래별장과 온천』 변광석(한국민족문화硏 H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757 첨부파일 1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7 동래별장과 온천왕실·양반의 휴식처 동래온천, 日帝가 별장 짓고 온천장 개발 아이러니 ■동래별장 가는 길 동래 온천장 번화가에서 금강로를 걷다 보면 온천1동 주민센터가 보인다. 그 뒷길로 살짝 접어들면 아주 긴 기왓담을 직각으로 펼치고 안으로 고가와 수목이 들어선 별천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유명한 동래별장(東萊別莊)이다. 지금은 야외결혼식 및 궁중 한정식과 각종 코스 요리로 알려진 식당이지만, 원래 일제 강점기 초에 지어진 일본식 정원건축이었다. 해방 이후 방치된 별장이 미군에 의해 군정사무실과 휴양시설로 이용되다가 민간인에게 매각돼 고급 요식업으로 오랫동안 운영됐다. 1990년대 이후 한때 문을 닫았다가 2000년도에 재개장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APEC 공식 레스토랑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역사를 품어온 온천 역사의 시계를 돌려 온천장의 유래를 보자. 온천장은 원래 금산리(金山里)로서 100여 년 전에는 30여 호가 살던 자연마을이었다. 수려한 금정산 기슭에 있었으니 금산마을이라 불렸다. 이곳은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온정(溫井)이 알려져 온천욕을 하면 아픈 사람의 몸을 치유해 주는 특효가 있기로 유명했고, 고려·조선 시대에도 많은 왕실 종친과 양반 문인들이 왕래했다. 심지어 조선에 사신으로 온 일본인들도 온천의 효능을 알고 동래 온정에 일부러 들렀다가는 해프닝이 더러 있었다. "1438년(세종 20) 내이포(진해 웅천)에 들어왔던 왜인들이 서울에 올라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모두 동래 온정에서 목욕하는 바람에 길을 둘러서 달리게 됨에 따라 사람과 말이 모두 지치게 되어 폐단이 많으니, 이들은 영산 온정에서 목욕하게 하고, 부산포에 정박한 왜인은 동래 온정에 목욕하도록 했다"고 한다('세종실록' 20년 3월 1일). 이와 함께 조선 중기 문신 이윤우(李潤雨)가 1617년(광해군 9) 노구의 스승인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모시고 동래온천에 다녀온 일기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 등 알려진 이야기가 많다. 방문객이 많이 이용하고 시설이 점차 노후해지다 보니 욕탕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1766년(영조 42)에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온정을 대대적으로 고쳐 짓고는 그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바로 온정개건비(부산시기념물 제14호)로서 1.4m 높이의 아담한 비석으로 현재 녹천탕 앞 용각 안마당에 세워져 있으며 매년 용왕제를 지내고 있다. 이렇게 역사성이 깊은 온천이 정작 경술국치 이후로 일본인들에 의해 온천이 특화되고 개발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개발과 근대 관광 한말 이후 부산은 서구 근대문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본 자본가들이 부산에 대거 진출하면서 근대의 상징인 전기와 철도를 가설하기 시작했다. 1909년 부산~동래 간 경편철도를 운행하다가 1915년에는 부산 도심에서 온천장까지 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온천장의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개항장 전관거류지에서 많은 일본인이 온천장·금강공원·범어사·통도사 등을 유람하는 붐이 일어난 것도 이때부터였다. 동래별장은 일제 강점기 대지주 하자마(迫間房太郞)가 지은 일본식 정원건축이었다. 그는 19세기 말 부산에 들어와 장사하다가 독립한 뒤 토지약탈과 고리대 등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동래·김해·양산·밀양 등에 많은 땅을 가진 대지주였다. 당시 부산에는 그와 같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곳곳에 별장을 짓고 관광과 유흥을 즐겼다. 온천장에서 유명했던 여관 중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봉래관(蓬萊館·농심호텔의 전신), 대지여관(大池旅館) 등이 있었다. 깨끗한 욕탕과 호사스러운 시설을 갖추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봉래관 앞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지금의 허심청 앞 일대다. 연못은 온천천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호수로서 나룻배를 타거나 물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잘 알려졌다. 지금도 농심호텔이나 허심청에 들어가면 복도에 전시되어 있어 옛 모습을 생각게 한다. 처음 별장 자리에 있던 건물을 헐고 본관과 별관 등 확장 공사를 하면서 박간별장(迫間別莊)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전체 구조와 배치는 일본인 부자의 위세를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 일본의 고위 관리가 부산에 오면 머물기도 하고, 한때는 일본 왕족이 방문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먼저 '동래별장'이라 쓰인 대문에 들어서면 공간을 하나씩 만날 수 있다. 첫눈에 진입로 따라 아담한 숲사이로 별장의 본관이 나타난다. 긴 복도와 유리창으로 장식한 목조 2층의 일본식 건물로서 해묵은 외벽 목재와 석조로 된 실내 목욕탕이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다만 보수하면서 일부 목재의 교체가 있었고, 지금은 한정식 레스토랑으로 변해 실내의 원래 구조를 알 수 없다. 정원에는 각종 수목과 석물이 잘 조경되어 있다. 뒤에 가면 일본인 구미에 맞춘 작은 연못과 돌다리를 감상할 수 있는 정자가 있고,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에 좋다. 근대 개발의 붐이 일면서 온천장은 대단한 유명세를 탔다. 그러자 업주들은 손님을 더욱 많이 끌려고 애썼다. 1915년 온천장에 대욕탕을 신축한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는 입욕권과 철도할인권을 묶어 발행하면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이른바 관광과 목욕을 묶어 파는 패키지상품이었다. 1922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온천장에 대형 만철호텔을 세우면서 온천경영권을 주도했다. 당시 온천욕과 금강원 관광을 선전하는 사진엽서나 안내도가 유행하여 사람들의 관광선망을 자극했다. 이렇게 동래온천과 금강원을 하나의 위락권으로 만든 관광문화는 제국주의 일본의 자국민과 조선민에 대한 식민지관광 육성책에 의한 것이었다. 유서깊은 동래에서의 온천욕과 여행경험담은 일본인들을 부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입항하게 만든 식민지 관광의 효과적인 홍보수단이었다. 이로써 대규모 숙박시설, 식당과 상점이 들어서고 화려한 벚꽃 가로숫길이 열리면서 일본인을 위한 환락형 온천장으로 변해갔다. # 한 세기 돌고 돌아 - '영욕의 세월' 딛고 다시 시민 품 안은 도심 속 휴식 공간 동래별장은 제국주의 강점기에 일본인 수탈자본가의 별장이었다가 해방 후 군정 시절엔 미군들의 휴양시설로 내어주던 오욕의 세월을 거쳐 비로소 한국인의 손에 들어온 반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민간에 매각되고 1960~80년대에는 부산에서 매우 잘나가는 고급 요정이었다. 이른바 정·관·재계의 유명인사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가야금과 장구의 장단에 부채춤을 추는 기생들이 즐비했으니 하룻밤 연회가 끝난 이튿날에는 수십 벌의 한복이 별장 앞 세탁소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학부 시절에 농담으로 동래별장 기생 구경하러 가자고 종용하던 별난 친구도 있었다. 물론 당시 시세로 한 상에 100만 원을 호가했으니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거늘. 지금 동래별장에는 전통혼례식장, 민속공연마당, 한식당, 일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아늑한 자연 속에서 음식공간의 영역을 초월하여 한국과 일본의 요리 등 다국적 맛을 볼 수 있고, 다양한 공연을 감상하며 편안히 함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동래구에서는 매년 10월 동래읍성역사축제를 열고 있다. 동래읍성과 문화회관 및 온천장 일원에서 다양한 문화놀이와 역사재현 마당이 펼쳐지는 흥겨운 한마당이다. 용각 앞에서는 동래온천 용왕제 길놀이도 구경할 수 있다. 온천축제가 열리면서 동래스파토피아라는 명물도 등장했다. 지나는 길손들은 아무나 발을 담그고 피로를 풀 수 있는 노천 족탕이다. 지난 영욕의 세월을 걷어내고 이제 온천장은 시민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왔다. 동래별장과 온천은 시민들에게 더욱더 친숙한 휴식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6> 수영비행장』 양흥숙(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210 첨부파일 1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6 수영비행장센텀으로 익숙한 그곳, '수비'(수영비행장)라는 지명만 남은 軍用비행장이 있었지 수영비행장을 의미하는 '수비'는 우리의 시야에서 이미 사라졌고, 지명으로 남아 있다가 이 일대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바뀌는 탓에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점차 멀어지고 있다.해운대 수비지점이라는 간판을 내건 몇몇 음식점 등에서 수비라는 명칭을 겨우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수비삼거리는 수비사거리였다가 이제는 오거리가 되고 그 이름도 거창한 올림픽교차로가 되었다. 옛 수영비행장이 있던 터는 지금 센텀시티로 더 잘 알려졌다. 오랜 역사를 가진 부산에서 50년 정도 존치한 수영비행장이 부산의 '잊힌 공간'으로 선택된 이유는 뭘까? 이 지역에 수비라는 이름이 빠르게 지워지는 것은 골프장, 비행장, 군부대, 컨테이너 야적장이라는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민과 호흡하지 못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수비삼거리라는 명칭을 기억할 뿐 수영비행장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너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나 빠르게 지금의 모습이 되면서, 도심 한복판에 공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성으로 다가온다.■일제 병참기지 필요성에 탄생부산에 비행장을 만들자는 논의는 이미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조선총독부 고시(告示)에 따라 공용 비행장으로 설치된 것은 1929년 경성비행장과 울산비행장이었다. 비행장들이 속속 생겨나자 부산과 오사카, 시모노세키 사이의 우편, 화물과 여객 운송을 위한 비행장이라든지, 일본과 만주를 연결하기 위한 경유지로서의 비행장이라든지, 부산 비행학교 건립 등의 논의 속에서 부산비행장 설치 문제는 정책 현안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애초에는 평야지대인 부산의 대저, 명지 일대에 비행장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때도 현재의 김해공항이 있는 일대가 비행장이 들어서기 좋은 땅으로 여겨졌나 보다.그러는 사이에 항공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체신 당국에서 대구에 비행장을 새로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운영되고 있던 울산비행장을 폐쇄하고 대구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공항 유치 문제는 부산시와 경상남도 일대를 들썩거리게 하고,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만큼 지역의 첨예한 현안이 되고 있지만, 당시에도 울산 사람들은 울산군민대회를 열고 총독부에 항의방문을 하는 등 비행장 이전반대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울산의 반대에도 1937년 대구비행장이 개설됐다.부산에 비행장이 정식으로 들어선 것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비행장이 들어선 곳은 일본인 자본가가 조성한 해운대골프장이 있던 곳이었다. 일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군사비행장을 계획하고, 이곳에 있던 소나무 등을 베어내고 활주로를 만들었다. 한 원로교수의 기억에는 자신이 중학교 1학년 때 근로봉사라는 이름으로 수영비행장의 활주로를 닦았고, 수영비행장으로 가기 위해서 대연동에서 수영까지 걸어 다녔다고 한다. 건강한 청년은 모두 징병, 징용이다 해서 남아 있지 않으니까, 일제는 노약자와 어린 학생들까지 비행장 공사에 동원했다.■"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지금도 김해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면 비행기에서 어김없이 '김해공항은 군사공항이오니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해공항은 여객수송을 위한 민간 비행기뿐 아니라 군용비행기가 이착륙한다는 의미이다.일제의 육군비행장으로 출발한 수영비행장은 그 이후에도 군대가 주둔하고 국방부가 담당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일반 시민과는 격리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35만 평이 넘는 비행장 부지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 275만 평이 군사보호구역 등으로 지정되어 개발이 제한되면서 일반 시민과의 갈등이 늘 내재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민간항공기가 취항한 이후에도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라서 당시 '비행기 타봤나?'라는 말은 지극히 특별한 경험을 뜻하는 것이었다. 비행장 주변 학교에서는 하루 40여 회의 비행기 이착륙 소음으로 수업에 지장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기 일쑤였다. 여객 수송이나 화물 운송을 위한 민간공항이 김해로 옮겨진 이후에도 수영은 오랫동안 군용비행장으로 사용됐다. 수영비행장 부지를 부산시로 완전히 넘겨준 이후에는 수영비행장에 있던 군사시설을 김해공항으로 옮겼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차례 민간항공기가 이착륙하지만, 여전히 김해공항은 '제한된' 공간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해방 후 수영비행장이 정식 직제화한 것은 1958년 1월 대통령령에 따른 것이었다. 국제비행장으로 김포공항을 지정하면서 우리나라의 비행기 직제를 새로 만들었다. 이때 서울비행장, 부산비행장(수영비행장), 광주비행장, 강릉비행장, 제주비행장이 민간항공기가 이착륙하는 비행장으로 지정되었다. 부산비행장은 1963년에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다. 앞서 전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수영비행장 대합실이 완공되어 건물 낙성식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행기 탑승인구가 증가하고, 대형 기종의 비행기가 등장하고, 그에 따른 긴 활주로와 기반 시설이 필요함에 따라 1976년 부산수영비행장은 김해로 옮겨갔다.수영비행장은 이후 국방부가 담당하는 곳이 되었지만, 때로는 군중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부산을 방문하였을 때 수영비행장에 내렸고 이곳에서 노동자, 농어민 등 30여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교황의 강론이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1987년 가을 이 일대에는 군정(軍政)을 종식해 보려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열기로 넘쳤던 공간이기도 하였다.이렇게 옛 수영비행장 부지는 점차 시민의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부산시민과 부산시는 시민에게 부지를 돌려달라는 청원을 계속하였다. 국방부는 번번이 거부하고, 주유소, 야적장 등 민간업자에게 부지를 임대해 버렸으나 결국 1994년 수영군비행장을 김해로 옮긴다는 발표가 있으면서 이 지역은 시민의 공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정치인도 대표선수들도 출입국한 임시국제공항■ 6·25전쟁기 수영비행장- 전쟁통에 항공료 배 이상 올라- 항공용 기름 제때 조달 못한 탓6·25전쟁기 부산을 떠올리면 피란민이 밀집해 있는 산동네, 그들의 삶터인 국제시장, 애환의 영도다리, 서울 문인들이 찾던 다방 등이다. 게다가 1000일간의 임시수도였기 때문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가와 국회의원 등 유명인이란 유명인 대부분이 부산에서 피란살이했다.제2대 장면 총리가 1951년 1월 수영비행장으로 환국했다,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연합군총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1952년 1월 신익희 당시 국회의장이 새해를 맞아 유엔군을 격려하기 위해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등의 신문 기사가 6·25전쟁기의 수영비행장 위상을 짐작케 한다. 게다가 1952년 제15회 핀란드 헬싱키올림픽에 참가했던 대표선수들이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비행장은 환영인파로 가득찼다는 기사는 어려운 여건에도 메달을 따고 돌아온 선수도 선수지만, 전쟁이라는 혼란을 견디고 있는 국민 스스로의 위로를 표출하고 있다.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소개하자면 혼란스러운 전쟁통에 비행기값이 인상된 점이다. 서울-부산 간 항공 운임을 3만 원(圓)에서 7만5000원으로 올리자는 것인데, 이미 철도 가격이 1등급 좌석 기준으로 2만2133원에서 6만4134원으로 인상되었기 때문에 같이 인상한다는 것이고, 일본 같은 경우는 기차 가격보다 항공료가 2배 정도 비싸서 인상 값이 비싸지 않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항공료 인상액을 달러로 환산하면 30달러(엄격히 말하자면 외국인 운임가이다)로, 지금과 비교하면 항공료가 굉장히 높다. 전쟁통에 항공용 기름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비행기에 사용되는 휘발유, 윤활유를 일본에서 공수하고 있어 항공료를 인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항공료를 비교하면 서울~부산과 부산~제주는 30달러, 부산~대구는 10달러, 대구~제주 구간은 35달러였다. 서울~제주 간 요금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이 구간 직항노선이 없었던 모양이다. 비행기는 정기적으로 이들 도시를 운항하고 비정기적으로는 일본에 기름을 채우러 다녔던 모양이다.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5> 극장전』 문재원(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831 첨부파일 1 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5 극장전(劇場傳)영화도시 있게 한 '왕년의' 영화 1번지… 추억의 필름 다시 꺼내 본다 1. 늙은 영사기사의 낯선 꿈준석, 동수, 상택, 중호. 네 명의 친구들이 달리고 달린다. 달리기의 종착역은 삼일극장. 이 극장은 1970, 80년대 추억을 팔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친구들이 달렸던 길인 '친구의 길'이 관광지가 되면서 삼일극장은 영화 '친구'의 오마주가 되어 버렸다.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보다 영화관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유명세는 탔지만, 2006년 11월 16일 부산 동구 범일동 중앙대로 117번지 삼일극장은 간판을 내렸다. 당시 삼일극장은 전국 남은 몇 안 되는 단관이었다.이미 재개봉관의 흔적조차 더는 무색할 정도로 비 내리는 화면에 철 지난 성인영화만 돌리고 있었던 삼일극장은, 어쩌면 간판 내리기 오래전부터 2층 낡은 영사실에서 필름을 돌리고 있는 지방 변두리 '알프레도'(영화 '시네마 천국'에 등장하는 영상기사)의 오랜 '낯선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8차로 도로에 묻혔거나, 한참 거리가 먼 전자제품 가게가 호객행위를 하는 이곳에서 늙은 영사기사의 꿈을 꺼내 보는 것은 정녕 백일몽일까?2. 극장의 탄생부산시는 세계적인 축제가 된 부산국제영화제에 힘입어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영화도시 부산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중구 남포동에서 그 기원을 삼고 해운대로 확장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길이 모름지기 직선이 아니라, 모퉁이 삼각지를 한 번 찍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모퉁이 삼각지가 동구 범일동 삼일극장, 삼성극장, 보림극장의 재개봉관 트라이앵글. 물론 이들 세 극장이 전부는 아니다. 범일동의 금성극장(1956), 태평극장(1957)이 1980년대 초반까지 있었고, 이보다 일제강점기부터 문을 연 초량좌(1914), 유락관(1921), 대생좌(1930), 대화관(1942)을 비롯해 해방 이후 수정극장(수정동 1957), 대도극장(초량동 1958), 초량극장(초량동 1958), 천보극장(초량동 1960) 등이 생겨났다. 이를 보면 부산영화의 대표명사 중구 못지않게 동구에도 많은 영화의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번화한 상업공간도 아닌 주택지들이 밀집한 공간에 극장들이 몰려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6·25전쟁 이후 이곳에 비슷비슷하게 문을 연 재개봉관들은 당시 증가하는 관람객을 대변한다. 이들 극장으로 몰려든 주요 관람객은 인근의 조선방직, 국제고무, 삼화고무, 대선양조 등 부산의 경공업을 도맡았던 인근 공장의 수많은 노동자였다. 이들 극장의 환영과 함께 맡아지는 음습한 냄새들은 그래서, 쉽게 떨칠 수 없다. 이들은 공장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대개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문을 닫았지만, 삼일, 삼성, 보림극장은 2000년대 이후까지 우리 곁에 있었다. 또 다른 영화 1번지로.3. 삼일, 삼성, 보림의 트라이앵글삼일극장은 1944년 조일영화극장이라는 간판을 걸고 재상영관으로 출발했다가 해방 이후 삼일극장으로 개명했다. 다시 제일극장(1949)으로 바뀌었다가 1950년대 삼일극장으로 변경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 극장은 서울의 단성사와 흡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하여, 1966년 나운규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아리랑'을 찍으면서 이 극장을 단성사로 꾸미고 나운규의 장례식 장면을 촬영했다. 단성사, 나운규, 삼일극장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들은 얼핏 보아도 삼일극장이 만만한 극장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삼성극장은 이보다 훨씬 지난 1959년 삼일극장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재개봉관으로 문을 열었다. 단층이었던 삼일극장에 비해 2층 건물 1168석을 갖추어 제법 규모가 있었다. 이 극장이 2011년 5월 23일 문을 닫음으로써 부산의 단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이에 반해 보림극장의 등장은 화려했다. 이들 중 외형이 가장 큰 보림극장은 1968년 현재의 자리에 개관되었다. 사실, 보림극장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앞선다. 1955년 남포동에 건립된 보림백화점 내 2층에 자리 잡았던 보림극장이 당시 범일동 조양직물공장 부지를 매입해 5층 건물, 1473석으로 확장하여 개봉관으로 등록했다. "항도부산 유일의 초현대식 최고의 시설/ 문화의 전당 寶林극장"(부산일보 1968. 9. 27) 이라는 광고는 개관 당시의 위풍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위풍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개봉관이었지만, 당시 영화배급이 남포동 극장가 중심으로 우선 배급이 되었고, 현실적으로 보림극장의 영화 배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개봉관의 체면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그러다 보림극장은 쇼 무대 중심 극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70년대 톱스타 하춘화, 남진, 나훈아의 공연에는 부산 전역에서 관람객이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루었다. 1980년 조용필 쇼를 끝으로 쇼 무대를 마감하고 2편 동시체제로 전환되면서 점차 쇠락해 갔다. 남포동이나 서면의 개봉관과 격차를 더욱 벌리면서 90년대 이후 아예 성인물을 위주로 한 성인관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마주하고 있는 삼일, 삼성극장도 마찬가지였다.4. "쇼를 보았네"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를 따라 동래에서 보림극장까지 택시를 타고 '여로' 공연을 보러 왔다. 이것은 우리 집의 큰 문화행사였을 뿐만 아니라, 이웃집 '눈치 TV'를 저녁마다 보러 다녔던 내가 이웃집 아이를 이길 수 있었던 역전의 기회였다. TV에 나왔던, 우리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으리라 믿었던 그 '대단한' 사람들을 실제, 진짜로 보았던 것이다. 당시 극장들은 소위 '리싸이틀'과 영화 상영을 번갈아 했다. 74년 보림극장 하춘화 리싸이틀은 하루 5회 공연에 9000명의 관객을 동원(매일경제 1974. 7.12)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도 한몫했으니…. 어떻게 보면,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절박하게 목을 겨누었던 그때 극장으로부터 날아오는 하춘화나 엘비스 프레슬리나 경아(영화 '별들의 고향' 여주인공)에 몰렸던 것은, 그래도 이것이 이 도시에 살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의 문화였거나, 현실의 누추함을 견디어 나가는 환상의 방법론으로 다가온 선물이었을 것이다.특히 인근의 시장과 국제고무공장, 삼화고무공장 등 주변의 상공업이 활발하던 때, 비록 한 물 빠진 영화라 하더라도 새 영화 간판이 걸리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암표상이 극성을 부렸, 가마니에 돈을 담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니까 이 극장들은 당시 시내 개봉관으로 가지 못하는 인근의 노동자나 서민이 예술을 수입하고, 새로운 유행을 만나던 문화공간이었고 온종일 고된 노동에 막혔던 울혈을 토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장소였으리라. 그뿐이던가. 80년대를 지나면서,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부박했던 내 인생의 그 시절, 퀴퀴하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온종일 죽치고 앉아 본전 뽑은 이본 동시 영화는, 아니 이 삼류극장은 '찌질한' 해방구가 되기도 했던가.5. 영화도시의 스토리텔링영화 '삼거리 극장'(전계수 감독 2006)은 이 음습한 삼일극장에서 극장을 맴도는 혼령들의 유쾌한 춤과 노래를 판타스틱한 코믹으로 불러내었다. 이 장소에서 기대하는 지속적인 울림은 무엇일까. 단순히 여기에 극장이 있었네. 60년 전 극장이 있었다는 표지판을 세워 이곳이 극장 자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보다 더 간절함은 이 극장이 불러 모은 사람들과 그들의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영화 들어왔다', '하춘화가 내려왔다' 극장 앞으로 모여든 상기된 얼굴들을. 화려한 개봉관이 아니어도 너무도 유쾌했던 인근 여공들의 '고급한' 문화생활, 혹은 고단했던 하루와 비가 줄줄 내리는 스크린을 맞바꾸며 도시의 교양을 익혀나갔던 산 위의 이주민들, 금기의 구역에서 위반의 황홀감으로 희희낙락하며 질풍노도의 호기심을 채워나갔던 사춘기 학생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필름이 한판 신 나게 돌고 돈다. 그렇게 늙은 영사기사의 꿈은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그랬던 것처럼, 동네 노천극장에서 다시 빛을 볼 수 있을까? 영화도시 부산은 스펙타클한 '영화의 전당'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거리에 흩뿌려져 있는 영화 같은 이야기들에서 만들어지는 일인 것을. 처음 1 2 3 4 5 다음 페이지 끝 처음 다음 끝